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에서의 유신 반대 운동
    [파독광부 50년사] 정권과 정보부가 독일 한인사회 분열시켜<검정밥-21>
        2013년 08월 14일 01: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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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1월 21일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시행하여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제정한 후 민주주의를 짓밟고 무력으로서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영구집권의 야망을 노골화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군력으로 국민의 의사를 멸시한다는 것보다는 국민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려는 행위였다.

    나는 과거 이승만 경찰정권 당시 국민의 대변자라는 무리들로부터 주권을 가진 국민이 노예나 식민지의 민족이 당하는 탄압을 받은 것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러한 추호도 양심의 가책이 없던 독재자의 아성을 무너뜨렸던 4.19를 아직 피 속에 느끼고 있었다.

    민주화로 향하는 우리나라의 길을 막는 자는 대통령이든 군대든 국민의 원수요 국가의 적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에서 나는 15세기 이태리의 플로렌스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를 연상했다. 비록 그는 이상적인 국가는 사회를 함께 묶는 종교와, 공동체가 자진해서 지키는 법과, 외부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군대에 바탕을 둔 로마와 같은 공화국으로 보았으나, 이러한 체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도덕적인 이론을 배척하고 실제적인 힘과 세력으로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 즉 마키아벨리주의는 후세의 독재자들이 주장하는 정당성의 경전이 되었다. 나는 박정희의 행위에서 또 하나의 마키아벨리주의가 대두하는 것을 보았다.

    1974년 2월 초에 베를린 한인교회의 정하은 목사가 찾아왔다. 서독에서 유학생과 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공개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만들어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위하여 계속 투쟁하기로 결의하고 베를린에서도 함께 일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고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함께 공개 서명을 할 사람을 물색했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몇 명 더 구하려고 했지만 1967년 백림사건 이후로 정보부와 공관의 감시와 협박 아래에서 두려움과 함께 살아야 했던 그 당시의 한인사회의 정국이 아무에게나 가서 함께 서명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공개적으로 서명하고 나서겠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나는 학생 중에서 한 사람을 참가시키고 싶었지만 자유대학과 공대 학생들 중에 한 사람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베를린에서는 4명만 서명하기로 하고 윤이상 선생과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김복선 씨를 참가시키기로 결정한 후 나는 윤이상 선생을 찾아갔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의심스럽게 생각하셨으나 찾아온 내력의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함께 서명하셨다.

    내가 윤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아직까지 추운 날씨인데도 선생님은 정원에서 무궁화나무를 심고 계셨다. 무궁화를 심으시면서 기후가 추워서 그런지, 여기에는 무궁화가 그렇게 잘 피지 않는다고 하시며 고국을 그리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애국자를 보았다. 고국이 그리워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를 심으며 고국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그의 사상을 논하기 전에 그가 얼마나 내 조국을 사랑했는가를 논하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정하은 목사가 김복선 씨로부터 함께 서명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974년 3월 1일 삼일운동 55주년이 되는 날 전 독일에서 55명의 간호원, 광부, 학생, 목사, 실업인들이 함께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선언서’를 발표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74년 삼일절 독일에서의 유신반대 선언과 집회 모습

    74년 삼일절 독일에서의 유신반대 선언과 집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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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선언서

    I

    민주사회의 건설은 전 국민의 요청이며 민족사의 방향이다.

    일찍이 빼앗기고 억눌린 백성의 민생을 구하려던 동학혁명과, 박탈된 민족의 자주생존을 회복하려던 기미년 독립운동, 그리고 독재아래 짓밟힌 민권을 소생시킨 사월 학생혁명은 바로 인간의 존엄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주사회의 건설을 그 목표로 하였다.

    그럼에도 항상 피흘려 찾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다시금 빼앗기고, 양심과 정의를 주장하는 외침은 무참히 짓밟히었으며,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는 가련하게 상실되니, 이러한 역사의 악순환과 오늘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

    부정과 특혜로 살찐 특권층이 마음대로 치부와 사치를 자행하고 다수의 서민대중은 착취된 노동과 민생고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이 반민주적, 반사회적 현실을 초래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국민의 입과 귀를 강제로 틀어막고, 정당한 주권행사를 탄압하며,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깡그리 막아 놓음으로써 봉건적 절대권력을 혼자 거머쥔 채 민주사회 건설에 반역하고 있는 주동인물은 누구인가?

    동포여! 민주사회 건설의 동지여!

    사회구조의 모순과 국가의 위기를 철저히 인식하라!

    민족의 굴욕적인 예속이 다시 오기 전에, 국민이 영구히 한 독재자의 노예로 되기 전에, 수수 방관적 자세를 버리고 일어나서 이성과 양심을 거스린 독재의 무리들을 물리치자!

    빼앗긴 국민주권과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여 민족의 이념인 민주사회를 창건하는데 헌신하며 참여하자!

