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반은 사회운동, 절반은 정당"
    [세계 LGBT운동의 역사] 캐나다 '신민주당'과 LGBT 정치
    By 토리
        2013년 08월 19일 11: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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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나다 LGBT 정치에 관하여 3번의 연재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레디앙 편집장의 요청으로 캐나다 신민주당(New Demogratic Party)과 LGBT 운동과의 관계에 관해 추가적으로 한 꼭지 더 다루기로 하였다. 이 부분은 영국, 미국, 캐나다 3국의 LGBT 정치 기회 구조 사례와 LGBT 정치인을 비교 분석한 데이비드 레이사이드(David Rayside) 1998년 저서 <On the fringe: gays and lesbians in politics>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캐나다 최초의 커밍아웃한 정치인이자 7선에 달한 성공한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 스벤드 로빈슨을 다루고 있다. 스벤드 로빈슨의 사례는 신민주당 내 LGBT 정치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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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정치 시스템

    제도적 측면에서 캐나다의 정치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선 매우 분권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각 지방이 교육, 보건 정책, 주거 정책, 사회 복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이 나뉘어져 있다는 점은 캐나다의 분권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요소이다.

    다른 하나는 분권화된 정치 체제와 달리 일원화된 사법 체계이다. 각 지방 정부가 법무 행정을 관할하고 있더라도 연방 정부가 대부분의 법관을 임명한다. 사법 체계 외에도 연방 정부는 보건, 복지, 교육에서의 ‘국가 기준’을 수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캐나다의 권력은 집행 권력에 집중되어 있다. 입법부 다수로 구성된 행정부와 그 수반들은 개별 의원들에 대한 강한 통제력을 쥐고 있다. 당 대표의 결정권은 다른 무엇보다 높이 우선시되며 의원들은 정당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당대회에서 극히 평범한 역할만을 수행한다.

    정당 체계는 연방 수준인지, 지방 정부 수준인지에 따라 매우 다르다. 최근까지 캐나다 정당은 자유당(the Liberals)과 진보보수당(Progressive Consevatives, 소위 보수당)의 양대 정당에 의해 움직여 왔다.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신민주당(New Demogratic Party)는 오랜 기간 ‘제3정당’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민주당은 캐나다의 3개 정당 중 가장 오랫동안 여성과 소수자, 원주민 권리와 함께 LGBT 권리를 지켜온 정당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보수당이 신자유주의적 우익으로 변화하였고 자유당은 중도 좌파를 표방하였으나 최근 보수당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다. 1993년 선거는 보수당의 승리와 신민주당의 하락, 극우정당 개혁당과 퀘백당의 증가라는 특징을 보였다. 2011년 연방 선거에서 신민주당은 보수당에 이어 2위의 의석을 차지, 최초로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했다. 신민주당의 최근 성장은 퀘백 지역의 퀘백당 몰락과 신민주당 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캐나다 신민주당(NDP)

    캐나다 신민주당(NDP)는 1962년 협동연방당(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을 대체하고 재구성할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협동연방당은 가톨릭 좌파운동과 복음운동의 전통에 기대어 있는 반면 신민주당은 보다 세속적이고 대중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협동연합당을 이끌던 토미더글러스 서스캐처원 주 주지사가 신민주당 초대 당수로 취임했다.

    2005년 반전집회에 참여 중인 신민주당 당원들의 모습

    2005년 반전집회에 참여 중인 신민주당 당원들의 모습

    신민주당의 지지 기반은 주로 서부 캐나다에 위치해 있으며 1990년 온타리오 승리 이전까지 유일하게 신민주당 지방 정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대서양 지역의 동부 캐나다와 퀘백에서는 신민주당의 지지 기반이 약하거나 아예 없다시피 하다.

    신민주당은 캐나다의 가장 큰 노동조합과 연합체들과 공식 관계를 맺고 있으나 노동계급 유권자들의 다수 지지를 얻은 적은 없으며, 유럽의 좌파정당들처럼 산업노동계급의 규범이 지배적이지도 않다. 멤버 상당수는 다른 사회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신민주당을 ‘절반은 사회운동이면서 절반은 정당’이라고 바라본다.

    신민주당은 유럽의 좌파정당(특히 영국)보다 젠더, 인종, 성적 지향 등의 이슈를 빠르게 받아들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신민주당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게이 레즈비언 당 간부들 또한 LGBT 권리 강화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내고 있다. 신민주당의 경우 전통적 좌파정당에서 리버럴한 방향으로 변화를 겪어왔다고 평가 받는다.

    오늘날 신민주당은 과거 당의 메세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전달 벨트’에서 의회 외부 좌파운동의 메세지를 의회 내로 전달하는 ‘전달 벨트’로 바뀌었다고 얘기된다. 신민주당은 연방과 지방 수준 모두에서 게이 레즈비언 평등을 지지하며 이에 라이벌이 될 만한 정당은 퀘백당 뿐이다.

    비록 지방 수준의 방향과 연방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나 보수적인 지방에서도 신민주당 지역당 간부들의 게이 평등에 대한 지지는 다른 정당보다 매우 높았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유럽과 달리 정당이 시민사회 깊숙히 접근한 적이 없다. 또한 미국에서처럼 정당이 풀뿌리 수준에서 지역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풀뿌리 수준에서는 사회운동가들에게 정당은 매력적이지 못한 선택지이다. 신민주당 역시 다른 정당들처럼 풀뿌리 수준의 유권자 연합을 갖고 있으나, 보통 선거 시기에만 활동한다.

    선거 시기가 아닌 일상 네트워크들은 보통 사회운동그룹들이 접근하기 어려우며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흥미를 당기지 못한다. 또한, 연방 수준에서 신민주당은 집권한 경험이 없고 지방 수준에서도 신민주당이 집권한 지역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활동가들에게 자유당보다 나은 선택지라 여겨지기 어렵게끔 만든다.

