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 없던 노동자로서의 삶
    … 노조 조합원이 되다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3-4] 사람들의 삶에 '표본'은 없다
        2013년 08월 16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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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생애 구술사 김옥순 조합원 편 3회 기사 링크

    ***

    시다, 배달노동자, 미싱사, 청소노동자…

    (필자) 그렇게 계속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야쿠르트 아줌마도 하셨다 하셨잖아요. 언제부터 얼마동안 하신 거예요?

    (김옥순) 야쿠르트 한 삼년 했나. 다리 아파서 오래 못했어요. 그때 젊었어도 애들 가르친다고 너무 못 먹고, 지금 생각하면 영양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애. 그래서 그때는 저기 여상 앞에다가 수레를 세워놓고, 영천시장 그쪽에 침 잘 놓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잠깐 가서 침을 맞고 와서 또 그걸 돌리고 그랬는데…. 너무 그렇게 다리를 쓰니까 안 되겠어서, 다리 때문에 또 못하고. 에이구, 말도 못했지 뭐.

    (필자)그러면 야쿠르트일 삼 년쯤 하다가 그만두시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 하셨어요?

    (김옥순) 야쿠르트 하고 나서, 지하철을 들어갔나 봐요. 지하철 3호선 처음 준공 청소. 쪽지가 날아왔더라고. 그래서 그거를 찾아갔지. 가서 준공 청소를 하는데 여자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일자리가 귀한 터라. 거기 가서 준공 청소를 한 열흘 했나? 했는데, 이제 하고나니까, 집에 가 기다리라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집에 가서 기다리니까 어느 날 연락이 왔더라고요. 언제부터 출근하라 해서 했는데.

    그것도 한 삼 년 했을 거야. 하다가…하다가…어떻게 됐는지, 미싱 시다로 들어간 거야.

    (필자) 다시 공장으로 가신 거예요?

    (김옥순) 네,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지. 들어가서 시다를 한참 오래 하다가 미싱을 배웠어요. 시다는 십만 원이면 미싱사는 아무리 못해도 삼십 만원은 주거든. 기술자라고. 이놈의 시다는 힘은 더 들고, 미싱을 배워야지. 미싱을 내가 애초에 결혼할 때, 그 옛날에 발미싱 알아요? 집에 그거가 있었어. 근데 공장에 가서 보니까 있는 건 득득 밟으면 죽죽 나가는 거, 그런 거드만. 가정 미싱이 아니고. 그니깐 틈나는 대로 자꾸 해보고 해서 (공장에 있는) 미싱을 배워갖고, 미싱을 꽤 했어요.

    시다

    1970년대 평화시장 인근 한 봉제공장의 모습(경향신문 자료사진)

    근데 아들만 셋인데다가, 아저씨까지 넷이고, 여자는 나 혼자고, 중고등학교 가고, 도시락은 막 다섯 개씩 싸고, 세탁기도 없고, 오면 체육복이니 실내화니 빨래가 막 어마어마하고. 토요일도 없고 공장일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렇게 토요일 일요일날 애들 체육복, 애들 막 옷 다 빨아가야 되고. 실내화 빨아서 연탄불 말리고 미싱하러 가면은요, 미싱바늘 있는 데서요, 너무 힘이 드니까 별이 반짝반짝 해가지고 바늘귀가 안 보여. 체력이 딸려서. 나는 그때는 그걸 잘 몰랐어요. 근데 그걸 지금 생각하니까 그게 체력이 딸려서 그랬던 거야. 바늘귀가 쪼그마니까 잘 꿰야 되는데, 실이 또 끊어지면, 아이고 그냥, 별이 바늘귀 있는 데서 반짝반짝하니까, 못 꿰겠더라고…. 결국 미싱도 못했지 뭐. 힘들어서, 눈이 안 보여서. 미싱을 그만두고…음…그리고 나서는 청소를 다시 시작했던 것 같애, 눈이 안 보이니까.

    (필자) 지하철에서 청소하시고, 그 다음에도 또 청소를 하셨어요?

    (조합원) 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파출부 사무실을 갔구나. 왜 그러냐면 너무 힘드니까 좀 쉬어가며 한다고 생각해서…. 파출부 못하겠다 그랬었죠?

