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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종석씨의 <기본소득론 비판>에 대한 반론
        2013년 08월 21일 04: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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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소득론을 비판하는 남종석씨의 <레디앙> 글에 대한 반론을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박정훈씨가 보내와서 게재한다. <편집자>

    * 기본소득 비판- 1 기사 링크,  비판- 2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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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종석의 기본소득비판은 안타까운 글이다. 굳이 ‘안타까움’이라는 느낌을 표현한 것은 기본소득을 어떻게든 반대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의 글에 두 가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먼저 비판의 엄밀성이 빠져있다. 그는 기본소득을 비판하면서 곽노완 선생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의 비판 내용은 곽노완 교수의 논문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카드사 이야기, 수탈문제, 이행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왜곡할 의도는 없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안 읽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남종석의 정치적 입장이 빠져있다. 그는 기본소득을 처음에는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실현가능성은 지배계급이 기본소득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적이고 계급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본소득 실현 이후를 우려하는 것이다. 차라리 기본소득의 지속가능성이라고 접근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도입되었을 때 그가 우려하는 지점이 흥미롭다. 한국경제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 자본의 투자유인이 감소된다는 것이다. 또, 투기불로소득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면서 기본소득이 생기면 노동유인이 없어진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그는 철저하게 주류경제학자의 입장을 따른다. 마치 우파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고 동일한 입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경제학이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든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기본소득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기본소득이 지지자들의 표를 통해 정책적으로 입안되고 실현되면, 주체들을 유권자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혼란스러운 입장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곽노완 교수의 기본소득은 막대한 투기불로소득을 환수하겠다는 프로젝트다. 심지어 토지 등의 자산가치가 하락하면 그것을 국유화 해버리자는 주장도 한다. 즉 수탈당하는 계급의 주체 형성과 저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정치적 입장도 학자적 성실성도 발견할 수 없는 글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본소득 ‘반대’뿐이다. 그의 글이 다른 기본소득 비판과 비교해서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만, 그의 글이 앞으로 있을 기본소득 논쟁에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을 낳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 그래서 여기서 기본소득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역할이어야 한다.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는 걱정, 그런데 그 세상이 뒤집어진 세상이라면?

    남종석씨의 논리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현재의 경제논리를 가지고, 기존 경제 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한 기본소득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입장이 없는 주류경제학자를 만난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으로 인해 외국자본이 이탈하고 주식시장이 무너지는 것이 두렵다. 그는 기본소득을 경제학적으로 비판할 때 경제학원론을 꺼내들고 맑스주의로 비판할 때 맑스책을 꺼내든다.

    현재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글로벌 경제위기는 초국적 투기자본과,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복지 축소에 있다. 그가 만약 전통적 좌파의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현재의 금융자본 위기가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실물경제 위기의 대안을 금융시장에서 찾았다라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금융위기는 본질이 아니고 자본의 위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차라리 기본소득의 개량성을 비판했다면, 계급적 전선을 함께 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비판의 요체는 우파 경제학자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경제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다. 남종석씨가 기본소득 비판의 근거로 들었던 현재 한국경제의 특성은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다른 대안에 대해 비판할 무기가 아니다. 기본소득은 현재 경제위기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엄청난 금액의 초단타성 국제투기자본은 실물경제를 어지럽히는 중요한 원인이다.

    한국은 이미 그러한 투기자본의 폐해를 경험한 바 있다. 론스타와 쌍용자동차 회계조작이 대표적이다. 회사를 사고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주식가치를 높이고 팔아 치우는 기업사냥과 투기는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의 삶을 공격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가 바로 기본소득의 주요한 목적이다. 또 노동소득이 극도로 낮은 한국사회에서 내수시장을 확대하고 대외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이 제시되기도 한다.

    재밌는 부분은 그가 곽노완 교수의 GDP 절반의 이야기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인터뷰 내용을 따온 것인데, 일종의 ‘사유실험’으로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가정일 뿐이다. 남종석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한다.

    곽노완 교수의 비유는 과도했지만, 남종석씨가 경제학자라면 곽노완 교수의 입장 정도는 면밀히 살펴야 할 책임이 있다.

    곽노완 교수와 강남훈 교수는 기본소득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성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GDP 절반 이야기로 비판하는 것은 허공에다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소득을 매개로 탈성장 담론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는 비판적이지만 남종석의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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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겨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점령 운동 당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지지 현수막.

    수탈

    가장 절망적인 비판은 “빈곤층이 곧 수탈 당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남종석은 빈곤의 이유를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는다. 전형적인 우파의 논리다.

    지금의 경제문제는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이 아니라 “왜 경제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경제성장은 계속되는가?”에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수탈’ 개념에서 찾는 것이다. 전통적 복지국가에서는 고임금을 토대로 한 대량소비와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소수를 위한 잔여적 복지로 사회를 설계한다. 남종석씨가 그렇게 이야기한 노동연계형 복지가 바로 이 체제에 기반한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황금기의 유럽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노동유연화 이후에 자본이 임금을 줄이고, 실업자를 늘리고, 복지제도를 축소해도 상품 판매는 계속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수탈이 발생한다.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용카드를 만들고 대출을 받는다. 현재 한국 대학생들의 평균 부채가 1400만원이다. 노동소득이 충분하지 않아도 집을 사기 위해 수천만원의 대출을 받는다. 가계 부채가 1000조이다. 바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가 빈곤층을 수탈하면서 상품 판매를 하다가 터진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소득이 없다하더라도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수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수탈이 부동산을 근거로 하는 지대적 수탈과 금융상품을 중심으로 한 금융적 수탈이다. 우리는 소득이 있든 없든 월세를 내야 하고, 대출금과 카드값을 갚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자본의 수탈에 대한 역수탈을 하자는 제안이다.