    II

    참된 민주사회의 건설은 현실의 철저한 비판과 분석을 통해 반민주적이며 반사회적인 요인을 찾아내고, 이를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박정권의 현 팟쇼적 독재체제가 바로 그것이라 단언한다.

    왜 그런가?

    첫째, 『10월 유신』은 민주사회의 반역이다.

    『10월 유신』은 탱크와 대포를 앞세워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불법으로 억압한 채 오직 개인의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의 기본이 되는 헌법을 제멋대로 고쳐버린 민주사회의 반역이다.

    박정권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낭비와 비능률과 불안정을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 실정에 맞지 않으니 『한국적 민주주의』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박정권이 그러면 언제 『서구식 민주주의』를 해 본 일이 있는가? 12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의 실질적인 권력을 독점한 채 헌법을 마음대로 바꾸며 혼자 지배하고서, 낭비와 비능률과 불안정만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남북통일을 위해 장기집권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유신을 한 지 일년도 못되어 남북대화의 길마저 중단되고 말았는가?

    국회의원은 임명제로 해 버리고, 국정감사는 폐지시켜 버리고, 사람은 영장도 없이 잡아 가두며, 대통령직은 영구 독재의 총통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란 말인가?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우리 국민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다.

    왜 차라리 『박씨 왕국(朴氏王國)』을 만들지 않았는가?

    박정희의 정치행로는 공약의 위반과 속임수의 연속이었다. 『군(軍)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던 5.16 혁명 공약은 휴지화 해 버리고, 자기 손으로 제정한 헌법의 삼선(三選) 금지조항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변칙 삭제했으며, 삼선 대통령 출마시 장충단 공원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이며, 후계자를 찾겠다』고 호소한 공약을 뒤엎고 영구집권 독재체제를 만든 그의 기만과 우롱에 국민이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외치는 지성인과 종교인, 학생들을 체포 감금하고, 정당하게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의 청원(請願)마저 팟쇼적 철권(鐵拳)으로 짓누른 독재자와 그의 『유신체제』는 국민의 이름으로 제거되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

    둘째, 극도의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에 책임을 져야 한다.

    주문같이 외어오던 박정권의 『경제성장』은 특혜를 입은 극소수의 대재벌에게만 엄청난 부(富)를 집중시켰고, 중소기업의 몰락과 서민생활의 빈궁화를 가져 왔다.

    수십억 불의 외국 빚을 들여다 불실기업(不實企業)을 만들어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국민생활의 실정과 공익을 무시한 사치성 소비산업을 도입해 낭비와 사치풍조만 조장했다.

    GNP는 높아졌고, 수출은 증대되고, 국민소득은 몇 배로 늘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대다수의 국민대중은 생계비가 안 되는 저소득으로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고, 실업자 빈민들은 슬럼지대에서 인간 이하의 비참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소수의 특수족은 『오적촌(五賊村)』을 이루고, 에스카레터 장치까지 한 수천만원의 호화주택에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박 정권이 약속한 근대화며 번영이었고, 이것을 위해 국민은 허리띠를 조르고 일해야 했는가? 이것이 국민총화며 국력배양인가?

    『중농정책(重農政策)』이다, 『농공병진(農工竝進)』이다, 구호를 외치고,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니 『풍요한 사회』를 선전하더니, 고도성장을 달리고 있다는 경제발전이 어째서 국민경제의 기본이 되는 식량과 연료문제도 해결 못하고 매년 수억불어치의 외국쌀을 빚으로 사다먹는 형편이 되었는가?

    생산량과 통화량, 물가지수와 실업자수의 경제통계를 한번도 정직하게 사실대로 발표한 적이 없고, 과시주의(誇示主義)와 전시효과 위주의 졸렬하고 불성실한 경제정책을 거듭해온 박 정권이 다시금 무슨 찬란한 용어를 쓰면서 사탕발림을 해도 이미 속을 대로 속은 국민은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외자도입과 금융특혜에 얽힌 어마어마한 부정과, 썩을 대로 썩은 특권층의 파렴치한 부패타락을 아는 국민은 국가민족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박 정권에게 더 이상 맡길 수 없다.

    셋째, 굴욕적 대일정책이 국민경제를 예속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박 정권의 이성을 잃은 경제정책과 굴욕적인 자세가 국민경제와 사회풍조를 점차 일본에 예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 부패와 무절제로 빚만 남기고 실패한 차관정책을 직접투자(直接投資)로 바꾸어 박 정권은 경제적 침략을 노리는 일본의 사양산업(斜陽産業)을 마구 끌어들이고 있다. 49%까지의 외국투자만 허용하던 그나마의 보호정책을 100%까지 투자하게 양보해주고, 민족산업의 파탄을 가져오게 했으며, 지배와 침략을 목적으로 들어오는 일본기업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 공업단지를 닦아주며, 더욱이 일본노동자의 1/4도 못되는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노동쟁의도 할 수 없게 만든 지극히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 국가 이익을 팔아먹고 있다.

