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진보 ‘악마화’에 맞서야
시대착오적인 진보도 결별해야
    2013년 09월 02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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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512모임 발언과 녹취록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장되고 있다. 국정원과 통합진보당의 대립, 진보진영 내 소위 NL그룹의 문제, 진보정당의 재정립 과제, 이석기 사태에 대한 편향적 태도 등에 대해 이창언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이 기고 글을 보내왔다. 진보세력이 반드시 짚고, 극복해야 할 지점에 대한 내용들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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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부정적인 ‘진보세력 낙인찍기’ 효력 발휘

국정원이 작성한 문건(이하 녹취록)이 공개된 이후 모든 정치적 쟁점은 ‘이석기 블랙홀(종북논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국정원은 자체 수사와 내부자 제보를 통해 음성파일(MP3), 음성·영상파일(MP4)을 확보했고 그 분량도 3~5천 장 분량이라는 보도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벼랑 끝으로 몰 물증을 어느 정도는 확보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정원과 보수언론의 파상공세에 통합진보당은 날조와 왜곡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녹취록에 적시된 구체적 발언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명하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에게 씌운 혐의(내란예비음모), 발표 시점, 대응 방식이 대단히 정치적이고 폭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당한 효과를 얻고 있다.

내란예비음모혐의 적용에 대한 대립된 법리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이 공개된 후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와 정기국회 핵심 쟁점이 희석되고 있다. 이 사건이 장기화될 경우 내년 지자체 선거뿐 아니라 진보정당의 존립에도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방은 일견 국정원과 통합진보당의 조직의 명운을 건 적대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대결의 양상은 과거의 부정적 기억을 호명하는 가운데 현재의 불의를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과거 군부권위주의 시대의 중정과 안기부의 공작정치를, 국정원은 1980년 중후반 이후 주사파 지하조직의 종북성을 주요 선전선동의 타켓으로 설정하고 있다.

양자 간의 담론경쟁은 박정희(국가주의), 김일성(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유산을 각각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동시에 타자의 실패를 통해 대중을 전유하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현재는 물질, 기술적인 토대를 굳건히 갖춘 국정원이 상대적 우위에 놓여있다.

녹취록은 최소한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1980년대식 폐쇄적 집단주의, 낡은 정세관과 투쟁관을 가진 몽상가 집단, 북을 추종하는 잠재적 테러리스트 세력으로 각인시키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정원은 내란예비음모죄 입증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이념적 불러오기, 낙인찍기, 분리에는 일정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 담론투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유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보여준 경기동부연합의 운동레퍼토리, 패턴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 학습효과도 일조하고 있다. 두 차례의 분당과정이 녹취록과 접합되면서 부정적 위협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1차 분당은 종북(일심회 사건, 북핵문제, 3대 세습, 북한 인권문제 등에 대한 이들의 태도)․ 패권주의, 2차 분당은 부정선거와 폭력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공세는 이러한 누적된 조건 즉,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사태의 부정적 자장(磁場)위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민의 충분한 정치적 정당성을 동반하지 않은 패권적-분열적 경험과 정치적 룰에 조응하지 못한 후진적 정치집단의 이미지가 통합진보당의 운신의 폭을 더욱 협애화시키고 있다. 녹취록은 1980년대 중반 이래 지속된 민족해방파의 변화되지 않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정적 효과는 더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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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과잉 민족주의-국가주의적 경향의 본질적 한계

국정원이 유출한 녹취록은 우리사회 변혁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나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해방론자(NL)들의 인식하는 특정한 프레임 즉, 80년이라는 인식의 자궁에 머물러 있는 낡은 정세인식, 애국과 매국(반미와 친미, 통일과 분단)이라는 이분법, 평화개념에 관한 몰이해로 가득하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대한 편향적 인식과 침묵, 전쟁과 예비검속에 민감한 반응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식민의 기억, 한국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며 확산된 반미주의와 결합하여 강화된, NL세력의 독특한 정서를 보여준다.

이는 비단 녹취록뿐만 아니라 다양한 NL 문건을 통해서도 이는 확인될 수 있다. 주변부민족해방론(NL론)의 심연에는 ‘제국주의는 집합적 유죄이고 악의 표상(친일ㆍ친미=비정상국가)’, ‘민중(민족)은 집합적 무죄이며 선의 표상(반일ㆍ반미=정상국가)’이라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기초한 ‘기억과 전선(戰線)의 정치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짙게 깔려 있다.

