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 나타난 카리스마와 그 몰락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과 '우상의 눈물'
        2013년 08월 26일 09:47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보통 세속적인 의미에서,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각별한 능력이나 자질을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물론 ‘카리스마’의 본래 뜻은, 신(神)이 허락한 은사(恩賜)이다. 그것은 본래 기독교적 용어로서 ‘은사’, ‘무상(無償)의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베버(M. Weber)는 이 말의 원뜻을 확대하여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켰는데,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초자연적․초인간적 재능이나 힘을 통해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형성한 것을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명명함으로써 ‘카리스마’를 지배 형식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지는 비범한 자질을 함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문학에서도 비범한 리더십이나 타인들을 장악하는 힘을 가진 이들의 캐릭터가 세속적인 ‘카리스마’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를 우리는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과 전상국 소설 「우상의 눈물」(1980)이라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두 작품에는 모두 폭력으로 아이들을 다스리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정치’라고 한다면, 이 소설들은 모두 영락없는 정치 소설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정치권력의 카리스마가 형성되고 관철되고 몰락하고 재편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그만큼 이 두 작품에서는 모두 기존 권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고 권력을 재편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 카리스마가 형성되고 관철되고 몰락하고 재편되는 과정을 두 작품을 대비해 읽으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는 한병태가 전학 간 학급의 급장이다. 엄석대와 한병태의 만남은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엄석대를 둘러싼 급우들의 태도가 원인이었다. 그들에게 ‘엄석대’라는 이름은 ‘무언가 대단히 높고 귀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는 급우들이 선출한 한 학급의 권력자였다. 새로 전학 온 한병태는 그러한 엄석대의 권력과 맞서 싸운다. 그의 말마따나 ‘고달픈 싸움’의 연속이었다.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는 담임선생님에게 학급의 일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력을 위임받은 인물이다. 한병태가 쉽게 편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질서이다. 엄석대는 또래에 비해 뛰어나다 말할 수 있는 ‘참을성과 치밀함’을 지니고 있다.

    학급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이들 간의 긴장 관계는 수평적이다. 엄석대에게는 그들을 장악하기 위한 힘, 곧 수평적 관계를 수직적으로 바꿀 힘이 필요했다. 담임선생님의 강력한 추인이 그 힘으로 작용한다.

    ‘담임선생님’이라는 위치는 하나의 권력을 상징한다. 담임선생님과 아이들 전체 사이의 권력은 수직적이다. 담임선생님은 엄석대가 자신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장악해 놓은 학급 내부의 긴장 관계에 개입한다. 엄석대를 통해 대리 통치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 간의 수평적 관계는 깨지고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의 수직적 관계 사이에 엄석대가 위치하게 된다. 한병태는 이런 관계를 보았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가 유지되는 작동 원리를 그는 파악하지 못했다. 한병태가 ‘주먹’, ‘성적’, ‘편가르기’에서 엄석대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이다. 엄석대의 카리스마는 한병태가 전학 가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한병태는 그것을 허물지 못했다.

    한병태는 엄석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한병태가 본 엄석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담임선생님에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인식시키는 인물이다. 엄석대가 이끄는 학급은 교내 생활면에서는 다른 학급보다 모범적이었다. 엄석대는 전교 1등을 하였고, 그 결과 담임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비교하여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담임선생님 입장에서 별 다른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무사(無事)함은 실질적 편안함이기도 했다. 엄석대의 권력은 더욱 굳건해진다. 담임선생님은 한병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게 바로…… 이곳의 방식이다. (중략) 나는 어쨌든……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엄석대는 자신의 권력으로 물질적․심리적 이익을 얻는다. 얻은 이익을 자신의 질서 아래 있는 학급 아이들만의 또 다른 질서에 따라 재분배하기도 한다. 엄석대의 카리스마는 더욱 강력해진다.

    이러한 엄석대의 카리스마는 절대적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하는데, 모두가 용인한 ‘이해관계에 따른 수직적 권력 관계’에서 엄석대의 카리스마는 ‘합법적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질서 속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는 인물은 ‘김영기’, ‘이희도’, ‘한병태’ 같은 인물들이었다. 학급 내부의 질서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 장면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 장면

    한병태는 싸움을 포기하고 엄석대에게 눈물을 보인다. 자신이 유리창을 깨끗이 닦았는지가 엄석대에게 달려 있다는 것, 살기 위해서는 엄석대의 질서 속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것, 그 질서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자신이 잃었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익이 생긴다는 것 따위의 복합적 이유가 한병태로 하여금 엄석대를 향해 굴복하게끔 한다. 이후 한병태는 엄석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다. 그도 그 질서 속으로 완벽하게 편입된 것이다.