    그나마 고갈되어가는 국내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몰인정한 경제동물(經濟動物)들이 단숨에 흡수해 버리지 않겠는가? 민족의 고혈을 빨아가는 경제적 식민정책을 모르는가, 벌써 잊었는가?

    중화학 공업이라는 미명하에 민족경제 성장과는 상관이 없는 일본의 공해산업(公害産業)을 들여와 조국의 강토를 못쓰게 더럽히고, 매판자본가들을 앞세워 국민경제를 일본경제권 속에 예속시킬 위기와 징조가 너무나 뚜렷하다.

    어느새 왜색(倭色)종교와 문화가 이토록 민족문화를 침식했고, 처녀들의 정조를 토산품(土産品)이라고 팔아먹는 망국적, 반민족적 퇴폐가 이 사회에 풍미(風靡)하게 되었는가?

    넷째, 잔인무도한 정보정치는 공포에 떨게 한다.

    오직 박 정권의 안보만을 위해 매수와 조직과 잔혹한 고문을 구사하며 온갖 비인도적 만행을 다하고 있는 정보조작은 국민의 양심을 마비시켰고, 민족의 의기(義氣)를 꺾었으며, 사회각계에 불신과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진리의 전당인 학원과 사회적 양심을 대변하는 언론을 온갖 악랄한 수단으로 질식시켰고, 민주적 신념을 가진 지성인과 정치인을 테러하였으며, 공갈 사취 밀수 등 사회악과 범죄에 기식(寄食)하면서, 세계여론에 의해『 마피아 단』이라고 규탄되고 있다.

    죄없는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끌고가 법도 인도적 양심도 존재치 않는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몽둥이로 치고, 불로 지지고, 불구를 만드는 마수(魔手)의 집단이 김대중(金大中)씨를 수은을 먹여 현해탄에 던지려 했고, 최종길(崔鍾吉)교수를 고문으로 죽게 하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국민은 혈세를 바쳐, 이같은 악의 떼들이 막대한 국가예산을 허비하게 하고 그리고 또 공포에 떨어야 하는가?

    III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양심마저 짓밟은 채 독재자가 영구집권의 아성(牙城)을 쌓기에 광분(狂奔)하는 오늘의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것도 후진국의 운명이러니』하며 체념(諦念)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언제는 별수 있었느냐?』며 자학(自虐)과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도 안되겠다.

    불의(不義)가 승리하고 독재가 참월(僭越)하는 이 오욕(汚辱)의 역사를 비굴하게 살다가 후대에까지 물려줄 것인가? 민족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민주시민의 이성과 양심을 테러하는 이 현실을 남의 일처럼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침묵이나 방관은 곧 현실에의 긍정이요 동조(同助)이다.

    국민이여! 민주사회 건설의 동지여!

    독재의 세뇌(洗腦)에서 벗어나 올바른 비판의식을 갖자!

    용기를 가지라! 힘을 모으라! 그리고 『독재정권아 물러가라』고 함성을 지르자!

    아무리 철면피의 독재자라도 줄지어 외치는 국민 전부를 옥(獄)에 가두고 혼자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민심(民心)의 기반을 잃고 우방국가들의 지탄을 받은 박 정권이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체제의 개혁이 없는 단순한 정권이나 인물만의 교체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구국(救國)을 빙자하여 일어날지도 모를 제 2의 군사(軍事)구테타를 우리는 철저히 경계한다. 그것은 항상 민주사회를 배반하며 권력탈취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올바른 민주사회는 국민대중이 주권을 회복하고, 사회대중이 이익(利益)을 대변하며, 국가와 사회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건설된다. 그리고 이것은 국민대중 스스로가 확고한 민주의식과 참여 정신을 통해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탄압과 방해를 무릅쓰고, 이국(異國)땅 한 모퉁이에서라도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토론의 광장(廣場)을 마련하며, 뜻을 같이하는 국내외 동포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의 대열(隊列)에 뭉치고저 한다.

    독재여, 물러가라! 동지들이여, 승리하라!