    파출부 사무실에 가면은 어디로 가라고 쪽지를 주거든. 그러면 고걸 보고 그날그날 찾아가요. 가서 그렇게 그날그날 찾아가는데. 아 그것도 못하겠더라고. 매일 찾아 가야 되는데…. 내가 서울 지리를 잘 몰라. 서울에 와서 한참 일은 했어도, 공장이면 공장 뭐 그렇게 갔지…. 저기 명동에나 이런 데는 잘 안 가봐서. 전화번호하고 주소 쪽지 딱 주면, 여기 가서 물으면 이리 가라, 저기 가서 물으면 저리 가라. 예를 들어서 여덟시까지 가야 되는데 막 시간은 촉박하고 가면 늦게 왔다 그러고 막.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 해야 되는 건데, 이 집 일 틀리고 저 집 일 틀리고 그러니까, 진짜 파출부는 못하겠더라고.

    그러다가 명동에 어느 짜장면 집엘 갔어요. 설거지만 한다 해서 갔거든. 근데 엄청 잘 되더라고 짜장면집이. 처음에는 설거지만 했지. 짜장면 삶은 뜨거운 물, 그 걸로. 그러면 손이 막 뜨겁고 땀이 나고…. 내가 얼굴이 지금 벌그런 이유도, 겨울에 야쿠르트 때 얼고 그런 데서 막 너무 굳고, 그런 모든 것이 포함된 것 같애. 그 막 배달 갔다 온 거, 뭐한 거, 아르바이트 애들이 갖다 놓으면 정신없이 해야 돼. 그러다 저기하면 저녁 준비도 해야 되고 정신없이 네 정신 내 정신 없이 눈이 퉁퉁 붓고 손도 퉁퉁 붓고, 그 뜨거운 데서 땀으로 목욕을 하고 나면은…. 헐 때는 그냥 헐 정신에 빨리 해야 되니까. 하고 나면 진짜 죽겄어. 그리고 나면 이만 원 줘요, 이만 원. 근데 돈은 많이 주는 거야 다른 데 비해서. 반찬도 사고 애들 노트 값도 주고 그러니까 그 재미로 하고 또 하고 했는데.

    나중에는 김치 같은 것도 다 담으라 하더라고. 오래 하니까. 처음에는 안 그러더니, 틈만 나면, 배추도 이렇게 갖다놓고. 내가 그런 거를 못 한다 안했어야 되는데, 나도 성격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게 낫지 눈치 보이고 그래서, 몸 사리고 이런 거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김치 담는 것도 같이 거들고…. 나중엔 너무 그것도 힘들어. 어쩔 때는 사장이 오면 한 삼천 원 더 줘. 너무 손님 많고 힘들고 그러면. 차 타고 가라고. 그땐 택시비도 싸지. 그러면 얼마나 좋은지. 그날은 힘든 지도 모르고, 다리가 거뿐거뿐하게 와. 그 돈 삼천 원 더 주면.

    근데 주방장이 곤조(성질)가 있어가지고 꼴보기 싫어 죽겠어. 빨리 했는데도 빨리 하라 그러고. 그런데 왜 그랬냐 하면은, 그 사람이 홀애비였어. 혼자 지내는…. 쉬는 날이면 자꾸 차를 한 잔 하자고 그러더라고. 나는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이도 적고. 농담인 줄 알았지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 시끼가 그거를 그냥, 나중엔 내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러니까 화가 났던가 봐요.

    (필자) 그런가 봐요, 자기는 조합원님이랑 차 한 잔 하고 싶었는데….

    (김옥순) 응, 우습게 본다는 생각을 했나봐. 그래서 내가 뭔 소리만 냈다 하면 지랄하고. 나중에는 경장히 그냥, 뵈기 싫더라고. 그래서 그만둬 버렸지(웃음).

    그리고 그런 집을 또 한집 알아보려고 그랬는데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럭저럭 파출부로 또 좀 다녔나봐. 그리고 나서 아파버렸지. 맞아요. 아팠어.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남편의 암투병으로 대학 청소노동을 시작

    (필자) 어디가 편찮으셨어요?