    스벤드 로빈슨(Svend Robinson)의 경우

    스벤드 로빈슨은 자신을 조직 노동과 밀접한 연관을 유지하면서 1960년대 신사회운동과 연결하고자 하는 신민주당의 축으로 정체화하였다.

    스벤드 로빈슨이 커밍아웃한 정치인으로서, 혹은 동료 당 간부들과는 다른 종류의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벤쿠버 유권자들의 강한 지지와 버나비(Burnaby) 지역에서 신민주당이 보인 의회 외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는 버나비 지역 개별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활동과 노조 재판 변호 등을 통해 지지를 쌓아 나갔다. 커밍아웃은 로빈슨에게 정직과 원칙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고 유권자 기반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에 대한 지지는 ‘개인적’ 지지의 성격이 강했다.

    1998년 동성애 권리 옹호 집회에서의 스벤드 로빈슨의 모습

    1998년 동성애 권리 옹호 집회에서의 스벤드 로빈슨의 모습

    로빈슨은 처음에는 대외적 커밍아웃 없이 선출되었으며 그의 지역구(버나비)는 게이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었다. (외국의 경우 연방 수준에서 처음부터 커밍아웃하여 당선된 사례는 초기에는 없었다. 버나비 지역은 우리나라에는 ‘한인 밀집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그가 커밍아웃한 후 두번째 치룬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한 한인 정치인은 그를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흑색선전하기도 하였다.)

    로빈슨의 정치 경력은 정당 외부 운동이 아닌 정당 내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가족은 ‘베트남전을 지지할 수 없어서’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한 가족이었다. 버나비 지역 정치는 진보적이었지만, 가족과 섹슈얼리티 이슈에 있어서는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곳이었다. 가족 전체가 신민주당에 가입한 후 그는 신민주당 청소년 그룹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2년간 지역당 실무에 종사하였다.

    1977년 버나비 지역 신민주당 지명 레이스에 참여하고 첫 선거를 치루면서 그는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총장 폴린 쥬엣(Pauline Jewett)를 상대로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다. 로빈슨이 지명된 자리는 신민주당을 위한 자리로 보장된 것이었고 정당 지도부들은 쥬엣을 보다 선호하였으나 그는 풀뿌리 지지자들과 그룹들을 안심시키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27살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을 때 그는 결혼 후 이혼한 상태였고 극히 일부 외에는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로빈슨은 LGBT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공개적으로 커밍하지는 않았다. 로빈슨이 게이라는 루머는 두번째 선거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1988년 네번째 선거에서 그는 커밍아웃을 감행하였고 선거 내내 게이 반대 선전에 시달려야 했지만 더 큰 격차로 선거에 승리하면서 캐나다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국회의원이 되었다.

    캐나다 정치에서 소수자는 매우 주변화되어 있다. 캐나다에는 인종적 소수자 문제가 없다는 믿음이 오히려 정치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주변화시키는 요소이다. LGBT 문제에 있어서도 동성애는 유색인이나 여성보다는 보통 백인 남성으로 대표된다.(로빈슨이 커밍아웃한지 13년 후에야 최초로 신민주당 소속 레즈비언 국회의원이 커밍아웃하였다.)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백인 남성이란 요소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종적 소수자나 LGBT 등의 의제에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미디어의 주목을 한껏 받았다. 캐나다 인권헌장에 게이 레즈비언 차별 반대 내용을 삽입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것도 그였다. 로빈슨이 강하게 게이 레즈비언 권리를 옹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당의 지지 역시 중요했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미국의 민주당과 달리 신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LGBT 권익에 대한 반대가 표면화된 적이 없었다. 1989년 캐나다 최초로 연방 정당(신민주당) 여성 당 대표가 된 오드리 맥럴린(Audrey McLaughlin)의 한결 같은 지원과 지지 또한 중요했다.

    로빈슨은 다른 의원들과 달리 전국의 활동가들을 조직해 내었고 활동가 네트워크들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그의 사무소 스텝 멤버 역시 게이 레즈비언들을 기용했다.

    로빈슨의 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레즈비언 게이 당 간부들에 의해 중재되거나 하지 않고 로빈슨 자신이 직접 네트워크와 결합했다는 점이다. 연방 수준의 LGBT 가시성은 로빈슨만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신민주당 내부 LGBT 운동의 취약성은 오히려 로빈슨의 입지를 독보적으로 만들었고 로빈슨은 당 이미지에 갇히지 않으면서 당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신민주당이 연방 정부를 맡은 적이 없다는 점도 그의 이미지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

    로빈슨은 1995년 신민주당 당 대표에 도전하였다. 그는 당 외곽의 새로운 지지층, 급진적 신사회운동을 대표하는 이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고 ‘좌파’로 분류되었으며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는 노동조합 사전 투표에서 80%의 지지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전통 신민주당 주류였던 경쟁자와는 ‘좌파’ 대 ‘실용주의’ 혹은 ‘중도주의’ 구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선 1차에서 최다 득표를 한 후 경쟁 후보였던 알렉스 멕도노우(Alex McDonough)가 2위를 한 것을 보고 2차 투표를 하기 전에 그녀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는 신민주당 내 전통적 정당정치가 사회운동을 이긴 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반지 절도 사건으로 정계를 은퇴했지만 그의 의원석은 그의 스텝이자 최초로 커밍아웃 후 당선된 빌 식세이(William Siksay)에게 돌아갔다. 로빈슨의 사례는 커밍아웃 정치인으로서 당 대표 도전 이외에는 별반 당 내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좋은 평판을 얻어낸 사례로 얘기 된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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