    1974년 3월 1일

    삼일운동 55주년의 날에

    서명인 (가나다 순)

    강돈구 (Tübingen) 강영란 (Rheinhausen) 강정숙 (München) 김길순 (Würzburg) 김득수 (Münster) 김복선 (Berlin) 김복희 (München) 김순환 (München) 김영한 (Heidelberg) 김종열 (Münster) 김원호 (München) 박대원 (Köln) 박소은 (Marburg) 박종대 (München) 배동인 (Köln) 배정석 (München) 서돈수 (Duisburg) 손덕수 (Göttingen) 송두율 (Münster) 송복자 (Münster) 송영배 (Tübingen) 양원차 (Gelsenkirchen) 오길남 (Kiel) 오대석 (Frankfurt/M) 오인탁 (Tübingen) 유충준 (Gelsenkirchen) 윤이상 (Berlin) 이민상 (Regensburg) 이보영 (Kiel) 이삼열 (Göttingen) 이승자 (Frankfurt/M) 이영빈 (München) 이영준 (Bochum) 이재형 (Hamburg) 이정의 (Berlin) 이준모 (Frankfurt/M) 이 지 (Marburg) 이지숙 (Göttingen) 이태수 (Göttingen) 이화선 (Frankfurt/M) 임신자 (Frankfurt/M) 임승철 (Rheinhausen) 임영희 (Duisburg) 임학자 (Tübingen) 임희길 (Frankfurt/M) 장성환 (Duisburg) 장행길 (Bottrop) 정정희 (Münster) 정하은 (Berlin) 천명윤 (Gelsenkirchen) 최두환 (Göttingen) 최순택 (Köln) 최승규 (Heidelberg) 홍종남 (München) 황능현 (Boc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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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선생의 생전 모습(사진=윤이상기념사업회)

    윤이상 선생의 생전 모습(사진=독일윤이상협회)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의 공개적인 반독재 운동이 일어났다. 베를린을 위시한 독일의 한인사회는 대사관의 압력과 협박에 의해 친정부파와 반정부파로 갈라졌고, 내가 다니던 교회도 영사관의 압력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나가는 교인들에 의해 반으로 줄어들었고, 베를린 공과대학 한인학생회도 없어지게 되었다. 1974년도의 학생회장직을 내가 맡았기 때문에 성명서 발표 이후에 학생회가 깨어지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영사관에서는 한국인이 독일 회사의 장학금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 이정의는 이북에서 돈을 받는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기 때문에 학생들 중에는 나와 함께 이야기하기를 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언서 발표와 동시에 우리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설립하고 동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민주인사와 애국자들이 호응해 왔고 회장에는 송두율 군이 선출되었다. 베를린에는 내가 책임을 맡았는데 많은 간호원과 시멘스 회사에서 일하는 기술공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베를린에는 자유대학교, 공과대학교 그리고 음악대학에 한국 유학생들이 모두 합쳐서 약 40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자유대학교에 다니는 김종한 군 외에는 아무도 나와 함께 민주운동의 첫 대열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내 나라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출세와 영리를 위하여 독재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썩어빠진 정신의 소유자들은 입을 벌려야 할 곳에 입을 다물었고, 똑똑히 보아야 할 곳에 눈을 가리고, 확실히 들어야 할 곳에 귀를 막고 있었다. 심지어 영사관에 찾아가서 알랑거리며 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자진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병실과 지하에서 밤낮으로 일에 시달리는 간호원과 광부들의 호응은 서독 전역에 민주운동을 할 수 있는 근원이 되었고 유럽 전역에도 퍼져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삼월 중순경에 서독에서 강돈구, 박대원, 송두율, 이삼열 군들이 베를린에 찾아왔다. 정치말만 나오면 뺑소니를 치는 베를린의 학생들을 보다가 이 젊은 동지들을 보고 사귀게 된 나는 기뻤다. 그들은 서독에서 민건회가 활발하게 진행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힘이 들고 압력이 심하더라도 굽히지 말고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서 싸우자는 약속과 격려를 했다.

    내가 살던 집 뒤쪽에 베를린 한인 가톨릭교회가 있었다.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코리나와 함께 거기에 놀러갔고 수녀도 코리나를 보면 귀여워했고 함께 놀았다. 민주운동이 일어난 후에 우리는 다시 갈 수 없게 되었다. 반독재, 반정권은 곧 반국가로 해석되었고 반국가적인 행위는 곧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는 것을 금지했다.

    민주건설과 반독재운동에 대한 출판물을 병원의 간호원 기숙사나 시멘스 기술공들에게 배포하러 가면 나를 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머리 속에 주입 받은 반공사상의 철두철미한 교육은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원인에 대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이성을 마비시켜 놓았다. 현 정권의 정치를 반대하는 사람은 곧 친공파로 낙인을 찍고 빨갱이로 몰아댔다.

    이와는 반대로 독일인의 호응은 아주 열렬했다. 그들은 비록 외국인이었으나 우리나라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고 재정적으로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들이 당한 국민을 우롱한 나치정권을 상기하면서 대한민국에 자기들이 당했던 것과 같은 독재정권이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을 걱정했다. 이러한 계기로 독일의 종교계통의 단체와 사회활동 단체와의 접촉이 잦아졌고 그들에게 한국을 소개할 기회도 많았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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