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폭 투하는 해방의 수단이었나?
    천황의, 천황을 위한, 소위 8월 15일 '종전의 조서'
        2013년 08월 21일 01: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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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한반도가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 광복절이다.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예를 들면 우리가 북한과 유엔군 사이에 협정이 조인되어 한국전쟁이 휴전된 날로 기억하는 7월 27일이나, 나치스 독일이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한 5월 8일(유럽전승기념일) 같은 날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 전쟁이 일단락되는 날을, 쌍방국 사이에 종전에 관한 협정이 조인된 날로 본다면, 그것은 분명 일본이 연합군의 항복 문서에 조인한 9월 2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이 종전기념일이 된 것은 바로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이 ‘성단(聖斷)’을 내려 NHK 라디오에서 “나는 세계의 대세와 대일본제국의 상황에 비추어, 엄정한 조치로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나는 제국정부에게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제시한 공동선언(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통고시켰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옥음 방송(玉音放送)’이라 불리는, 천황의 ‘종전의 조서’ 낭독이다. 이 전쟁은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며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 서서 항복을 인정하고 있는 이 ‘조서’는, 전쟁을 선언하든 종식시키든 그에 관한 최종결정권은 천황에게 있음을 명확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 날은 바로 천황이 약 250만 명의 자국 전사자를 낳은 처참한 전쟁을 종식시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제국에 평화를 초래한 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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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의 8월 15일 항복 방송을 듣고 있는 일본인들

    한편, 이 날을 광복절로 기념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날은, 비유해서 말하면 폴란드 사람들이 히틀러가 자살한 날을 기뻐했을 심정과 비슷한 것이겠다. 물론 히로히토는 무사히 살아남아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경제대국의 ‘위용’을 지켜보며 천수를 누리지만.

    그렇다면 천황이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거룩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종전의 조서’를 계속 따라가 보자.

    교전은 이미 4년을 넘겨 나의 육해군 장군의 용감한 전투나 나의 각료나 관료들의 근면한 노력, 나의 일억 백성의 복종이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상황은 결코 호전되지 않았다. 세계의 대세도 우리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혹한 폭탄을 써서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여, 참상은 실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도 파괴하게 될 것이다. (……) 너희들 신민의 충정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시운이 향하는 대로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고 참기 힘든 것을 참아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기를 바란다. (……)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여 세계의 진운에 뒤쳐지지 않도록 기약해야 한다. 너희 신민은 능히 나의 뜻을 따르라.

    그 이유는 바로 인류 역사상 초유의 파괴력을 가지고 단 한 발로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파괴한 미국의 원폭투하에 있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B29폭격기 ‘에노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인류사상 최초의 우라늄형 원폭을 투하하여 약 20여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 3일 후인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 두 번째 플루토늄형 원폭이 투하되었고 사망자는 약 12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을 끝낼 방도도 찾지 못하고 전쟁을 포기하지도 못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군부에 대해, 천황 히로히토는 분연히 종전을 명한 것이다. 물론 이 ‘거룩한 결단’이라는 것은 원폭투하 후에도 좀체 내려지지 않아 8월 14일의 오사카 대공습으로 5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생각하면, 천황의 ‘성단’ 자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참한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를 내고, 5월부터 항복의 시점을 찾아 헤맸던 일본이 천황의 ‘성단’을 준비하는 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많은 희생을 감내했던 것일까.

    나중에 맥아더가 “미국이 만약에 천황의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면, 일본은 5월에라도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천황의 지위를 연합국 측으로부터 확증받기 위해서였다. 위의 조서에서도 자신의 ‘백성’들에게 천황제=국체 유지를 위해 굴욕과 고통을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조서를 잘 읽어 보면, 천황은 원폭투하의 참상을 겪고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일본 민족’을 구할 뿐만 아니라, 그 거대한 파괴력으로부터 인류의 문명까지도 방위하는 구세주를 자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서대로라면, 조선의 해방은 미국의 원폭투하와, 그것을 민족과 인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군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실로 ‘대국적’인 차원에서 항복을 결정한 천황의 ‘성단’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 된다. 과연 그럴까?

