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싫었다"
[아빠의 현대사 42-1] 2000년 롯데호텔과 건강보험, 경찰에 의한 테러의 현장
    2012년 06월 11일 01: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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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럼 밤을 기다려라/ 한 밤에/ 숲 속에 들어가 눈을 감아보렴/ 벌레 소리 들리는 한 너는 피조물이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 아니냐/ 그럼 된 것이다 내 사랑아..” (이승하 시 [딸에게] 중에서)

롯데호텔 폭력경찰 난입

새벽부터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예감이 맞았다. 급하게 옷을 걸치고 명동으로 향했다.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얼마 전 너와 그 곳을 지나가면서 말했는 데 기억할까? 서울의 한 복판이고 최대의 번화가다. 바로 전날 자정너머까지 경찰 투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설마하고 집으로 돌아온 게 잘못이었다.

롯데호텔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한 것은 99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90%가 넘는 찬성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의 당선방해 공작으로 두달여동안 홍역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만큼 집요한 탄압을 받고 탄생될 만큼 정권과 자본의 압박이 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라고 했지만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사처럼 “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에 너와 나는 간 데 없고, 저들의 계획 속에 우리들의 미래”는 없었다.

경찰이 계엄군으로 장악한 롯데호텔

헐레벌떡 도착한 롯데호텔 앞은 이미 경찰들로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롯데 백화점 옥상으로 해서 롯데호텔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36층과 37층으로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고 있었다. 2층에 있던 조합원들이 호텔 맨 위 층으로 신속하게 이동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일하는 김진억이 함께 있었으니 아마도 경찰투입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 둔 모양이었다.

섬광탄이 터지고, 연막탄도 터트렸는지 연기도 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인 우리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서울본부에서 일하던 박상윤이라는 후배가 도착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구호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러자마자 바로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바로 모두 연행되어 경찰버스인 닭장차에 실려졌다. 버스 안에서도 저항을 하자 이곳저곳에서 폭력이 시작되었다. 그 때였다. 당시 금속연맹의 조직실장이었던 한석호가 “그만들 안해 이 개xx들아!” 하면서 머리로 창문을 박았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경찰버스의 창문은 잘 안깨진다. 그런데 창문이 박살이 났다. 나중에 머리를 보니 아무렇지도 않을 걸 보고 놀란 기억도 난다. 그런 덕분인지 더 이상 폭력은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양천경찰서인가로 끌려갔다가 바로 풀려났다. 풀려나자마자 바로 롯데호텔로 다시 가서 이미 조합원들이 모두 강제로 연행된 자리에서 항의집회를 가졌다. 6월 29일의 일이다. 6월 29일 알지? 노태우가 기만적인 6․29 선언을 한 날이다. 우리는 ‘육이구’ 대신 ‘속이구’라고 불렀었다.

경찰은 이날 오전 4시20분께 1천1백여명의 노조원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롯데호텔 2층 크리스탈 볼룸과 파업지도부가 농성중인 37층 연회장에 경찰 34개 중대 3천여명을 투입,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7시가 넘어서야 작전이 끝났다. 이후 밝혀졌지만 당시 투입된 경찰의 대테러 진압특수부대인 솔개부대원들이 호텔 안에 있던 양주를 마시고 작전을 했던 것이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들을 테러범으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조합원의 글을 읽으면 더 생생하겠다.

“고개 숙이고 있던 우리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모멸감, 치욕감이란 그 상황에 없었던 사람은 절대 느끼지 못했으리라. 이들이 진정 우리와 같은 국민인가? 이들에게 누가 민주경찰이며 민중의 지팡이라고 했던가? 치욕과 혼돈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TV에서나 봤던 광주사태가 떠올랐다. 지금은 2000년이지만 그날의 상황은 80년대 그대로였다. 우리는 진짜 방어할 만한 몽둥이도 없었고 모두들 얇은 옷을 입고 있었을 뿐 이었다. 순간 이 상황이 싫은 것보다, 롯데가 싫은 것보다, 우리나라가 싫었다. 그리고 5·18 광주사태를 거친 김대중 대통령이, 공권력에 맞아 아직도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김대중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정말 알 수 없었고 분하기만 했다…. 너무 맞아 머리가 찢어져 피가 줄줄 나는 사람, 최루탄 파편에 다리를 찔려 피가 흐르는 사람, 등허리를 쇠파이프로 맞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사람, 장애인 등록증을 보이며 때리지 말라고 애원했음에도 무자비하게 맞아 호흡조차 곤란해 하던 아저씨, 머리에 혹이 주먹만 하게 난 아저씨…. 너무너무 무서운 광경이었고 붉은 피들이 얼굴에서 다리에서 팔에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석처럼 가만히 서서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그냥 응시하고 있었다.”

한 때 전투경찰이었다는 어떤 사람은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끝까지 저항하는 노동자에게 경찰의 발길질과 대나무로 내리찍는 모습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며칠 전 의료계 폐업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소위 지도층 엘리트 폐업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최대한 포용하고 힘없고 빽없는 노동자는 하루아침에 최루탄과 물 대포에 무너진다.”

포로들처럼 오리걸음을 시키는 경찰들

특히 여성조합원이 다수인 롯데호텔의 경우 임신 중인 여성과 장애인카드를 보여 준 조합원에게까지 무차별적인 연행과 곤봉 및 방패로 가격하여 70여명이나 부상을 당해서 “제2의 광주사태”라고 부를 정도였다. 1,200여명의 조합원들이 오리걸음을 하면서 연행되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건강보험 공단에 대한 경찰 투입

정신이 하나도 없이 하루가 흘렀다. 민주노총 조직쟁의실장이라는 자리는 조직은 물론 투쟁까지 책임져야 하는 자리였다. 집회와 대책회의 등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데 이번에는 마포에 있는 건강보험 공단에 다시 경찰이 투입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말 피곤했다. 바로 누우면 잠이 들 정도로 기진맥진했고, 설마 연이어 경찰을 투입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마포에 도착하자 이미 경찰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고가 사다리차를 동원하여 15층 노조사무실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다시 또 조합원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조합원 1,606명이 연행되었다. 7월 1일의 새벽 1시 30분경의 일이다. “장관 출신이 어떻게 일개 노조위원장을 만나느냐. 내가 이래봬도 국회의원에다 청와대 특보를 지낸 몸이야.”라던 박태영이라는 사람이 이사장으로 와서 노조 요구에 콧방귀를 뀌면서 노사갈등이 심해진 결과였다.

뒷날의 일이지만 그는 2년 뒤 전라남도 도지사로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건강보험 공단의 이사장으로 있을 때 벌어진 부하들의 비리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가 진행 중이던 2004년 4월 반포대교에서 투신자살했다. 죽는 바람에 진실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가 없었으면 자살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이 한 때 민주화투사였고, 독재정권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민주노총 신문은 “김대중 정권, 노동자에 전쟁선포”라고 머리기사를 뽑았다. 정말 그랬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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