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차별'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그 구조
        2013년 08월 14일 02:05 오후

    Print Friendly

    제게는 오래전부터 관심사가 된 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비정규직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투쟁에 좀처럼 연대하려 하지 않는 정규직들의 머리 속에서 이와 같은 행위들은 도대체 어떻게, 어떤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는가, 라는 게 너무나 궁금해왔습니다.

    궁금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대체로 제가 익히 겪어보고, 직접 알고 직접 목격한 대부분의 차별들은, 어떤 “가시적 차이”를 이용하여 지배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차이 나는 타자를 배제하고 괴롭힌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에서 r소리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유대인이나, 일본에서 탁음발음 등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재일조선인, 노르웨이에서 피부가 “카무잡잡”하고 이름은 “이슬람식”으로 비추어지는 모든 이들 – 이들은 바로 “가시적 타자”들입니다.

    “가시적 타자”들에 대한 온갖 편견들의 역사가 하도 깊기에, 근대적 지배자들이 그 역사를 적당히 활용하여 “가시적 타자”에 대한 차별을 통해서 적절한 수준(?)의 분리통치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죠.

    종족적/종교적/문화권적 타자와 “차이”의 정도가 달라도, 젊은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도 아주 오랜 역사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어떤 “가시성”을 배경으로 합니다. 나이나 성별의 차이는 당장 눈에 띄는 것이지 않습니까?

    비정규직 차별은 “가시성”이 결여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성적으로 약간 다릅니다. 도대체 비정규직은 무엇인가요? 예컨대 학교 비정규직 교원은 정규직 교원과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레벨의 학위(박사)를 받고 같은 학술지에 글을 내고 같은 학회에 다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차이는? 필기계약 유무 및 무기한/유기한의 여부일 뿐. 그 차이는, 어디 이마에다가 낙인처럼 찍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대차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옆집에서 살고 초등학교부터 서로를 잘 알고 평소에 가족들끼리 잘 지내는 동갑내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차별적인 작업복을 벗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하고 술마시게 되면, 어느 쪽이 정규직이고 어느쪽이 비정규직인지 도대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통계적으로 봐서는 국내의 비정규직은 여성일 가능성, 나이가 조금 더 젊거나 아주 많을 가능성, 숙련도가 약간 낮을 가능성 등이 높고, 또 외국인 노동자라면 원칙상 “정규직”이 될 수 없습니다(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데도 나이/성별/외모, 아니 거주지까지 대략 비슷한 두 사람이 각각 “정규성”의 기준으로 나누어지고 한쪽이 다른 쪽을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차별을 행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이 흘러가고 있을까요?

    제 생각 같으면, 비정규직 차별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아주 대략적으로 “유사 전통적 이데올로기”와 근대적 차별주의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자는 전통사회의 적자/서자, 문중 내외, 문중 내 계통 등을 이어가는 거고, 후자는 대체로 박정희 시대의 “능력주의”를 계승하고, 더 깊게 들어가면 최남선 류의 “자조론”과 연결돼 있습니다. 일단 구체적 실례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죠.

    현대차의 정규직 노동자 대표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의 모습(사진=레프트21)

    현대차의 정규직 노동자 대표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의 모습(사진=레프트21)

    1.

    1997년 봄. 저는 국내의 모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 (계약직) 강사로 채용됩니다. 저는 그 때 제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계약기간(3년)이 끝나면 자동연장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단 근무 첫날에 저와 같은 해에 채용되고 같은 대학에서 같은 해에 최종학위를 받은 한 동료는 거의 반말투 비슷하게 하대(?)를 합니다.

    옆에 있는 한 나이 든 교수가 “이러시면 되느냐”고 말리자 그 동료는 본인이 무기한 계약, 즉 전임임을 밝히고 “저 친구”(저를 가리킴)는 3년짜리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렇게 자신감에 찬 ?) 정규직 분은 그 대학의 설립자의 아들인 그 당시 총장의 애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들을 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그로서는 머뭇거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문중 어르신의 직계”인 반면, 저 정도면 기껏해봐야 “틈입자”, “외래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다른 언어로 표현하자면 한 조폭 조직의 오야붕의 직계와 방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근대적 “보편적 이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건 아마도 “말이 안되는” 현상이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의 한 비결은 바로 이미 쓰레기가 다 된 온갖 “전통유산”들을 무제한 재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랫것”들이 함부러 목소리 내지 못하게 견제시키는 거죠.

    2.

    금년, 국내 한 유수 대학의 한 원로 선생님과의 대화.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따위를 아주 우스운 “사이비 평등주의”로 보십니다. “능력이 안되는 인간들까지” 왜 다 평생의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게을러져야 하는지를,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의 기준이 무엇인지 따져보면 “영어 발표/논문 작성 능력”부터 듭니다. 사실 이런 “고급 언어 구사력”은 적어도 70-80%는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출신성분”의 문제일 뿐입니다.

    유복한 강남 주택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수나 재벌임원, 고급공무원 등이 되는 부모와 함께 미국을 드나들고, 거기에서 일찍 살아보고 공부해보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한글논문보다 영어논문이 더 쉬울 수도 있거든요. 특히 그의 부모들이 그를 미국에서 공부하고 학위 받는 기간 동안 서포트할 능력(?)까지 있었다면요.

    그러니까 실질상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계급의 문제인데, 국내인 다수의 머리를 아직도 지배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적자생존적 “실력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면 된다”, “가난은 죄다”, “스스로를 돕는 자에게 하늘도 도와준다” (이는 육당의 <자조론>번역으로까지 소급되어지는 대목입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못하면 자업자득이지, 자기자신의 무능력부터 탓하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출세” 못한 모든 이들을 “무능력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골자입니다.

    “무능력자”라면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고, 착취해도 되고 차별해도 되니 정말 한국형 정글자본주의에 이 이데올로기는 안성맞춤입니다.

    그러니까 외모, 언어, 나이나 성별이 전혀 다르지 않아도 고용형태 하나로 이미 살인적 차별을 할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에 이미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완비돼 있습니다. 줄이 없고 빽이 없고 내부자가 못되는 “방계” 내지 “서자”격의 타자를 마음대로 배제하고 그 위에서 군림해도 되는 전근대적인 대가족주의, 문중주의 등에다가 박정희 식의 “무능력자 멸시”가 가미되어, 비정규직들을 “현대판 천민”으로 만들 만큼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죠.

    그렇다면 이 차별의 왕국이 영원할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비정규직들의 투쟁들은 대개 투쟁사업장 별로 산발적이며 다소 고립적이었고, 주로 각 사업장의 당면 문제 (정규직화 등)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비정규직들이 그들의 자자손손이 무한대로 비정규직이나 무직자로 고생하면서 이 지옥을 탈출할 하등의 기회를 가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기만 하면, 곳곳의 이 개별적 투쟁들은 하나의 커다란 “현대판 천민”들의 반란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대상물로만 있을 수 없고 언젠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 시점에서 “현대판 양민”, 즉 정규직들의 일부라도 제대로 연대해줄 수만 있다면, 이 나라의 모습은 결국 크게 바뀔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