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매불망 그리던 어머니 상봉
    [파독광부 50년사] 15년만에 이국 땅에 만나는 어머니<검정밥-23>
        2013년 08월 26일 03: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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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내가 상하로부터 잘 한다는 인정을 받고 내가 맡은 직무를 상관이 만족할 정도로 처리해내어도 내가 일하는 곳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는 한국이 아니고 3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 포로들을 노예처럼 지하에 넣어 혹사하던 독일인이 경영하는 독일광산이다.

    앞에서는 고분고분하면서도 돌아서면 저들끼리의 눈짓과 비방이 있다는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지 그 일 후에 어느 누구라도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근거가 없도록 철저히 그리고 정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잘 하는 일은 응당 그들이 나로부터 바라는 일이고 내가 잘못 하는 일은 그들의 잘못보다 배 이상의 비중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직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보다 강해졌고 독일인 하급자를 다루는 것도 그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엄격했지만 인간적인 면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난 여름부터 항장이 되어 모든 사원과 노동자의 신상 문제에도 나는 그들 개개인의 가정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파악함으로써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작업 중에도 한 사람씩 개인 면담을 하며 문제점이 있을 때는 함께 해결했다. 얼마 있으니 회사에서 노동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항장으로 인정을 받았다.

    직장에서 자리가 잡히고 상하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에 나는 그해 휴가를 내어 어머님을 이곳으로 모시는 일과 양자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다.

    입양문제는 내가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 국적을 버리고 독일 국적을 취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아들 없이 살기로 결정하고 어머님을 모셔 오기로 했다.

    1977년 11월 어머님께서 독일에 오시는 날.

    15년 만에 뵈옵게 되는 어머님이 어떻게 생겼을까?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입국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문 앞에서 나는 가슴을 조이면서 언제 한국 할머니가 나오는지,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

    이철수 선생의 목판화 '어머니'

    이철수 선생의 목판화 ‘어머니’

    어머님은 165cm로 한국 여인 중에 아주 크신 편이었다. 옛날에 학부형회가 있으면 어머님은 항상 맨 뒤에서 다른 어머니들의 어깨 위로 넘어 보셨다. 그래서 나는 키 큰 할머니만 찾고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꼬부랑 할머니가 짐을 실은 손수레를 밀고 나왔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작았고 얼굴 모습도 너무너무 늙으셨다.

    오매불망 그리던 내 어머님. 나는 “엄마” 하면서 끌어안았다.

    어머님은 내 모습이 보고 싶어서 끌어안은 내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셨다.

    “오냐 잘 있었느냐?”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놓지 않으시려는 듯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나와 함께 걸음을 옮기시면서 자꾸만 나를 쳐다보시면서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으셨다. 어머님은 주야로 울면서 기도하시느라고 눈이 쇠약해서 그런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계셨다.

    나는 꿈만 같았다. 젊은 자식이 귀향해서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고 나이 많은 늙은이를 수만 리 머나먼 타향 땅에 자식을 따라와서 살게 만드는 내 마음이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야 어머님을 내 곁에 모실 수 있다는 안도감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어머님을 상봉하는 첫 시간을 나 혼자 가지고 싶어서 아내와 딸을 집에 두고 비행장으로 갔는데 어머님은 며느리와 손녀가 함께 마중을 나오지 않아서 좀 섭섭해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님께 엄마와의 상봉을 혼자 가지고 싶은 욕심에서 그렇게 했으니 내 죄라고 용서를 빌었다.

    어머님께서 독일에서 살기 시작하실 때 어머님의 연세는 일흔이셨다. 아내는 모든 정성을 다해서 어머님을 봉양했다. 아침마다 시어머님의 머리를 빗겨드리고 몸치장을 해드렸다.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 내가 저녁에 오면 아내가 어머님이 하신 말씀을 내게 전해주는 것을 들으면 바르게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어머님은 그 동안에 지내셨던 이야기를 나에게 틈틈이 들려주셨다. 오시기 전에 아버님의 묘를 파서 화장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의아한 모습을 하니 그 이유를 말씀하셨다.

    순근 형이 내가 그에게 넘겨준 토지를 팔았다고 하셨다. 형은 나에게 약속한 것도 어기고 아버님 묏터까지 팔아 넘겼다. 새 주인이 거기에 학교를 짓는다고 묘를 옮기라는 연락을 받고는 아들에게 가면 묘를 조카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화장을 했다고 하셨다.

