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학살, 박정희와 전두환
    [파독광부 50년사] 3년만에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어머니<검정밥24>
        2013년 09월 03일 03: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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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와 전두환

    1977년 말에 민건회가 민주운동의 세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한민련에 가입할 계획을 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반독재운동을 하던 나는 민건회가 한민련에 가입해서 어떤 사상이나 특정 노선을 따르는 정당적 단체로 화하게 되는 것을 반대했으나 총회의 결의와 달리 상임위원회의 비준동의도 없이 합치고 말았다.

    그것을 힐책하며 한민련 가입을 반대하던 우리 16명에게 민건회의 중앙위원회는 자진사퇴를 요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78년 3월 1일부로 제명처분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는 교회를 또다시 사상전의 소용돌이 속에 넣지 않기 위해서 한민련에서 탈회하고는 재독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약칭: 한민건)를 설립하고 동지들을 모으면서 독립성을 잃지 않고 한민련 그리고 한인 노동연맹과도 제휴하면서 지금까지의 민주운동을 계속했다.

    특별히 독일의 정당 및 종교계와 연합해서 한국정부가 민주주의를 지향하게끔 압력을 가하게 하는데 노력했다.

    FDK 06032004-58

    베를린에서의 전두환 반대 시위 장면

    베를린에서의 전두환 반대 시위 장면

    1979년 10월 27일 우리 집에서 한민건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정오 경에 모이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회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찌된 연유냐고 물으니, 아침 뉴스를 듣지 않았느냐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고 했다. 내가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느냐고 나무라듯 되물으니 모두 오는 중에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몇 백 년을 살 것이라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무죄한 백성을 억누르며 짓밟다가 결국은 부하의 총에 죽은 그가 한스러웠다. 죽을 바에야 천추에 남길 멋진 정치를 하고 죽지, 왜 그 꼴로 죽어야 했나?

    나는 목적이 얼마나 성스럽고 위대한 것일지라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절대로 폭력과 강제를 수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도 아무리 그가 독재의 원흉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법과 국민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죽음을 한탄했다.

    또한 그의 죽음은 그를 둘러싼 잔재 군부에서 정권을 잡아챌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국민을 더 오래 민주화의 싸움 속에서 시달리게 할 우려성도 동반할 수 있다는 어떤 말할 수 없는 불안감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런 뜻에서 박정희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도 어쩌면 불행의 날이 될 수 있는 이 날이었지만, 우연히 모이기로 작정한 날이 이토록 의미가 있고 민주화의 기대에 대한 기쁨의 날이 될 줄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 우리는 다 함께 만세를 부르고는 그 날을 흥겹게 지나면서 이제는 내나라 내 땅에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

    기대와 현실은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마음속으로 우려했던 것과 같이, 기대했던 민주주의는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로 다시 좌절되었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야밤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시키고 국민의 지도자인 재야인물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 등을 잡아가서 아무도 그들의 신상을 찾을 수 없게 가두어두고 18일부터 광주에서 내 민족 내 백성을 참살하는 만행을 일으켰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도대체 전두환이라는 자가 누구이기에 내 국토를 지키고 내 민족을 수호해야할 내 나라의 군대로 내 백성을 죽이게 하는가? 내 조국의 앞날이 참담하기만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상적인 구별 없이 모두가 이러한 만행에 항거하기로 결정하고 데모에 참가해서 세계만방에 전두환의 악행을 고소하고, 우방이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협조를 중지함으로써 군부독재자들로 하여금 민주화의 길로 걷게 하라고 호소하기로 했다.

    우리는 8월 15일 쾰른에서 데모를 크게 벌였다. 이 데모장에서 나는 독일 수상 슈미트 씨에게 한국정부의 만행을 저지할 것과 경제 원조를 중단함으로써 한국정부가 독재를 그치고 민주화의 길로 돌리도록 우방과 함께 연대적인 압력을 가하라는 공개서한을 읽고 그 편지를 슈미트 수상에게 보냈다.

    어머님의 귀국…그래도 내 고향산천이 최고

    어머님께서 하루는 귀국하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 오신지 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시니 나는 놀랬다. 어머님이 오실 때에는 손자도 안아보고 키워보고 싶으셨다. 내가 깜둥이나 베트남 아이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하니까 펄쩍 뛰면서 반대하시고 나더러 자기가 키울테니 아들을 낳으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정관수술을 했다는 사실은 말씀드리지 않았다.

