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가족, 다섯 시선, 다섯 가지 빈곤
    [책소개] 『산체스네 아이들』(오스카 루이스/ 이매진)
        2013년 08월 17일 01: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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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뛰어넘어 빈곤의 맨얼굴을 바라보다

    서울에는 상계동 달동네가 있었다. 브라질에는 파벨라가 있다. 그리고 멕시코에는 베씬다드가 있었다. 모두 빈민가를 부르는 이름이다. 대륙을 뛰어넘어 몇 십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빈곤’은 그 얼굴만 조금씩 달리한 채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그 빈곤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책이 있다. ‘빈곤의 문화’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출한 20세기 빈민 연구의 역작이자 인류학의 고전, 《산체스네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책이 처음 한국에서 출간된 지 35년 만에 50주년 기념판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는 아내 루스 루이스와 함께 멕시코시티의 베씬다드(빈민가) 까사그란데에서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생애사를 4년에 걸쳐 치밀하게 인터뷰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다섯 명 가족의 날것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1인칭 서사로 옮겨냈다. 그 결과물은 방대한 양의 “소설과 인류학 논문의 중간 형태”라 부를 만한 독특한 책으로 탄생했다.

    특히 50주년 기념판에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책에 관해 보낸 편지와 나중에 오스카 루이스의 공동 연구자가 되는 수전 M. 릭든이 쓴 개정판 서문과 후기가 더해졌다. 릭든의 글은 《산체스네 아이들》의 작업 과정, 출간 과정과 ‘빈곤의 문화’ 개념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 그리고 산체스네 가족의 후일담을 자세히 담고 있다.

    산체스네 아이들

    50년을 가로질러 세기를 뛰어넘어, 빈곤의 증언자들이 들려주는 르포르타주

    《산체스네 아이들》은 1956년에 전통적인 인류학 현지 조사로 시작됐다. 시골에서 멕시코시티로 상경한 이농민들에 관한 추적 연구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베씬다드를 파악하는 작업 과정에서 산체스네 가족을 만나게 된 지 몇 달 안 돼, 오스카 루이스는 자신이 남달리 삶의 경험을 전달하는 관찰력과 입담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체스네 가족은 베씬다드인 까사그란데와 빠나데로스에 관한 3부작 중 첫 편 《다섯 가족》에서 다룬 가족들 중 하나로 처음 등장한다. 이 책은 녹취한 인터뷰 내용과 루이스 부부가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닷새 동안 다섯 가족의 일상을 다룬다. 그리고 《산체스네 아이들》은 그 첫 번째 후속 작업이었다.

    이 작업의 의도는 각 가족들의 온전한 전체 이야기를 자신들의 언어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오스카 루이스는 자신이 “민족지적 리얼리즘”이라 부른 이 작업에서 처음으로 여러 식구들 각자의 이야기를 겹치게 해 한 가족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해석 없이 들려주는 실험을 한다.

    처음에는 한 문단이 넘지 않는 서문만 덧붙인 1인칭 서사 형태로 발표할 생각도 했지만, 사회과학이 문학처럼 읽힌다면 독자들이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 더 큰 시야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래서 멕시코 빈민의 생활 전반에 관한 자세한 배경 지식을 담은 서문을 덧붙이고 ‘빈곤의 문화’라는 개념에 관해 자세히 서술했다.

    오스카 루이스의 서문을 제외하면 《산체스네 아이들》은 온전히 산체스네 가족의 목소리로 그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인류학적 생애사 연구의 진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오스카 루이스는 “만약 내가 창작을 해서 《산체스네 아이들》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다면 난 절대 인류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책의 문학성은 오직 산체스네 가족의 빼어난 말솜씨 덕분이라고 평했다.

    아버지 헤수스 산체스, 그리고 네 아이들인 마누엘, 로베르또, 꼰수엘로, 마르따는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부인을 넷, 자식을 15명이나 뒀는데도 그 모든 식구들을 다 먹여 살린 헤수스의 강인한 생활력,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결국 좌절하고 만 꼰수엘로의 인생, 도박에 빠져 일확천금을 꿈꾼 마누엘의 이야기 등을 읽어가는 사이 우리는 이 빈민들의 인생사 저편에 존재하는 사회 구조를 바라보게 된다.

    《산체스네 아이들》이 얼마나 생생하게 빈곤의 맨얼굴을 그려 보이고 있는지는 이 책의 출간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멕시코에서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멕시코 지리학 통계학협회는 법무부에 멕시코 정부와 멕시코 국민을 향한 외설과 명예 훼손 명목으로 형사 고발할 것을 청원했다. 이 책에 담긴 멕시코의 빈곤에 관한 자세한 묘사가 국가 질서를 위협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오스카 루이스가 해낸 작업, 그리고 산체스네 가족이 들려준 이야기가 지닌 커다란 힘을 보여준다.

    베씬다드에서 달동네까지, 다시 생각하는 빈곤의 문화

    “물론 멕시코는 발전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계속 노동자 노릇만 할 것이고, 계속 가난할 것이며, 죽을 때까지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헤수스 산체스는 이렇게 말한다. 50여 년 전 멕시코 빈민이 던진 이런 일갈에서 ‘멕시코’를 ‘한국’으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화려한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어쩌면 ‘달동네’는 우리 기억에서 잊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산체스네 아이들》은 일반적인 인류학 연구서가 줄 수 없는 독특한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전해준다. 기념비적 학술서이기에 앞서 사실주의 문학, 기록 문학이라고 불러야 할 이 책의 특징 덕분일 것이다. 《산체스네 아이들》은 처음 출간된 때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 빈곤이라는 문제와 빈민들의 문화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 아래 더욱 정교해진 빈곤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산체스네 가족의 거침없는 입담 속에서 우리는 빈곤의 사회적 조건, 구조의 문제, 그리고 빈민들의 욕망, 기대, 좌절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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