    원폭투하가 천황의 ‘성단’을 재촉하여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아시아를 해방시켰다는 속설에는 실은 은폐된 부분이 있다.

    원폭 투하에 숨겨진 미국의 음모와 일본의 계산

    최근 다큐멘터리 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2012, 일본어 타이틀은 ‘もう一つのアメリカ史.’) 다큐멘터리의 NHK 편집판(관련 링크)과 책을 제작하여 그와 관련된 연구들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며 속설에 도전한 것이 올리버 스톤 감독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국면에서 냉전 없는 평화 지향적인 현대사의 가능성을 스스로 말살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사회를 전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을, 국제정세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영속적 전쟁이 미국에 부를 초래하며 “신이 부여한 팽창의 숙명(Manifest destiny)”을 짊어진 것이 미국이라는 왜곡된 신화를 공고히 하며 제국의 길을 치달은 내부의 문제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의도이다.

    여기에서 스톤 감독이 특히 중시한 것이, 바로 원폭투하에 숨겨진 미국의 “터무니없는 음흉한 음모”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이 독일군 200사단과 교전하면서 자국민 2,700여만 명의 희생을 통해 얻어낸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를 미국이 ‘횡령’하고 소련을 자신들의 팽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적’으로 몰고 가며 냉전의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그때 위력을 발휘한 것이 바로 원폭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5월 이후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이미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참전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전후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고 싶은 미국은, 극적인 원폭실험 성공을 거쳐 소련군의 만주침공 예정일보다 3일 일찍 히로시마에, 바로 당일 나가사키에 원폭투하를 감행하여 소련에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른바 냉전체제 전초전으로서의 ‘원폭 외교’론이다.

    물론 이러한 냉전의 논리 이전에 일본이 천황제 유지에 급급하며 전쟁을 지연시키지만 않았다면, 원폭에 의한 무차별 살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폭투하는 천황의 ‘성단’을 이끌어낸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절멸시킬 수 있는 원폭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작 일본이 항복을 결심한 결정적인 요소는 소련군이 대일 참전하여 만주를 제압한 사건이었다.

    패전시의 수상이었던 스즈키 간타로가 “소련은 만주, 조선, 사할린뿐만 아니라 홋카이도도 점령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일본의 토대는 붕괴되고 만다. 상대가 미국일 때 끝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회상했듯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처단한 공산국가 소련에 점령당하느니 미국에 점령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조서’의 텍스트는 이중의 은폐구조 위에 구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이라는 또 하나의 항복 원인을 은폐하고 있고, 또 하나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비인도적인 행위로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보신과 권력의 보전을 위해 전쟁을 지연시켜 막대한 참화를 초래했던 스스로의 전쟁 책임을 은폐하고 있다.

    8월 15일은 은폐되고 왜곡된 항복에 관한 성명서가 히로히토의 입으로 낭독되었던 날인 것이다.

    전후가 되면, 이와 같은 틀 위에서 국제사회로부터 원폭투하의 비인도성을 비난받은 미국과, 그러한 미점령군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본의 친미 전쟁세력에 의한 ‘원폭투하 정당화’ 주장이 쏟아지게 된다.

    미국은 원폭투하라는 공중전이 본토 침공이라는 지상전에 의해 초래되었을 수많은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일본인들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전체적으로 하루라도 더 빨리 구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한편, 일본의 지배세력들 중에서도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 국민이 총체적으로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에 의한 원폭투하에 우리들은 감사해야 한다. 원폭을 맞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든 일본인은 원폭 피해자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나타났다.

    심지어 히로히토마저도 1975년에 원폭투하에 대해서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히로시마 시민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며 진심을 말해 버렸다. 원폭의 비인도성, 잔혹성을 비난하던 ‘옥음방송’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떠한 사고의 회로를 거칠 때, 원폭 반대가 아니라 ‘원폭 용인’으로 귀착할 수 있을까.

    원폭 희생자는 제물인가?