    코리나는 어머님이 오실 때 벌써 열 살이 다 되었으니 말도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정이 들 수가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잘 해드린다고 애를 썼지만 아기자기한 말과 정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78년 오월부터 이사직에 승급되어 자재(資材) 운송관리를 담당하고 있었음으로 하루에 열두 시간 근무하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나가서 오후 두 시에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 누웠다가 또 회사에 나갔다.

    저녁에 집에 오면 어머님도 내 입을 쳐다보시고 아내도 내 입을 쳐다보았다. 서로가 나와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거기에다 또 내가 거의 15년 동안 어른 없이 살면서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 나갔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참견을 하시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의 의견을 공박했다. 어머님께는 아들의 곁이 보금자리가 아닌 시집살이의 생활이었다.

    매일 산책을 하시고 집에 계실 때는 자기 방에서 기도와 성서 읽기로 시간을 보내시니 아기자기한 고향생각이 자꾸만 생기게 되었고 또 조카딸의 아이들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큰집과 우리 집에 아들이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내가 양 집 아들 노릇을 했음으로 우리는 사촌이라기보다는 친형제와 같았고 사촌누이들도 엄마라고 불렀지 숙모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카딸의 아이들은 어머님의 친손자와 마찬가지여서 어머님의 등에 업혀서 컸다. 그 아이들을 그리워하셨고 특별히 막내아이 재범이를 못 잊어하셨다. 재범이는 어머님이 키우시고 안고 주무시던 손자니 여기의 코리나가 그 정을 대신할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교회생활이었다. 새벽기도를 여기에서 할 수 없다고 항상 아쉬워하셨다. 매일 새벽마다 집에서 기도를 하시지만 집에서 하는 기도와 새벽제단에서 하는 기도는 다르다고 하셨다. 또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하셨다. 어머님의 생활은 주야로 기도의 생활이었지만 내 고향의 내 교회에서 올리는 기도를 그리워하고 계셨다. 권사로 교회 봉사에 바쁜 날들을 보내시다가 여기에서는 할 일이 없으시니까 하루하루를 보내시기가 지루하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아들 곁에서 계시지 못하고 다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와 눈물로 이 결정에 대한 생각을 하셨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어머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고목(古木)은 옮겨 심지 말라’ 라는 옛말이 적중함을 느끼면서 어머님이 다시 귀국하셔도 또 오시고 싶으면 독일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님의 의견에 수긍하면서 사촌 여동생 수연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수연에게 엄마가 다시 네게로 가겠다고 하시니 네 생각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동생은 엄마를 제게로 보내면 제가 모시겠다고 했다.

    어머님은 이제 마음속에 벌써 아들과 이별을 하신 듯 말씀하셨다.

    “이제는 내가 네 사는 것을 보았으니 내가 가더라도 네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네 곁을 떠날 수 있다. 네가 비록 한국에 못 오더라도 나만 건강하면 네 곁에 오고 싶으면 또 오면 되니까, 내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네 몸만 조심해라.”

    그러나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그 가슴속은 얼마나 아팠을까?

    어릴 때 어머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애먹이던 기억들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여섯 살 때라고 기억이 나는데 하루는 우리 집 머슴 천덕이가 빠지라고 바로 대문 앞에 함정을 팠다. 어른의 발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아랫도리까지 깊게 파고는 나뭇가지로 이우고 흙으로 덮었다. 빠지라는 머슴은 빠지지 않고 시장에서 참기름을 빼어 병에 넣어 들고 오시던 어머님이 빠져 넘어지셨다. 손에 들었던 병 하나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참기름이 땅을 적시고 있었다. 비명소리에 놀란 아버님이 방에서 뛰어나오셨다.

    “정의야 회초리 가지고 오너라!”

    명령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는 나는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다. 이미 말 그대로 엎질러진 물이었고 깨어진 항아리였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나는 목침 위에 올라섰고, 매를 맞은 후 아버님께 큰절을 드리고 나오는 내 종아리는 뱀이 휘감은 것 같은 흔적을 나타내었다.

    어머님에게는 구멍에 빠져서 넘어질 때 다치신 무릎도 아팠고, 값비싼 참기름 한 되가 땅바닥에 쏟아져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서 아팠고 또 매를 맞는 내가 더 아팠다.