    그도 수탈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 바로 그의 글에서 가장 황당한 부분 약탈적인 카드사를 왜 국가가 인수해야 하냐고 묻는 부분이다. 카드사가 카드 수수료로 수탈한다. 그래서 약탈을 금지하기 위해서 카드수수료가 0원인 카드사를 국가가 운영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카드사는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하며 미래의 소득을 수탈한다. 이것이 수탈이다. 이러한 것을 줄이거나 하지 말자고 카드사를 국가가 운영하자는 것이다.

    노동유인 효과와 선별적 복지의 대안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노동유인을 줄인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판한다. 그리고 복지국가를 구상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 연계형 복지를 지지한다. 그러나 그가 경제학자로서 이 부분을 비판하려고 했다면 강남훈 선생님의 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 정도는 읽어야 했다.

    현재의 노동연계형 복지야말로 노동유인 효과를 줄인다. 만약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가 100만원이고, 수급자가 40만원의 노동소득을 가진다면 60만원을 국가로부터 받는다. 노동소득이 100만원이 넘지 않는 이상 노동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제시한 2014년 4인 가족기준 최저생계비는 163만원 정도다. 그리고 내년 최저임금이 5,210원이다. 주 40시간 노동을 하는 것보다 노동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이다. 현재의 선별적 복지야말로 노동유인 효과가 없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노동 연계형과 같이 조건이 붙는 선별적 복지에서는 복지 사각지대가 반드시 발생한다. 부모가 수입이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 수급지원을 받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자살을 한 장애인 부모, 자식과는 연을 끊고 사는데 자식의 수입 때문에 수급권자에서 탈락하는 노인들, 장사를 하기 위해 트럭을 장만했다는 이유로 수급권에서 탈락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심사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유럽에서 이야기한 노동연계형 복지는 직업훈련을 받고 구직의사를 증명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서류와 훈련받는 시늉으로 증명한다. 자신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비생산적인 일이 아닌가? 한국의 경우에는 옷이 더러울수록, 자신감이 없고 무기력할수록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선정될 때 점수를 많이 받는다.

    반면, 기본소득은 노동의 여부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이 생활하기에 불충분하다면 추가로 노동소득을 얻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일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과 노동운동

    기본소득은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연대를 위한 고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시장에서의 고용권력은 자본에 있다. 아담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이 노동자들보다 유리한 이유는 생활에 필요한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파업을 하는 동안 생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권력관계를 바꾼다. 임금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생계를 위한 소득이 발생한다. 즉, 자본가의 고용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가 이야기한 두 가지 부르주아적 자유, 즉 생산수단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의 문제 중에서 두 번째 문제를 다룬다.

    두 번째의 자유는 노동력이 판매되지 않았을 때의 생존에 대한 항상적인 불안이 존재한다. 사실상 자유가 아닌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강제에서 팔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다.

    실제로 현재의 노동운동의 맹점은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있다. 노동시장의 진입 자체가 불안하거나 진입하더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획득 유지하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임금과 지위를 버리고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비판은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주의’를 공격하거나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구호를 외치는 정도다. 이것은 너무나 수세적이고 감성적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된 실업자, 그리고 노동시장의 진입을 갈구하며 현재 수탈당하고 있는 취준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언제 정리해고될지 모르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기본소득이라는 최소한의 안정망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정규직 조직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노동시장에 진입을 기대하는 취업준비생들이 공통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이 아니라 임금노동에서 벗어나기.

    흔히들 많은 사람들은 청년들에게 꿈을 묻는다. 그런데 이렇게 기만적인 질문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꿈은 생존과 양립할 수밖에 없다. 임금을 받을 수 없는 꿈은 그야말로 공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친구들과 부모님들과 세상에 이야기하는 꿈은, 진정한 꿈이 아니든가, 공상이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의 노동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가치가 있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입장에서 가치로운 노동이다. 예술가들이 흔히 겪는 자신의 예술적 가치와 상업성 사이의 갈등도 여기서 벌어진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교육적 철학이 없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받는 선생님, 사람을 구하는 것이 꿈이지만 의학전문대의 학비가 없어 의사를 포기하는 청년, 취직이 잘되는 경영학과에 입학원서를 쓰고 있는 문학소년, 생산성이 낫다는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장애인등.

    임금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수한 노동도 존재한다. 가사노동과 저임금을 받는 기만적인 돌봄노동이 대표적이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임금노동의 배제와 차별을 해결할 수 있는 고리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새로운 대안, 기본소득 운동을 위하여

    이왕 기본소득에 대해 말을 꺼냈으니 기본소득운동진영에도 쓴 말을 해야겠다. 남종석씨의 우려와는 달리 노동당 장석준의 기본소득 주장은 매우 한계적인 주장이다. 그는 연금을 중심으로 전술적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박근혜 정부의 기초노령연금 수준의 변화다.

    기본소득이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체제의 변혁과 그것을 추동할 주체 형성을 위한 운동이 되려면, 재원 마련에서 투기불로소득 환수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곽노완 강남훈 모델의 장점은 바로 기본소득의 주요재원을 여기에서 마련했기 때문이다.

    전선을 크게 치고 자본에 대한 공격은 분명히 해야지 ‘기본소득’의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이런 의미가 아니면 기본소득을 현재의 경제위기의 대안으로 제시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부분적 기본소득에는 전술적으로도 반대한다.

    두 번째로, 기본소득 운동이 시작 되어야 한다. 그간 기본소득의 논쟁은 과거와 비교해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이것의 핵심적인 원인은 기본소득 운동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수준의 기본소득 운동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필자소개
    기본소득네트워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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