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한다,
    고로 현대사회는 존재한다.
    [책소개] 『유행의 시대』 (지그문트 바우만/ 오월의봄))
        2013년 08월 24일 01: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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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의 문화는 상품을 진열하는 대형 백화점일 뿐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 그렇게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소비자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는 소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를 멈출 수가 없다.

    이 소비사회 속에서 문화는 잠재적인 고객들의 혼을 빼놓으려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 수없이 경쟁하고, 소비를 기다리는 상품들의 보관소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소비시장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모아 문화를 유행의 논리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지난해에 유행했던 옷은 올해 입으면 이상해 보이기 때문에 입을 수가 없다.

    올해 유명해진 장소에 가기 위해 작년에 그토록 사람들과 가고 싶어 공유했던 장소들은 올해에는 쓸모가 없어진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영화를 보고, 똑같은 음악을 듣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기계로 통화를 한다. 각자의 개성은 없어진 지 오래다.

    “대중은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과 극심한 생존 경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최신 유행을 추구한다.”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어떤 문화를 구매한다. 앞서 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지금 현재 유행하는 것들을 빠르게 획득해야 하고, 과거의 것들은 신속하게 버리고 잊어야 한다.

    “‘어떤 것이 벌써 유행에 뒤처지는지’ 눈을 떼지 말라는 명령은 (지금 이 순간) 어떤 것이 새롭고 최신 유행인지 훤히 알고 있을 의무로서 반드시 의식적으로 준수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옷장과 가구와 벽지와 외모와 습관을,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소비시장은 적당한 가격, 또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문화의 요구에 복종하도록 길들인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비시장에 의해 ‘식민화’되고 ‘착취’되며 종속된다.

    우리 시대 가장 명석하고 영향력 있는 사회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를 되짚어보고 있다.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화의 기치 아래 온 인류가 공유하는 똑같은 문화는 결국 초국적 자본이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상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란 원래 ‘민중’에게 최고의 사상과 창의력을 전해줌으로써 그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화의 동인이었다. 바우만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문화가 그러한 사명의 역할을 잃고 유혹의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문화는 더 이상 민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고 그들을 유혹하려고만 한다. 오늘날 문화의 기능은 이미 존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는 동시에 기존의 욕구들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문화가 만들어낸 유행을 매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제 유행한 것이 오늘 달라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바우만은 오늘날의 문화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만 상품을 진열하는 대형 백화점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비록 짧은 책이지만, 바우만은 풍부한 사례를 들어가며 ‘문화’가 맞는 운명을 통찰하고 있다. 하나씩 글을 음미하며 읽다보면 이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가 우리 삶에 아주 큰 문제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역할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

    “‘문화’라는 개념의 최초 목적은 현재 지배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성문화하여 현상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장차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말은 대중을 교육하고 그들의 습성을 개선하려는 시도라는 형태로 계획되고 수행된 선교 임무와도 같으며, 그럼으로써 사회를 개선하고 ‘민중’을 발전시키는 것, 즉 그들을 ‘사회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유행의 시대

    바우만은 문화를 ‘계몽’ 또는 ‘민중’을 기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방향 감각을 상실해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근대 국가의 시민이자 국민의 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고 말한다.

    즉 문화의 목표란 새로운 판단 기준과 유연하고 적절한 수준을 갖춘 ‘새로운 인간’을 낳는 것이었다. 문화는 그 자체로 표어이자 행동을 추구하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를 수행하는 자들은 교육받은 지식인 계급이었다. 그리고 이 ‘문화’ 개념은 계몽운동 때 태어나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져왔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 짓기>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특정한 사회 계급에 주어졌고 오직 그 한 계급만의 전유물이었다고 말했다. 민중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은 계급 간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긋고 강화함으로써 계급의 구분을 나타내고 강조하고 보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우만은 문화가 사회적 계급을 재생산하는 일꾼의 역할을 빠르게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대성이 ‘단단히 굳은solid’ 단계에서 ‘유동하는liquid’ 단계로 전환하는 여러 과정이 낳은 결과이다.

    오늘날의 문화 엘리트들은 오페라와 팝송을 동시에 좋아하고, 순수예술과 함께 텔레비전의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즐긴다. 그야말로 잡식성이다. 그들은 이제 기꺼이 모든 문화를 소비하고 음미한다. 그러면서 군중들에게 좀 덜 까다롭게 선택하고, 좀 더 많이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그전까지 문화가 맡았던 임무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취소되었다.

    “오늘날의 문화는 규범적인 통제가 아니라 미끼를 던지고 매료시킴으로써, 경찰의 감독이 아니라 PR로써, 의무가 아니라 새로운 욕구와 욕망을 생산하고 씨 뿌리고 싹 틔움으로써 유혹하고 매혹하느라 바쁘다. 이것은 사회 계층화와 분열이라기보다는 매출을 지향하는 소비시장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문화 엘리트는 사라졌다. 그들은 자본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개인적인 안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더는 곤란에 처한 민중을 돌보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문화를 대신해 사회적인 문제들을 발언해왔던 예술도 투쟁하던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며 경건하거나 존경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일은 드물다. 누군가 어느 한 예술 형태가 다른 것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해도 그 목소리에는 열정도 활기도 사라지고 없다. 예술가들의 창조물은 소수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줄 뿐이다. 상류층들이 미술품을 부의 축재 수단으로 쓰는 걸 보라.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물건을 파는 상인과 광고 제작자들은 유혹의 기술과 잠재적 고객의 충동을 결합함으로써만 동료의 존경을 얻고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다.”

    예전에는 국민이자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고객이 된 사람들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특히 새롭고, 더 강하고, 아직 충족되지 않은 욕구와 충동 같은 것들은 들어설 여지도 없는 완벽하고 완전하며 결정적인 만족감에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자본과 소비시장이 주도하는 사회의 대안은?

    “자본주의 시대 ‘유동하는 현대’의 피터 드러커, 오컴의 윌리엄, 그리고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새로운 시대의 원리를 간단하게, 그러나 단호하고 기지 넘치는 문구로 요약한다. ‘사회가 구원해주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다.’”

    이런 불확실성의 사회에서 지식인 계급들은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면서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다문화주의가 대안이라고.

    그러나 바우만은 모든 ‘차이’를 그것이 다른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존중되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 입장은 절대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문화주의’는 오늘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확실성의 원인과 뿌리에 집중하는 대신, 주의와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이해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분열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 권력들, 자본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이 세력들은 세계를 분열시킨다. 오늘날의 세계 권력들은 빠르게 개별화되는 이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생긴 문제들에 대처할 방법을 각자 알아서 찾도록 방치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세상을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소비시장은 더는 가치가 없는 상품에 대하여 곧바로 대체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과 처분 사이의 시간 차이가 가능한 한 짧고 빠르게 전환하기를 선호하며 그렇게 되도록 조장한다.

    바우만은 대중과 예술이 계속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이런 만남 속에서 수태되고, 태어나고, 활성화되고, 실현된다. 그러한 만남을 위해서는 지역적인 ‘풀뿌리’ 예술과 공연 계획을 장려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유동하는 현대사회에서 ‘좋은 사회’라는 목표가 아직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는 생각에 헌신하는 사회, 즉 그런 기회들이 충족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하는 사회를 의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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