    원폭을 용인하는 이러한 주장들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대일본제국의 히로시마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원폭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그것은 공산화라는 재앙을 막고 미국의 그늘에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며 전후를 출발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겨질 뿐이다.

    마치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소수를 인신공양으로 희생시키는 원시사회의 제사의식처럼. 그 희생이 정말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정말로 다수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불문에 부쳐진 채로.

    하지만 권력 유지를 위한 희생, 이권을 위한 희생, 다수를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용인하는 이 희생의 시스템이 가동되는 순간 그것은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불과 5년만에 미국이 한국전쟁에서의 원폭사용을 용인한다든지, 일본의 전쟁세력들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국의 전쟁에 일사불란하게 협력한다든지 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명백해진 원폭투하의 거대한 참상도 이 시스템을 억지하지는 못한 것을 의미한다.

    ‘옥음방송’의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고 참기 힘든 것을 참아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라”는 것은, 누구든 이 희생을 달게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일까. 제사장들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선택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원폭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속설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는 조선을 해방한 해방군에서 소련의 존재를 지운 것. 실은 당시 좌파운동 진영에서도 널리 수용되어 미군을 해방군으로 간주하곤 했던 이 속설은, 해방과 함께 그어진 38선과 한국전쟁을 통한 남북분단의 공고화로 남한에서 절대화되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원폭투하는, 조금만 늦었어도 북한처럼 공산국가 소련에 점령당할 뻔 했는데, 예상외로 빨리 일제를 무조건 항복시켜 반도 남쪽의 공산화를 막은 ‘천우(天佑)’로 여겨졌던 것이다.

    원폭이 조선을 해방했다는 속설이 가려버린 또 하나의 진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었던 5만의 조선인들은 해방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부터 1982년까지 마루키(丸木) 부부에 의해서 그려진 「원폭도」 중 조선인 피폭자들을 그린 제14부 (1972)

    1950년부터 1982년까지 마루키(丸木) 부부에 의해서 그려진 「원폭도」 중 조선인 피폭자들을 그린 제14부 <까마귀>(1972)

    해방이라는 것이 그것을 위해 꼭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희생의 시스템이라면 그것을 해방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억압받는 사람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해방인가. 또 다시 재앙을 내릴 신을 달래기 위해 언제라도 제사장은 번제를 지낼 희생양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가장 마지막까지 시체가 남은 것은 조선인이었지. 일본인은 많이 살아남았는데, 조선인은 조금밖에 못 살아남았잖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시체가 모여 있는 장소에서 조선인은 알아. 살았을 때 처박혀 있었잖아. 일만 하고 기지도 서지도 못하게 해서.

    미쓰비시 병기에도 나가사키 제강에도 미쓰비시 전기에도 조선인은 왔었어. 중국인도 끌려 왔지. 원폭이 떨어진 후에 걸으려면 발로 걸어야 해서 좀체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가 없었는데, 까마귀는 제일 먼저 나가사키에 와서, 까마귀는 하늘을 날아 오잖아, 떼지어 왔지. 그리고 파리도. 그래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조선인들의 시체 머리의 눈을 까마귀가 와서 먹는 거야. 어디서 온 까마귀였는지, 엄청나게 왔어. 까마귀가 눈알을 뜯어먹어. 어어 하면서 보았더니 시체가 움직여. 움직이잖아! 잘 보니까 구더기가 움직이는 거였어.

    이것은 1968년에 발표된 조선인 피폭자의 증언 일부이다. 식민지 시기 부득이 내지에서 생활의 터전을 찾아야 했거나 징용 등으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린 조선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착취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민족은 해방되었지만 그들은 죽고 나서도 차별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원폭이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켰다면, 우리는 왜 민족차별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민족 해방의 은인으로 기리지 않는가.

    1950년부터 1982년까지 마루키(丸木) 부부에 의해서 그려진 「원폭도」 중 조선인 피폭자들을 그린 제14부 <까마귀>(1972)

    원폭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속설을 의심하는 순간,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천황의 종전 선언도, 해방군도, 피폭도 없는 진정한 해방.

    필자소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진보신당 당원,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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