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주의자'는 망각을 먹고 사는가?
    [비판과 비평] 진보적 자유주의 비판 ①
        2012년 06월 11일 03: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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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최태욱 이근식 고세훈 박동천 지음. 폴리테이아 출판)라는 책에 대한 비평을 통해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재를 3회에 걸쳐 할 예정이다. 그 중 첫 회 글이다(편집자)

    자유주의, 진보의 새로운 얼굴?

    올해 초 최장집은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진보진영은 낡은 운동권 문화와 급진주의를 청산하고 자유주의의 긍정적 유산을 받아 안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운동 또한 낡은 운동권정당과 단절하고 민주당과 정책 연대를 통해 실현가능한 목표를 성취하라고 충고했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당식 자유주의가 운동권의 민중주의보다 더 가치 있는 진보이념이라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통진당 사태는 이런 류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통진당 사태는 운동권의 낙후한 문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선거 과정에서의 부실, 중앙위원회에서의 폭력사태, 명백한 오류에 대한 책임 회피와 물타기 등 통진당 구당권파는 권력을 쥔 집단이 보일 수 있는 모든 추한 모습을 극적으로 전시했다. 당권파들은 그들만의 ‘정의와 정당성’을 통해 민주적 절차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최장집은 통진당 사태 이후, 운동권은 근대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기본적 소양도 지니지 못한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운동권들은 철지난 이념에 물들어 추상적인 구호나 외치며 비정규직의 고통은 외면하는 폐쇄적 엘리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석기와 경기동부처럼 밀실에서 대중정당을 조종한다는 관행이 운동권식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이 모습이다.

    최장집의 주장은 단지 학계의 논의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통진당 내부에서도 진보의 이념을 전환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유시민, 심상정 등이 민주당과 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 역시 진보의 자유주의화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당과 연정함으로써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구체적인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진보정당 시즌 2’를 외치며 통진당에 입당한 정태인 역시 자유주의를 통해 진보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케인즈나 롤즈와 같은 20세기의 자유주의만으로도 진보의 의제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노동자계급 중심성이라는 테제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통진당의 혁신 노력은 ‘진보의 자유주의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쟁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주장은 진보 내부의 이념적 분화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진보라는 모호한 단어로 포괄되어 오던 정치적 흐름이 이제 보다 선명한 자기언어를 갖고 논쟁의 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진보진영 내부에서 억압되어 왔던 자유주의적 흐름이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발언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11월 발간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이하 [자유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이 책은 한국에서 진보의 담론을 독점하고 있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으로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자유주의야말로 인권, 민주주의, 경제정의와 평등의 이념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발간한지 한 달 만에 이 책의 재판이 나온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진보’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높다는 증표일 것이다.

    필자는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자유주의가 급진주의의 새로운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의 그림

    이념적인 것이든, 구체적 현실이든 자유주의의 한계는 고유한 것이다. 필자는 몇 가지 지점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우선 이 글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의 공통점은 정치적 자유주의야말로 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최장집에 따르면, 고전적 자유주의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으며,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개인은 공동체(국가)의 구성과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권적 주체라고 주장한다.(75쪽)

    이근식 또한 근대 자유주의의 핵심이 “본원적 평등”에 있다고 한다. “본원적 평등이란 모든 개인은 인격, 가치, 존엄성, 권리에 있어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미다. “본원적 평등이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며 이로부터 “인간의 자유”가 나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원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다른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48쪽) 평등과 자유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것이다.

    최장집은 근대적 자유주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권을 옹호하고, 국가권력의 과잉을 견제하며, 사회적 갈등을 제도화된 경쟁의 틀 속에서 조정함으로써 근대 사회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생각의 차이, 이념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원성을 원리를 받아들이되, 이로 인한 갈등을 생산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사회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86쪽)

    더불어 최장집은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을 견제하고[78쪽],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옹호함으로써 국가의 과잉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한국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긍정적 유산 즉 인권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저발전의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의 심화가 민주주의 성숙의 조건이라는 것이다.(92쪽)

    근대 자유주의가 탁월한 사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잠재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으며, 누구나 정치적 주체가 됨으로써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개방된 자세, 공론장을 통한 합의의 추구 등 자유주의의 ‘이념형’은 그 자체로 인류가 성취한 탁월한 근대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과연 만민평등을 옹호했는가?

     그러나 자유주의의 이념형이 실재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말 그대로 자유주의의 이념형에 대한 ‘부정’과 ‘기만’의 역사이다.