    (김옥순) 고생을 너무 했던지라, 어떻게 한번 아팠는데, 먹지를 못해버렸어. 병원에 가도 크게 저기도 없었고, 난 또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어요. 친구들이 문병을, 문 열고 싹 들어오면 놀라서 뒤로. 무서웠던가봐 내가. 그 정도로 뼈만 걸려서. 그렇게 아프기를, 한… 일 년도 넘게 아팠어. 못 먹고. 그래도 안 죽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금방 죽는다고 그러는데. 아우, 목숨 질겨요. 누워서 죽기만 기다리는 거지 뭐. 수술할 병도 아니고. 그랬는데 저기 벽제에 침을 잘 놓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그래서 거기엘 갔어. 그 할아버지가 이제 그걸 침으로, 침을 이렇게 긴 침으로 어떻게 하더라고. 침을 맞고 나서 정신이 없이 집에를 왔어요. 버스를 타고 와서 내리니까, 여기가 뻥, 뚫리는 거예요! 해서 이게 살 길이다 하고 거기를 열심히 다녔죠. 거기 다니면서 죽도 조금씩 먹고, 조금씩 기운이 차려지면서, 나았지.

     (필자) 그래서 다시 일하러 가셨어요?

    (김옥순) 그렇지(웃음).

    (필자) 좀 쉬시지….

    (김옥순) 아휴, 우리 집 양반도 옛날 양반이라. 애들도 다 커버리고 그러니깐…집에서 노는 것도…. 벌던 사람이, 그런 게 있어요. 남자들 처음에는 못 가게 해도, 벌어서 써 버릇하면 괜찮거든. 보탬이 되니까. 은근히 말 속에 그게 들어 있어요.

    (필자) 우리학교에서는 언제부터 어떻게 일하게 되셨어요?

    (김옥순) 우리 영감님이 구조조정 해가지고 떨어져서 저 서대문 경찰서 그 쪽에서 경비를 하시다가 갑자기 폐암 선고를 받아가지고 집에 계시게 됐어. 그래서 그때 벼룩시장을 보고 이화여대를 선택을 했지. 아저씨가 집에 계시면, 하루 종일 둘이 있으면 너무 지루하고 또 푼돈이라도…. 아저씨가 암이라니까 이제 갑자기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잖아. 진짜 돈이 있어야 구완을 하겠더라고. 먹을 것이나 모든 게. 그래서 그때 (오전반이) 삼십만 원인가…. 그렇더라고. 그거를 갖고 아저씨를 봉양을 한다는 걸로 벌러 왔지. 오전반으로 잠깐 벌어다가 아저씨하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도 해드리고 그래야지, 그래가지고 와서 벌다가…. 아저씨가 금방 돌아가셔버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죄가 많아요. 왜 그냐면 서울을 안 모시고 왔으면, 오래 살았을 건데. 서울에 오셔서 저렇게 일찍 돌아갔나. 시골에서 그냥 살았으면, 공기 좋은 데 살았으면 안 돌아가셨을 텐데….

    (필자) 그래도 아드님들 다 대학 가시고….

    (조합원) 그렇죠, 그렇죠. 내가 그거 하나는…. 시골에서 별스럽게 농사지어도 애들 대학 못 보내. 뭐냐 하면, 시골서 농사를 지으면, 일 년 통계를 내면, 그렇게 벌어도 서울에서 번 것이 나아요. 시골은 그때 당시…. 지금은 뭐뭐 부업 그런 걸 하지만은, 그때는 다 농사짓고…. 농사지은 거 팔아갖고는 애들 학비 대고 그러기 엄청 어려워요. 그렇게 수입을 따지면, 그래도 서울에서 번 것이 훨씬 낫겄어. 그래서 그거를 위안 삼아서…. 고생하는 거는 이왕 고생할라고 왔으니까.

    서울에 사는 게 나아, 고생을 해도. 우리가 만약에 농사짓고 살았으면요, 아무리 부업을 하고 했어도 애들 삼형제 다 대학 못 가르쳤을 것 같애.

    (필자) 아드님들 대학 가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조합원님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되게 기쁘셨을 것 같은데….