이러한 관념으로 인해 국가의 개혁을 넘어선 새로운 국가의 건설(강성대국)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완성된 민족의 세속화된 낙원을 향한 저항과 순교는 정당화되고 집단주의에 반하는 개인은 부정되는 것이 어쩌면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사회운동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NL론이 주변부라는 지정학적 요인, 분단체제가 갖는 구조적 특성과 내면화된 국가주의-민족주의적 내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론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NL론은 과거 군부 권위주의 시절 민족-국가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통해 근대화 코드를 공유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항한 사회적 동원력을 확보했다. 일종의 긍정적 위협효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발전론-근대화론을 보편화한 과잉 국가-민족주의로 인해 포스트 민주화시대 권력 담론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내면성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핵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관점과 대안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게 한다. 녹취록 외에도 NL론 일각의 언설과 성명서를 보면 핵무기를 권력, 안전보장의 기제로서 인식은 확인된다.

이들은 “북한의 핵보유는 ‘정의의 전쟁’(war of justice )을 위한 수단이거나, 최소한 적극 지지하긴 어렵더라도 미국의 핵위협에 대비해 일차적 비판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핵보유를 반대하면서 북한의 핵보유, 핵실험에 대해서만은 방어적(핵 자위론), 변호론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제국을 비판하며 제국을 욕망하는 것이며 평화에 대한 평화주의적 관점에 정면 어긋난다.

물론, 평화와 핵문제와 관련한 인식은 NL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유력 보수정당 인사와 우익 또한 자위적 핵무장론을 거론하고 있다. 「전쟁은 필요악」,「강한 국가」,「군사주의」를 용인한다는 점에서 모두 “평화의 중심문제”에 대한 기초적 인식의 부재와 평화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줄 뿐이다.

한편,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핵무장을 반대하지만 이들은 국익의 관점에서 ‘핵 개발이 우리에게 손해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남한이 핵무장을 한다면 미국 주도로 대북 제재가 이뤄지듯이, 우리도 같은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패권국가의 핵 문제를 비판하지 않으며, 핵의 사용을 금지 및 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패권적, 경쟁적 사고와 파괴적인 행동에 저항하지 않는다.

 정권과 국정원, 급진세력을 악마화하려는 시도 계속할 것

국정원은 현재 여론전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있다. 국정원은 현재의 국면을 통해 국정원 개혁을 저지하는 한편, 진보좌파진영의 주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내란예비음모죄는 사실상 적용이 어렵겠지만 문제는 법리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적인 파장과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먼저, 개혁적 국민정치와 계급정치의 분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진보-좌파정치세력의 정치적 실천이 국민정치의 개혁적 발전과 맺어왔던 선순환 구조의 균열을 의미한다. 국정원이 꾀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것은 기존의 제도정치의 이념적 지형을 협애화시키고 노동배제성과 민중배제성을 확대하는데 있다.

이창언 캐리커쳐

이창언 교수의 캐리커쳐

그래서 이 사건의 파장은 통합진보당이나 이석기 그룹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스스로 수용한 정책에 의해 수렴되지 않는 급진적 요구에 대해서는 법치라는 이름으로 권위주의적 응전을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온건한 요구는 선택적으로 수용하되, 보다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요구는 악마화할 것이다. 진보좌파는 누구나 이들의 탄압과 침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혁신의 의지 천명과 정면 돌파라는 각오로 현 정세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녹취록(발언)에 관한 진위여부는 물론 이에 대한 적극적인 소명과 담론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날조, 용공조작이라는 말로는 시민을 설득시킬 수 없다. 주체적인 응전의 자세로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맞선 해명과 해석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둘째, 국정원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정권-국정원의 위기를 반영한다. 따라서 연합과 연대전선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전선을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연대투쟁은 녹록치 않다. 현재 통합진보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민주당은 물론이거니와 저항운동 진영에서조차도 따뜻하지 않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진보-개혁진영의 반응은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통합진보당은 이를 국정원의 공세라고 치부하고 탄압에 공동대응하지 않는 정파들을 탓하기에 앞서 지난 시기 자신들의 보여준 오류를 돌아봐야 한다. 진보좌파진영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대중의 정치적 주체성의 변화와 기성 제도정치에 대한 불신의 변화에 조응하여, 스스로 새로운 대안적 정치중심으로 혁신하려는 노력이 지체됨으로써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우경적인 통합추진과 패권적 당 운영, 편향적 북한인식은 진보좌파정치세력의 연대와 단결에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성찰과 혁신의 계기가 되어야한다.

지난 시기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보여준 자주계열의 헌신성과 성실함은 높이 평가하지만 혁신도 필요하다. 보다 자주적인 입장과 태도로 북을 대하는 한편, 진보정치가 위기를 맞는 조건에서 이를 기회로 연대의 소재를 보다 좌측으로 이동시켜 나가야 한다.

동시에 합법정당의 성격, 시대정신에 맞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언행도 필요하다. 만약 합법정당으로서 처신의 문제(북과의 부적절한 연계)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단호하게 결별하겠다는 입장도 견지해야 한다. 이는 정치사상, 결사의 자유와는 무관하게 통합진보당의 정당성뿐 아니라 한국 진보진영의 독자적 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대단히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성공회대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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