• 사상과 이념의 고백
        2013년 09월 03일 04: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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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당 당원인 왼쪽날개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과거 고등학생 시절의 정치적 탄압 경험과 지금의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에 대한 내용을 글로 올렸다. 독자들과 나눌 의미가 있는 듯 하여 필자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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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1992년 학교 밖의 고등학생 정치조직과 관련되어 학내 언더조직들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재수가 없으려니 등교하면서 교문 앞에서 학생부 선생에게 잡혀서 으슥한 창고로 끌려가 두드려 맞고 조사 받던 날, 조직관련 문건과 보고서들을 잔뜩 지니고 등교하던 터라 학교에서조차 줄줄이 쏟아진 엄청난 자료들에 깜짝 놀라버렸다. 나는 꼼짝없이 사회주의자고, 관련 정치조직의 성원이고, 이 학교에 정치조직의 외곽 대중조직 단위 조직화를 책임진 책임자임이 까발리고 걸려버렸다.

    학내 관련자 전원을 불라고 얼굴이 땡땡 붇도록 뚜들겨 맞고도 완강히 버티자 학교에서 나에게 제안한 것은 “너의 제적은 불가피하고, 다른 관련자에 대해 최대한 선처하겠으며, 사건 자체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겠다. 모든 걸 이 학교 차원에서 마무리 짓겠다”는 것이었다.

    잡혀 끌려가는 순간 난 이미 공안기관에 잡혀가면 감옥 가겠다는 각오를 했던 터라 어떻게 이 보안사고를 최소화할지 머릿속이 가득했는데, 적어도 이 학교의 조직화가 침탈당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타협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사건과 관련해 최초 발각된 녀석 둘이 권고 자퇴 형태로 학교를 떠나고, 4명 무기정학, 그리고 20여명의 무더기 근신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2004년 어느 날, TV 뉴스에서 강의석이란 고등학생이 기독교 재단 학교에서 개신교 예배를 거부하다 제적당하고 학교 앞에서 제적의 부당함에 싸우며 1인시위를 벌이다 결국 학교를 굴복시킨 사건을 보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받았다.

    난 사회주의자이며 관련 조직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부당하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회주의는 금기된 사상이었고, 혁명은 R이라는 약어로 은밀히 나누는 밀어였으며, 관련 활동을, 그것도 어린 고등학생으로서 고등학생들의 정치세력화를 기획하고 활동한 것은 “적들”에게 당연히 불온한 것이고 걸리면 처벌 받는 걸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다.

    ‘왜 난 한 번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수십 명의 친구들의 이름을 까발리고, 그 친구들조차 모르던 내 정체에 대해 “빨갱이 집단으로부터 교육받고 너희들을 포섭하려 했던 위장 간첩”이라고 학교가 달아준 딱지를 묵묵히 감내하고, 나로 인해 징계당해야 했던 친구들에게 변명 한마디 못한 채 죄인처럼 도망쳐야 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후회하고 있다.

    2.

    적어도 그렇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 이 남한 땅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을, 정치적 기획을 지니고 있으며, 그 활동이 “적들”에 의해 침탈되었다면, 최대한 조직을 보위해야 하고, 그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은폐해야 하며, 여론의 몰매와 비난, 심지어 잡혀가 겪게 되는 모진 육체적 고문이 있을지라도 신념과 조직을 지켜야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을 테다.

    90년대 초, 서점에 발간된 두 권의 책이 기억에 남는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PD 언더 정치조직이었던 ‘노동계급그룹’, ‘삼민동맹’, ‘안양 PD그룹’, ‘인민노련’의 법정 진술서들을 묶어 발간한 책으로, [선진 노동자의 이름으로]라는 책은 이들 네 그룹의 법정 진술과 관련 자료를,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는 인민노련 관련자들의 법정 최후진술서를 엮어 출판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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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초,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던 시절, 그들은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법정에서 당당히 선언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이 정당하다고 역설했으며, 그로 인해 법으로 처벌받은 것이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당시 그들 주장의 많은 부분이 공감될 수 있고, 혁명노선과 같은 어떤 부분들은 대중적으로 별로 동의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지니고 관련활동을 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처벌받아야 하는 국가보안법의 존폐에 대해 대중적 동의를 물을 수 있을 만큼 변화한 것은 그 서슬 퍼렇던 시절, 법정에서 스스로를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그 투쟁을 통해 변화되어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NL은 남한 사회운동 진영에서 가장 탄탄한 조직화를 실현했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으로부터 보위 받는다”는 전통적인 조직화의 원칙을 가장 잘 구현한 세력이다.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사상적, 운동적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그들의 탄탄한 조직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그 조직적 강고함이 운동이 변화를 요구받던 시대적 흐름조차 이겨내고 스스로를 도태시킨 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단 한 번도 대중적으로 동화된 자신의 사상과 이념 이외에, 그 중심을 공개적으로 논쟁하고 검증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렇소, 우리는 김일성주의자요!”라고 당당히 밝혀야 한다. 세상은 깜짝 놀랄 테고, 자신을 지켜주던 갑주처럼 탄탄한 외곽의 대중조직들도 놀라 당신들을 버리겠지만, 비로소 당신들의 사상과 이념이 운동으로써 논의되고 검증받을 수 있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당신들의 이념과 운동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들이 김일성주의자라는 이유로 탄압받고 처벌받는 것에 함께 싸우겠소”라는 다른 이념의 이들을 동지로 만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왜곡과 날조”라며 모든 이들을 당신들의 신념과 조직을 지키기 위한 ‘탄탄한 외곽’으로만 여기는 한, 누구도 당신들의 신념을 위한 갑주가 되어주진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노동당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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