    (김옥순) 그러니까, 그 재미로 사는 거야 그 재미로. 솔직히. 옛날 양반들이라 서로 힘들고 그러니까. 부부간에 뭐. 우리집 양반은, 애들 졸업할 때도 옛날에 회식 같은 것도 없고 생전. 그렇게 안 해도 될 때도, 우리 둘이 어디 갔다가 볼일 보고 우리 밥 좀 사 먹고 갈까요, 그러면 그 돈 갖고 돼지고기 한 근만 사면 온 식구 배터지게 먹는데 뭔 놈의 밖에서 밥을 사먹고 가냐고. 그렇게 살았었는데.

    나는 그게 낙이었지 뭐. 솔직히. 영감하고는 그렇게 재미가 없었단 얘기야.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었고. 애들이 상 타오고. 어떻게 하고. 거기다 재미를 붙이고 그것에 보람을 느끼고 살았는데. 지금 살아보니까, 다 소용없어.

    (필자) 왜요? 궁금한 게….저 학교도 좀 있으면 졸업하고, 요즘 이런저런 생각이 많거든요. 말씀 들어보니까 조합원님은 일도 굉장히 많이 하시고, 열심히 사셨는데 어떤 힘으로 그렇게 사셨는지 궁금해요.

    (김옥순) 애들 잘 되는, 그런…. 지금도 애들이 아주 내 말이라면 껌벅해요. 그런 보람을 느끼고 그걸 힘을 갖고 살았지. 막 힘들고 지칠 때면 진짜 못 살겠다. 진짜 못 살겠다…. 애들이 와서 이렇게 있는 걸 보면은. 참 여자는 진짜 저기야. 그런 힘으로 살아요. 그러니까 나는,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남편 수발을 하고, 애들 수발하는 것 힘들고 귀찮고, 그런 것이 두려워서 혼자 사는지는 몰라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자식이 있어야지 힘이고…. 나이 먹을수록 자식이 힘인데.

    (필자) 그럼 아까 소용없다고 하신 건 무슨 뜻이었어요?(웃음)

    (김옥순) 소용없다고 한 그런 면도 많이 있죠.

    (필자) 어떤 때 그렇게 느끼셨어요?

    (김옥순) 아무리 내가 아파도,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엄마 많이 힘들어 아파? 이래도. 엄마 병원에 가보세요, 병원에 갑시다. 그런 건 저기해도, 대신 아파줄 순 없잖아, 애들이. 그리고 내가 만약에 외로워도, 괴로워도 애들이 대신 할 수 없지. 애들이 내 외로움을 가져갈 수가 없지. 즈그들도 즈그 자식들하고 살아야 되고. 지들 삶이 있고. 어려운 세상 헤쳐 나가려면 엄마한테만 신경 써도 안 되거든. 자기 가정이 중요한데.

    (필자) 말하자면 조합원님 인생은 조합원님만의 인생이다?

    (김옥순) 네, 허무하지. 허무해요. 솔직히…. 토요일 일요일 이틀 쉬면. 비가 오면 춥고, 몸도 안 좋고. 나갈 데도 없고. 애들도 이제 애들 나름대로 바쁘죠. 매주 올 수는 없잖아. 그러면 이제 혼자 이틀을 보낼 때, 내 인생은 내 인생이구나. 허무하고 좀…. 그래. 너무 자식들한테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 내 몸도 챙겨야 되겠어. 이런 허무감. 다 소용없어, 그럴 때도 있다, 그런 얘기예요. (웃음)

    “엄마는 앞장서지 말고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세요.”

    (필자) 그런데 말씀을 듣다보니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조합원님은 계속 일 잘한다고 인정도 받으시고, 일이 힘들어도 대체로 만족하셨던 것 같은데, 어쩌다 노조 일에 참여하시게 됐어요?

    (김옥순) 노조를 처음에는, 굉장히 싫어했어요. 첫째는, 성가실 것 같애. 자꾸만 어째라, 어째라. 모여라 그럴 것 같고. 또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것이. 학교서 미워할 것 같애. 하다가 찍혀갖고 잘리지는 않나, 그런 걱정도 하고.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니까…. 또 내가 나이가 젊으면은 본격적으로 탁 이렇게 하겄는데. 나이가 먹었는데 내가 하면 지금 얼마나 한다고 이런 것까지 해서 힘을 들여야 하나, 그랬는데. 그런데 또 학생들이 맨날 와서 들어앉아서 좋다고 하라고 그러니깐. 안 할 수도 없고.