    순근 형이 저지른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오시기 전에 집과 토지를 팔아서 친정조카와 시가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했다.

    밭과 집을 팔았다는 사실을 안 형은 저 늙은이가 돈을 달러로 바꿔서 독일로 가져갈 것이라고 판단하고, 밤중에 복면을 하고 어머님 방을 침입하여 어머님을 칼로 위협하면서 농을 뒤졌으나 돈은 찾지 못하고 금패물을 가지고 갔다고 했다.

    밤새도록 묶여서 고생하다가 그 이튿날 뒷집 아저씨가 오셔서 묶인 어머님을 발견했다고 하셨다. 강도가 비록 말을 하지 않았어도, 어머님은 그의 거동과 구두를 보고는 누군지 알아차렸으나 혹시 그가 누군지 탄로되면 악한 짓을 할까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하셨다.

    형은 어머님께서 독일로 가시면 동생도 거기에서 결혼하고 사니까 남은 재산이 자기에게 돌아 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가 자기에게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 짓을 했다.

    나는 형의 못된 처사가 괘씸했으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순근 형은 세 살에 젖이 떨어지자 제 엄마의 품에서 쫓겨나서 우리 집에 양자로 넘겨졌다. 아무리 친척이라 하더라도 세 살짜리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 외에는 다 낯선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새 엄마가 아무리 사랑을 준다고 하더라도 때리는 내 엄마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로부터 떨어져서 사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차츰 친 엄마를 잊어갈 때에 새 엄마가 자기의 친아들을 낳았다. 그는 또 한번 뒤로 밀려나야 했다. 아버님이 야단을 치시면 자기의 친자식이 아니니까 나무란다고 여겼을 것이고, 더군다나 엄하신 아버님께서 매를 드실 때에는 자기를 내쫓으려고 그렇게 매질을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여섯 살, 형이 열세 살 되었을 때 그는 아버님의 나무람을 견디지 못해 그의 친부모에게로 돌아갔다. 친부모의 집이었지만 그는 그 집 아들이 아니었다. 그의 위에는 그보다 한 살 위인 친형이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가, 짐작이 갔다. 죤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에덴의 동쪽” 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둘째 아들 갈렙이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던 것처럼 순근 형도 그의 친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순근 형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은 깡패생활과 파면으로 채워졌다. 특이한 것은 그는 그의 모든 행동에 그의 형 되는 동근 형을 가담시키는 것이었다. 동근 형은 형이면서도 동생인 순근 형의 부하가 되었다. 순근 형은 그의 친부모님 집에서 실권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싸움을 벌였고, 항상 밀려나는 자리에서 밀어내는 자리에 서려고 했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이익 여부를 따졌고 손해 볼 일은 다른 사람을 앞세웠다. 그래서 그는 동네에서 조조(曹操)라고 불렸다. 술만 취하면 우리 집 뒤에 있는 술집에 와서 아버님을 원망하면서 술을 계속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버님께 살살거렸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버님이 그를 돌봐주시고 다시 일자리를 구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순근 형이 스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여섯 번째로 일자리를 잃었고, 마지막으로 예전에 중공업이라고 불렸던 조선공사에 아버님의 주선으로 다시 취직이 되었다. 동근 형이 그에게 볶이다가 못 당해서 집을 나갔다.

    순근 형은 집을 차지한 후에 결혼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의 친부모 집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위로는 부모님, 아래로는 넷 여동생과 한 남동생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그의 명령을 거역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변호사가 출간하던 월간잡지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던 그의 사촌형인 동출 형님이 군복무 기피자라는 이유로 편집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형님이 순근 형의 집에 며칠을 묵었다. 열흘이 못되어 그 형은 쫓겨 나갔고, 이리저리 친척집을 찾아다니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연을 들으신 아버님이 순근 형에게 책임을 물었을 때, “내가 쫓겨나갈 때 날 불쌍하다고 여긴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그의 성격은 어릴 때의 삶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나는 그때는 순근 형이 괘씸했지만 이제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님께 그가 복면을 하고 들어와서도 인명을 해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고 아버님을 봉분에 모시거나 화장을 했거나 시체를 두고 불효니 아니니, 책임추궁을 할 것도 못된다고 하면서 어머님께서 마음을 푸시기를 원했다. 죽은 후에 꼭 묘 자리가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비록 아버님의 유골이지만 화장한 것이 잘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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