    [자유주의]가 가장 실망스런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자유주의의 이념형이 곧 자유주의의 실체인 듯 동일시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유주의는 평등을 전제한다.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자율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평등한 개인이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을 의미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백인 남성 부르주아’ 만 인권을 지닌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의 주장과 달리, 근대적 시민혁명은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급진주의 분파들의 참여로 가능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누가 사회적 주체인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진행된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재산을 소유한 부르주아 남성만이 사회적 주체가 된다. 모든 인간이 참정권을 지녀야 한다는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은 배제된다. 자유주의자들은 남성 부르주아만이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연히 참정권의 주체도 백인 남성 부르주아였다. 19세기 초 영국의 참정권은 고작 인구의 4%에게만 부여되었다. 재산세를 일정 부분 이상 내지 않는 인간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19세기 전 역사가 노동자계급 참정권 운동의 역사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현대성과 현대문화]에서 데이비드 헬드가 쓰고 있듯이, 노동자들의 참정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남성 노동자계급의 동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것이다. 이른바 ‘총 한 자루에 투표권 하나’가 제공된 셈이다. 전쟁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여성도, 노예도 시민은 아니었다. 19세기 여성들에게는 사회참여가 철저히 봉쇄되었으며, 상속권을 비롯하여 일체의 사회적 권리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른바 ‘모성의 신화’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인 것이다. 19세기 생물학자들은 여성의 엉덩이가 크고 가슴이 나온 것은 진화가 덜된 증표라고 떠들었다.

    프랑스 혁명당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성 참정권자 올랭프 드 구즈의 유명한 선언,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라고 한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허상을 단적으로 꼬집은 표현이다. 20세기 초반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것은, 노동운동의 급진화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위대한 계몽주의자이자 미국 독립선언을 정초한 토마스 제퍼슨의 사례는 더욱 시사적이다. 그는 미국 헌법을 정초하는 과정에서 노예의 존재가 평등주의의 이상에 맞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노예소유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옹호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노예 소유주들이었으며, 노예와 인간은 전혀 별개의 존재라고 여겼다. 제퍼슨식 독립선언문에서 노예란,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가 의미가 있다면, 인민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인권의식을 표현함으로써 인민들이 스스로도 참정권, 평등권을 주장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평등권을 주장하고선 현실에서는 보수주의와 타협했다. 자유주의의 ‘평등의 이상’을 급진화 시킨 것은, 노동자계급, 여성, 노예와 같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의 타자들이었다. 자유주의는 말만 급진적이었지 보수주의와 한 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자유주의자들이 ‘마지못해’ 평등한 참정권을 수용한 것을 두고 자유주의가 만인평등 사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만저만한 기만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자유주의가 만인평등을 옹호하고, 개인의 인권을 옹호했다고만 함으로써 마치 자유주의가 근대적 평등주의를 실현한 이념인 듯이 쓰고 있지만 근대적 참정권을 직접적으로 실현한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좌파와 결합된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자유주의]의 저자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대적 인권이 백인 부르주아 남성의 몫이었다는 것은 사회과학의 초보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자유주의에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자신들의 ‘자유주의’는 ‘좋은 자유주의’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든 자기 스스로의 역사를 쓰지 못하는 사상은 올바른 지침이 될 수 없다.

    자유주의를 ‘진보의 담론’으로 만든 원인과 배경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대중들은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가?

    이 대답은 20세기의 역사와 직접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19세기 전 역사에 걸쳐 보편적 참정권, 평등권의 추구는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운동 등에서 비롯되었지 자유주의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부르주아적 참정권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19세기말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반까지의 자유주의의 역사는 처참한 패배 그 자체였다. 러시아혁명과 노동자계급이 급진화되자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즘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자유주의는 이미 19세기말 보수적 민족주의와 타협하면서 국가주의에 물들었으며 그 최종적 파산은 파시즘으로 귀결된 것이다.

    중도파 역사학자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은 사실상 19세기 자유주의의 몰락을 다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자유주의는 혁신할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보수주의든 자유주의든 보편적 참정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부로 통합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 노동자,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이 되면 자유민주주의는 아주 자연스러운 조어가 된다.

    이런 변화는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주의의 변화를 촉진한 것은 자유주의 사상 자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내의 노동자운동의 성장이었던 것이다.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썼듯이, 사회주의 혁명의 최대 성과는 서구 복지국가였던 셈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평등주의의 이상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의 이상을 처참하게 왜곡했다. 제3세계에서의 혁명도,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성과였다고 해도, 당과 개인의 독재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3세계 혁명의 적나라한 결과가 북한체제인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제 사회주의는 독재, 억압, 빈곤과 같은 이름이 된 것이다.

    20세기에 펼쳐진 양 체제의 대조적 모습이야말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동일시되는데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사회주의의 이상과 동떨어지게 된 것이 자유주의만이 ‘이상적인 진보의 담론’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자유주의 체제의 실질적 개선을 촉진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억압성이 자유주의의 정당성을 위한 알리바이가 된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아이러니라 하겠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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