    그랬는데 출범식을 한다고 그래서 가가지고 보니까 소장도 와서 서 있지, 총무과 사람들도 나와 있지, 다 나왔더라고. 비도 막 오고 그러는데…. 좀 눈치도 보이고 그랬는데 그냥 구경한다고 갔어. 처음에는 노조에 대해서 확실히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떻든 우리가 우리에 대해서 싸워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필요 반), 궁금 반, 해서 참석을 했는데. (노조 활동) 하는 아줌마들이 막 고맙다고. 난 솔직히 어떻게 하는 건가 구경하러 간 건데. 나와 줘서 고맙다고 이러니깐 (어느 새) 거기에 휩쓸려 있드만(웃음).

    그러다 보니 조금 인식이 되지. 아. 우리가 한 데 뭉쳐놓으면 우리를 감히 함부로 못 하겠구나. 어차피 그렇다면 협조해야 되겠다. 그래서 한다고 해서 오늘날까지 하는데, 진짜 솔직히 많이 성가시라. 아유, 얼마나 힘든지 몰라.

    이대청소

    2011년 이대 청소노동자 파업 모습(사진=공공서비스노조 서경지부)

    (필자) 그럼 처음에 거부감 같은 건 없으셨어요? 왜 저런 걸 하나, 그런 거요.

    (김옥순) 솔직히 될까? 속으로 그랬지. 글쎄, 그런다고 우리가 요구한다고 그게 이루어질까? 그랬는데 또 이루어지더라고. 그래서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야, 이거 뭐…. 무식한 사람이 싸우면 이긴다더니 우리가 그냥. 솔직히 그랬어, 나도. 더 잃을 것도 없고 뭐. 집에 가면 애들이 그러거든.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그러면. ‘어, 우리 노조했어. 나 광화문에 가서 한 길바닥에서 걸어가고 거기 자리 깔고 앉았다 왔다, 야.’ 그러면, ‘와, 우리 엄마 쎈데. 엄마 그런 데 맨 앞에 나서서 선동하지는 마세요.’ 그러면 ‘어, 그런 건 안 해. 그냥 따라 댕기기는 해도 그런 건 안 한다.’ 그럴 때 (속으로) ‘아, 그런 것도 선동하면 또 안 되는가’ 이러고.(웃음)

    자식들은 하지 마라 그래. ‘엄마, 엄마는 그냥 (노조) 들었어도 앞장서지 말고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세요.’ 그러면 그러지. ‘그러게, 나 아니어도 젊은 사람 많다, 말로는 그러지.’ 그런데 안할 수 있어, 내가 조장인데? 내가 빨간 조끼 입고 안 나서면 우리 식구들이 다 안 가버리는데. 본관 앞에 모여라 이러고 내가 나가야 따라 나오는데.

    (필자) 조합원님 사실 날이 아직도 많이 있으시잖아요. 앞으로는 뭘 해보고 싶다거나 그런 거 없으세요. 컴퓨터교실도 그래서 오신 거잖아요. 이제 나를 위해서 뭔가 해보고 싶다거나 그런 것 없으세요?

    (김옥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컴퓨터예요. 안 잊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도 내가 노력을 안 해. 파고들고 열심히 하면 그렇게까진 안 잊어버릴 텐데. 잊어버리는 게 참 속상하긴 하면서도 일단은 육체적으로 힘드니까. 컴퓨터 하는 것이 어렵긴 어렵더라고요. 컴퓨터라도 계속 잘 배워서 내가 진짜 칠십이 넘어 여기서 퇴직을 하면, 매일 어디 가서 논다는 것도 그렇고, 집에서 취미생활로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 보내고 재미있게, 내 평생에 공부한 거를 그거라도 위안삼아서 활용을 하고 싶은데, 이제 그거야. 따로 막 큰 바람은 없고, 내가 건강하면서 컴퓨터라도 계속 살려서, 이거를 활용을 하면서…. 저기하고 싶어요. 컴퓨터를 좀 잘 하고 싶어요.

