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해방운동 만세!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2013년 08월 23일 10: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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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한민국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대한민국은, 대체로 (주관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예컨대 사회심리학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관적 생활만족지수 관련 통계를 통해서라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관적인 “생활만족”과 의료에의 접근, 기본생계보장 등을 종합해서 만들어낸 한 지수 (관련 링크)에 의하면 한국은 102위 정도 될 것입니다.

    의료시설이나 생계 보장차원에서 한국과 경쟁할 게 없는 부탄(8위)이나 코스타리카(13위) 등이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는 곳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주관적인 생활만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현실사회주의가 망한 러시아는 아예 167위지만, 1990년대에 세계사상 드문 참상을 겪은 러시아와 달리 한국은 – 비록 1997~98년간 경제적 슬럼프가 있어도 – 계속 “성장”했잖아요?

    그러면 이 성장과 아울러 출현되어 우리를 좌우하게 된 이데올로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에서 한 가지 첨언해야 할 부분은, 주관적인 행복감이라는 것은 꼭 고용의 정규성이나 거주지의 부동산가격 지수 내지 은행통장에 찍히는 숫자들과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6개월짜리 인생”을 사는 마트 비정규직 분에게는 생계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 수 있으며, 그만큼 생활에 대한 만족감은 치명적으로 손상될 수 있죠. 근데 예컨대 대치동에서 사는 연세대의 정규직 교수는 꼭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웃으면서 보낼까요? 꼭 그렇지도 않죠.

    생계불안은 없어도 예컨대 권위 높은 미국 잡지에 자신의 논문을 싣지 못한 데 대한 불만족부터 지금대로 가면 서울대행 못할 것 같은 자식놈 걱정, 아니면 돈 위주로 변질되고 만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한탄까지, 그의 영혼을 좀먹을 요인들은 아주 많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 기적”, “민주화”, “한류”까지, 이 찬란한 성적표를 가지고도 왜 대한민국은 이토록 어떤 “힐링”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불행감의 병에 시달릴까요? 정말 이런 꼴을 보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이긴 합니다.

    마더쇼크12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저는 대한민국이 어릴 때부터 모두들에게 획일적으로, 군대식으로 훈련시키고 만들어내는 자아(ego)의 형태와 그 욕망구조에 치명적 “에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소프트웨어의 에러처럼, 이 “자아의 에러”는 결국 내면으로부터 인간을 파괴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에러”인가요? 이건 바로 “타자들과의 경쟁적 비교”의 에러입니다. 좀 슬픈 역설이지만, 원효 등 한반도 저술가들이 이미 7세기에 그 저술에서 “平等觀” (불교적 의미에서 모든 중생들이 본질적으로 같고 그렇게 봐야 한다는 진리)이라는 용어를 썼음에도 우리 상식에는 평등이라는 건 전무하고 모든 것은 “順”, 즉 서열입니다.

    성적순부터 시작해서 완력과 성격의 외향성, 강함의 순(학교에서 맞느냐 때리느냐의 문제는 여기에서 결정지어집니다), 출신 학교/대학의 “명문”성의 순, 부모 연봉 액수의 순, 내가 태어나서 사는 아파트 평수의 순, 영어 실력 순, 유학 국가의 권위의 순(미, 영, 독/불, 일, 중, 러… 이렇게 될까요? 전공마다 다르겠지만요), 궁극적으로 (특히 여성들에게는 비공식적으로는 늘 매겨지는) “외모 지수”의 순까지…

    우리에게는 그 끝이 안보이는 “순” 이외에는 과연 뭐가 있나요? 이건 저도 하기가 아픈 말이지만, 현대 북조선의 정치 문화가 수령제 위주인 것처럼 현대 남조선의 생활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한 위계서열적 모멸과 차별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입니다.

    인간의 심적 건강에 어느 쪽이 더 나쁠까요? 혹시 북조선 출신으로서 양 조선에서 살아보신 분들 중에 누가 이 글을 보신다면 한 번 판단하셔서 제게 연락주시고 말씀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결국 우리가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저지르는 범죄의 이름은 바로 “시장적 자아의 길러내기”입니다. 시장은 바로 질과 가격을 비교해서 물건 사는 곳이죠? 우리도 아이에게는 매일매일 “비교”를 강요합니다. “야, 너, 영수는 너보다 수학을 훨씬 잘해. 너 어쩔래? 이러다가 좋은 대학 못간다!” 아니면 “야, 너는 왜 맞기만 하냐. 영식이와 태권도 도장 같이 다니면서 그 녀석이 너보다 훨씬 잘하거든. 너도 배워, 글고 때릴 때 때려, 야, 임마!”

    뭐, 부모만 그런가요? “성적순”이 신주단지인 학교부터 대학 순을 발표함으로써 모든 대학 경영진들을 겁에 떨게 만드는 “주류” 일간지까지, “순”과 비교에 미친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전체가 이미 미칠 대로 미친 상태니까요.

    그렇게 해서 사회화를 강제 당한(?) 아이는, 울며겨자먹기로 스스로도 “비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나”와 “그들”의 완력이나 외모부터, 성적, “실력”, “명문대 입학” 가능성, “나”와 “그들”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의 뉘앙스까지…

    그다음에,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런 “비교 위주의 자아”는 아예 노골적으로 완전한 “시장적 자아”로서의 특징을 갖게 됩니다. “나”도 “그들”도 경쟁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팔아야 하는 인간상품들이니까요.

    “추천서 문제”가 걸린 교수들과의 관계부터 교환학생 경험 등까지, 모든 것이 “비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피말리는 경쟁의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자본주의 특징상으로는 아무리 무기를 많이 준비해도 그렇게 하는 아이들의 상당 부분은 그냥 로스트 제네레이션, 잃어버린 세대가 되지 않을 수 없지만…도대체 이런 곳에서는 행복의 “幸”자라도 보일 것 같아요?

    http://www.flickr.com/photos/spirit-fire/4965077324

    출처 : flickr.com/photos/spirit-fire/4965077324

    행복이 있다면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필요 없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그냥 햇빛, 나뭇가지 잎들의 속삭임을 즐기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시험에서 떨어지면 …..안 사준다!”는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곳이 아닌, 그냥 아이에게 애정 표현을 많이 하고 그 웃음을 즐기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나아가서 자아와 그 욕망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일등 성취”를 강요하고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 사회가 아닌, 그냥 등수와 무관하게 같이 달리고 수영하고 축구하고 운동장에서 날뛰는 것을 그저 즐기기만 하는, 無慾을 권하는 사회에 있지 않을까요?

    “나”는 없는 곳에서야말로 내가 가장 행복할 듯합니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잉여가치 극대화 차원에서 가장 비생산적이고 인간 건강에 나쁜 욕망들의 미친 질주를 부추기는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그저 뭔가를 성취한 듯 한 강남족 따위의 “교양 독서” 수준이 되고 말죠.

    무욕의 사회를 진정으로 만드는 것도, 결국 “이야기” 차원이 아니고 아래로부터의 다 같이 하는 투쟁의 차원일거에요. 그리고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너무나 많은 아동의 영혼들이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아, “아동해방운동 만세”를 부르고 싶습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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