    그런데 석대의 카리스마는 이후 더 큰 카리스마에 의해 몰락한다. 병태와 마찬가지의 입장(질서의 외부에서 개입하는 인물들이라는 의미에서)인 새로운 담임선생님. 그는 이전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 수직적 질서의 상위에 자리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아이들 간의 수직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의 중간에 있던 석대를 아이들의 자리에 돌려놓음으로써 그들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환한다. 아이들의 권력을 석대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석대를 아이들의 위치로 끌어내린 것이다. 한병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그날 교탁 위에 꿇어앉은 석대는 갑자기 자그마해져 있었다. (중략) 거기 비해 담임선생님은 키와 몸집이 갑자기 갑절은 늘어난 듯했다.”

    아이들은 엄석대도 맞는다는 것, 항복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한병태는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는다.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에게 인정받지 못한 엄석대를 보며 더 이상의 이익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한병태는 엄석대의 몰락을 보며 자신의 싸움과 굴복이 무의미해지는 것에 실망한다. 자신의 삶, 가치를 부정당한 것이다. 엄석대는 교실을 떠난다. 그의 카리스마는 그렇게 끝이 난다. 더 이상의 지배와 복종 관계는 성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한병태는 여행 중에 공권력에 체포되는 엄석대의 모습을 본다. 이때 한병태의 시선은 몰락한 권력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기보다는 몰락한 권력에 대한 쓰디쓴 연민을 내보인다.

    이문열 소설은 이처럼 자유당 말기라는 구체적 시간을 설정하여 구(舊)권력의 몰락 과정을 우화적으로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화자(話者) 한병태를 설정함으로써 ‘권력 비판’이라는 지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이 소설은 ‘엄석대’라는 이름의 카리스마가 몰락하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카리스마가 대신한다는 것, 이처럼 권력 관계에서 카리스마는 생성되고 관철되고 대체되고 몰락하는 것임을 뚜렷하게 증언해준다.

    3.

    「우상의 눈물」의 주인공 최기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기표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는 학생으로서, 아버지는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이 된 상태이고, 어머니는 심장병을 앓고 있고, 여동생은 버스 안내양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런 불우한 환경에서 비롯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선택하며 교활하고 잔인한 불량 학생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는 미움을 받지 않는 인물이다.

    우상과 눈물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표를 알고 지내온 아이들은 기표가 그처럼 철저하게 나쁜 애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애라고 말하는 애도 없었지만 아무도 기표를 욕하지 않았다. 피해를 직접 받은 애들마저도 기표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또한 그처럼 무자비한 린치를 당했으면서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힘이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바로 기표가 가지는 ‘카리스마’를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어디일까? 기표는 물리적 힘으로 또래의 학생들을 괴롭히지만 그와 동시에 담임선생님이 준 추리닝을 칼로 찢어버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있는 채플 시간에 교실에 남아 담배를 피우는 등 기성세대나 제도에 대한 현저한 저항의 모습을 보인다.

    기존 질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의 눈에는 이런 기표의 저항이 자신들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따라서 그 저항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 기표는 학생들의 공감을 얻으며 그야말로 ‘우상(偶像)’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표의 카리스마는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담임선생님과 형우에 의해 무너져간다. 담임선생님은 제도 속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인물이며, 기표를 제도 속으로 끌어들여 길들이기를 욕망한다.

    형우는 담임선생님의 조력자로서 기표와 마찬가지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기표와 달리 합법적 제도 속에서 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기표가 낙제하는 것을 막자면서 중간고사 때 기표를 도와주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기표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 일로 인해 형우는 재수파(기표)에게 집단 폭력을 당한다. 기표에게 당해 입원한 상황에서도 형우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입을 다물고 기표를 보호함으로써 교내의 새로운 ‘우상’이 된다. 그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기표의 카리스마는 무너져간다.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이었다.”

    “물론 겉으로야 그대로 남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빨 뺀 뱀이나 다름없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라고.”

    기표를 둘러싸고 있던 재수파들을 위선적 행동으로 무릎 꿇리게 함으로써 형우는 기표가 가지고 있던 물리적인 힘을 덜어낸다. 그는 기표가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비운 사이, 기표의 가정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기표에 대한 적의를 감추고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 기표를 미화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때 기표의 측근으로서 온갖 악행을 일삼던 재수파들도 숨은 선행자들로 미화된다.

    형우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아이들은 기표를 위해 성금을 모으기로 하고, 이러한 학내의 미담(美談)은 언론에까지 알려져 사회 각계에서 성금과 위문편지들이 전달되며 기표와 재수파들의 얘기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된다.