    (필자) 제가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사실 많은데, 슬슬 마무리를 해야 되어서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조합원님은 저보다 인생 선배시잖아요. 저보다 오래 사셨고 경험도 많이 하셨고 하니까 저한테 이렇게 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 좋았다, 한 말씀 해주세요.

    (김옥순) 아니 내가 감히. 우리 선생님들은 지금 얼마나 현명하신데…. 이건 옛날 어른들 얘기하고 똑같은데. 살면서, 내가 살면서 남한테 조금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거나, 남을 둘러먹었다거나, 이러지 않았던 게 제일 보람인 것 같아요. 항상 남의 마음부터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다보면 내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맘이 편하고…. 그거는 일러주고 싶어. 누구한테나. 괜히 내가 조금 화난다고, 저 사람이 나한테 조금 저기했다고, 그 배로 갚아줄라고 막 그러지 말고. 그냥 저기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면, 그 사람을 원망하기 전에 내가 뭐가 잘못돼서 저 사람이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양보하고, 좀 져. 져. 너무 이길라 하지 말고. 내가 지다 보면은….

    (필자) 손해 본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김옥순) 나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집안에서고 자식이고 부모형제고, 나를 아직까지는 그래도 나쁘게 보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큰 재산인 것 같애요. 하다못해 친구라도 내가 뭘 저기하면 믿어주고, 옳다고 생각해주고. 내가 설사 거짓말을 해도,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인정해준다는 게 그게 큰 재산이에요. 뭐든지. 내가 나쁜 말을 했어도, 아니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해주는 게 나는 큰 재산이더라고.

    내가 고생하고 산 건, 다시 가라면 나 죽을래요. 나 그 길은 다시 못 갑니다 죽여주세요, 할 수 있어도…. 내가 누가 저기해서, 그 사람이 아이구 저 사람은 좋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새로 살으라도 난 그렇게 살겄다 이거지. 다시 내 세상을 살아도 나는 지금처럼 남한테 지고, 남한테 양보하고, 남을 위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제일 보람되게 산 것 같애. 난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보람 있었어.

    (필자) 감사합니다 조합원님, 정말 재미있었어요.

    (김옥순) 못났어, 한마디로 못났어.(웃음)

    구술생애사 연재를 마치며

    사실 우리가 처음 구술생애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어딘가에 이것을 연재할 계획은 없었다. 인터뷰를 다 끝내고,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어떤 식으로 만들지를 의논하던 중 간사에게서 <레디앙>에 연재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별로 티는 안 냈지만(?) 솔직히 기뻤다. 이 작업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면 훨씬 그 의미가 커지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항상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한다. 반면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과연, 성공한 사람들의 삶만이 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성공하는 법’을 제외하면 다른 이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일까? 물론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삶 또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 알려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이에게 표본이 되는 삶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타인의 삶이,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하나의 가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면, 김옥순 조합원의 인생을 접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내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인터뷰를 하며 느낀 것이 글을 통해 충실히 잘 전달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읽는 사람들에게도 김옥순 조합원의 이야기가 삶에서 어떤 한 가닥이 되었으면 한다.

    이 구술생애사는 김옥순 조합원의 이야기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기록자인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량 문제 때문에 내 마음대로 편집을 했을 뿐 아니라, 인터뷰라는 것 자체가 원래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해 조합원이 답을 하는 것이니만큼 질문을 선택한 내 의중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은, 졸업을 앞둔 대학생으로서의 관심사가 반영된 것이다. 어쩌면 김옥순 조합원은 내가 주목했던 부분보다 내가 묻지 않은 다른 것들을 인생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중심을 조합원에게 놓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서 조합원에게, 컴퓨터를 계속 배워 언젠가는 직접 자서전을 써볼 것을 권했다. 조합원은 웃으면서 내가 무슨 자서전이냐고 손을 내저었지만, 컴퓨터를 통해 글을 쓰시면 재미있지 않겠냐는 내 꼬드김(?)에 솔깃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 전부터 조합원은 워드 프로세서 쓰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조합원이 직접 쓴 생애사를 읽는 상상을 해본다. <끝>

    필자소개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생. 교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컴퓨터를 배우는 모임인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을 통해 구술생애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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