    고등학교 일학년 겨울이었다. 아마 처용가(處容歌)를 읽은 후였던 것 같다. 어머님을 놀라게 해 드린다고 목욕탕에 가라고 돈을 주시면 가지 않고 까먹으면서 발을 씻지 않았다. 양말을 신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음으로 한 두 달쯤 씻지 않고 흙먼지로 자주 문질렀더니 때가 앉아서 까맣게 되었다. 나는 어머님께 내 발이 갑자기 깜둥이 발이 되었다고 할 예정이었다. 내일 모레 하면서 아버님이 계시지 않을 때 어머님께 보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학교에서는 대청소 주간이 되었다. 교실과 복도의 마루 바닥을 새끼와 차돌로 닦아 광을 내고 반들반들하게 만들었다. 복도에는 초를 문질러 쉬는 시간에는 미끄럼질을 했다. 한 반 아이들과 미끄럼질을 하면서 노는데, 한 아이가 나를 붙잡고 미끄럼질을 하며 내 발을 잡고 끌며 갔다.

    나는 끌려가면서 발버둥을 치니까 그가 잡고 있던 내 양말이 벗겨졌다. 그가 시커먼 내 발을 보고는 놀라서 아무 말도 않고 양말을 도로 돌려주었다. 나는 양말을 받아 신은 후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고, 내 비밀(?)을 본 그도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후에도 그에게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았고, 그도 그 일에 관하여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어찌도 부끄러운지 집에 오자말자 식모에게 발을 씻을 물을 끓이라고 했다. 어머님이 내일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욕탕에 둘러서 씻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이때다 생각하고 갑자기 발이 검어져서 부끄러워 목욕탕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님은 놀라시며 발을 보자고 하셨다. 내가 양말을 벗고 발을 보여드리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놀라셨다. 그저 놀랐다고 하기보다 기절을 하다시피 놀라셨다. 내 발을 두 손으로 부둥켜 잡고는 이리저리 살피며 검사하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찰싹 때리셨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어머님으로부터 맞았다. 내가 발을 씻지 않아 때가 앉았다고 하시면서 고등학생이 어떻게 그토록 발을 씻지 않았느냐고 하셨다.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아버님께 일러드리겠다고 하셨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호랑이 잡으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린 셈이었다. 나는 어머님 놀라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했으나, 어머님은 어쩌면 사람이, 그것도 고등학생이,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하시며 용서하지 않겠다고 야단을 치셨다.

    나는 어머님 앞에서 꿇어 엎드려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어머님은 만약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았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고 하시고는 식모더러 물을 데우라하시고 나를 용서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숨겼다.

    십이월 초에 어머님은 귀국하셨다. 공항에서 출국 검열소를 통과하시면서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우시는 늙은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유리 칸막이 뒤쪽으로 사라지는 어머님의 모습을 먼 눈길로 바래다 드리면서 ‘어머님 부디 부디 건강하게 사십시오’ 기원하면서 속에서 뭉클거리며 올라오는 울음을 억제하며 돌아서야 했다.

    어머님께서 귀국하신 며칠 후, 나는 어머님이 두고 가신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 일기장의 기록에서 나는 어머님께서 여기에 사시는 동안 얼마나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리셨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님께는 아들의 곁에 산다는 것이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푸른 하늘과 끼리끼리 앉아서 재잘거리던 벗을 그리워하는 새장 속에 갇혀 사는 새와 같았다.

    … 형님, 우리가 늘그막에 고향 땅을 떠나 일생을 마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고향 땅 떠나더라도 자식 곁에 있으면 거기가 지상천국인줄 알았지만, 사람은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동생도 고국에 있을 때는 오매불망 보고 싶은 아들만 보면 평생 한이 없을 줄 알았더니, 태산 같은 고개를 넘어서 평지에 앉아 쳐다보니 지나온 산보다 더 높은 산이 앞에 가리고 있군요. 고국에 있을 때는 아들 한 사람만 보고 싶었는데 외국에 오고 보니 늙도록 함께 살던 형제와 질아 질녀, 일가친척, 정든 성도들 수백 명이 보고 싶습니다. …

    어머님이 일기장에 큰 이모님께 쓰신 글을 읽으며 나는 어머님의 외로움을 덜어드리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면서 하느님께서 어머님과 함께 계셔서 어머님을 위로하시기를 마음속으로 울면서 빌었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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