    이제 아이들은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제 아무나 곁에 가서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어깨도 쳤다. 그것은 기표가 아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수줍어하는 그 아이는 그렇게 당당하던 체구마저도 왜소하게 짜부라진 채 우리가 보통 사진을 찍을 적에 <치이즈>하고 웃는 그런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 방송

    ‘우상의 눈물’ 방송 장면

    기표로서는 재수파가 형우에게 실상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리적 힘을 대부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힘의 권위를 통해 감추고자 했던 자신의 어려운 가정 형편마저 언론에까지 알려지게 되는 상황을 맞는다.

    이는 그가 더 이상 기성세대와 제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래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던 권위를 잃고 대중 앞에 발가벗겨져 있음을 뜻한다. 이제 기표는 카리스마를 지닌, 교활하며 양심이라고는 추호도 존재해 보이지 않는 ‘악(惡)’의 인물이 아니라, 형우의 권력 재편 과정을 통해 순치되어 대중들에게 마땅히 동정 받아야 할 인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표의 권력과 카리스마의 신화는 사라진다. 스스로 하는 노출은 나르시시즘이지만, 타자에 의해 자행되는 노출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형우는 후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카리스마를 완전히 상실한 기표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겨놓은 채 현실에서 도피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기표의 카리스마가 대체 권력의 교묘한 재편 과정을 통해 몰락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권력의 생리와 메커니즘을 섬뜩하게 그려낸 가편(佳篇)이 아닐 수 없다.

    4.

    이문열 소설에 등장하는 권력자 엄석대는 선생님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그는 선생님의 신뢰라는 안전판을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폭력을 매개로 아이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반면 전상국 소설 속의 최기표는 엄석대와는 달리 폭력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스스로 정치 권력화를 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우와 담임선생님은 일종의 정치적 동맹을 맺어 ‘악의 축’인 기표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처럼 이문열과 전상국은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 둘 사이에 개재하는 다른 점을 찾자면 이문열은 회고하는 방법으로 영웅을 그리고 있으며, 전상국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우상이 몰락하는 과정을 관찰한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불멸하는 영웅을 그리고 있다. 비록 그때는 초라하게 퇴장했지만,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엄석대’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기념비적 존재이다. 이는 마치 과거 자신들 위에 군림했던 독재자를 추억하고 향수를 느끼는 심리와 비슷하다.

    반면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영웅이나 권력의 본질 자체보다는 선동에 이끌리는 무지몽매한 대중 심리를 다루고 있다. 대중 심리를 자극하는 선동과 그 선동에 피해자인 기표를 그린다. 또한 이 두 작품은 민주주의 아래서 벌어질 수 있는 권력 투쟁의 양상을 그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문열은 과거 권력을 불멸의 존재로 그림으로써 독재자를 ‘몰락한 영웅’으로 되새긴다. 이는 신화를 통해 안정을 추구하려는 인간 심리와 흡사하다. 반면 전상국은 그것을 탈(脫)신화화하는 과정을 택한다. 전상국은 체제와 구조를 분해한 후,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상황을 세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전상국 소설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상의 눈물」이 대중의 집단적 폭력성과 저열한 복수 심리를 광기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문열 소설은 독재의 허와 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지만, 그에 대한 향수도 자극함으로써 구조적 성찰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전상국 소설은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심리를 복수극으로 전개시킨다. 기표를 몰아내려는 형우의 교묘한 복수 계획은 계획적 선동으로 나타나고, 아이들은 무지 상태에서 형우에게 끌려 다닌다. 이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설정된 복수극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무지의 상태에서 폭력이 오가고 있다는 것은 독자를 섬뜩하게 한다.

    이제 우리가 읽은 두 편의 소설 모두 권력자의 카리스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문열이 보여준 엄석대의 리더십은 마키아벨리적이다. 엄석대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가지고 학급을 움직인다. 그는 철저하게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고, 처벌과 보상 또는 편애와 차별로 아이들을 다룬다.

    또한 그는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끊임없이 권력을 재생산한다. 물론 부정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때 엄석대의 폭력성은 명확해진다.

    하지만 전상국 소설에서 형우가 기표에게 자행하는 폭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형우는 선행과 동정이라는 가면으로 자신의 악의적 복수를 숨긴다.

    이 두 소설의 차이는 권력의 폭력성이 드러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가시적 폭력은 가해자만 제거하면 되지만, 비가시적인 폭력은 가해자가 숨어 있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제거하기가 힘들다. 이문열이 보여준 엄석대의 ‘눈물’은 눈에 드러난 민주주의의 폐단으로 상징되지만, 전상국이 보여준 기표의 ‘눈물’은 드러나지 않는 민주주의의 허점이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국문학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