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 마음 튼튼한 노동자, 내 동생
    [어머니 이야기-16] 위 아들 셋보다 더 애틋한 막내 아들
        2013년 08월 13일 05: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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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글은 내 동생 은영일 이야기다. 내가 지금 49살이고 동생은 44살이다. 동생은 어릴 때 몸이 아팠다. 4살이 되도록 걷지를 못했다. 이 이야기는 지난번에 했다. 동생은 6살이 넘어도 어머니 젖을 먹었다. 나는 부러웠다. 하지만 동생은 어머니 젓을 빨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쳤다.

    “니 동생이 걷기만 하면 내가 만날 용돈을 준다고 했어. 그러더니 차차 걷더라.” 이렇게 어머니는 말을 했지만 동생은 나중에 커서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돈을 벌어서 먹고 싶은거 다 사먹는 거”라고 했다. 동생은 어머니가 형들과 차별을 했다고 한다. 소풍을 갈 때도 김밥을 잘 안 싸주고 계란프라이도 잘 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자기 것을 뺏어서 형들 주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니 아버지가 니 동생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었지. 니 동생은 그것을 무척 좋아했어.”

    아버지는 여름이면 우리 삼형제를 한 오토바이에 태워 집에서 가까운 교문리 왕숙천에 데리고 가서 물놀이를 했다. 버스 타면 30분이면 갈 길이지만 어릴 땐 아주 멀리 느껴졌다.

    내가 오토바이 맨 앞자리에 타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리에 타고 뒷자리에 큰형과 둘째형이 탔다. 동생은 어려서 같이 가지 못했다. 아마 동생은 그 일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몸이 불편하니 외톨이로 지내야 해서. 그래도 우리 삼형제는 동생을 늘 보살피려 했다.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이 부르면 바로 달려갔다. 둘째형은 먹을거리가 있으면 꼭 동생 준다고 챙겨왔다. 난 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 학과 공부를 시켜 보겠다고 사설독서실에 가서 비지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동생은 형들을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삶을 헤쳐 나가려 애썼다. 그렇게 형들에게도 부모에게도 말 못한 아픈 삶을 살았다. 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큰형이 꾸리고 있는 공장에서 일한다. 지금 28년째 일하고 있다.

    큰형 공장은 밀가루 같은 분말을 부어서 가구나 책상 끄트머리에 끼우는 플라스틱을 만든다. 동생은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있다. 지금은 비록 큰형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형제들 누구보다도 스스로 일을 하는 몸 마음 튼튼한 노동자가 되었다.

    큰형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큰형 편을 들지 않고 나서서 노동자 편을 들며 고쳐 나가려 애쓴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데모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큰형이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장장이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공장을 쓸고 닦는 것을 스스로 한다. 야간 일을 할 때 라면을 먹게 되면 누구를 시키지 않고 먼저 나서서 라면을 끊이고 설거지도 한다. 그렇게 해야 다른 직원들이 따라서 한다고 말을 하지만 천성이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고 언제나 스스로 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동생은 공부 취미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공고 야간에 들어갔다. 싸움도 많이 했다. “니 동생을 괴롭히는 얘들이 많았지. 그래도 영일이 선생님이 아주 좋았어. 그래서 영일이 결혼할 때는 꼭 연락하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안 계셨어.”

    동생은 몸이 불편하고 말도 어눌하게 해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하루는 야간 수업을 마치고 아현동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종로에서 차를 내려 빵집에 들렸다. 맥도날드 햄버거 집에서 먹을거리를 시켰다. 동생이 힘이 없어 식판을 받다가 떨어뜨렸다. 동생이 사과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서자 가게 주인은 문 밖으로 나와 소금을 뿌렸다.

    어머니는 동생을 키우면서 오냐오냐 하지 않고 보통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키웠다. 동생은 말한다. “내가 어릴 때 차별을 받고 자랐지만 엄마가 나를 강하게 키워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어릴 땐 내면의 설움이 많았지만 그게 사는 데 힘이 된 거죠.”

    “니 동생은 운전면허를 따려고 했지. 근데 병원 의사가 면허시험을 못 보게 하는 거야. 그래서 나랑 니 큰형이랑 영일이랑 병원을 마구 찾아다니면서 허락을 받았어. 니 동생이 시험을 쳤는데 두 번 보더니 ”엄마! 나 면허증 땄어!“ 그러는 거야.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저리 비켜 그랬지. 그랬더니 ”엄마는 내 말은 안 믿고“ 하면서 면허증을 보여 주는 거야. 난 면허증을 보고 깜짝 놀랐지.”

    운전면허 시험장 모습

    운전면허 시험장 모습

    어느 날 동생이 큰형에게 말했다. “형, 나 소원이 하나 있어.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려 보고 싶어.” 하지만 동생은 몸이 자유롭지 못해서 운전면허시험을 보려면 전공이 다른 의사 열 사람에게서 시험을 봐도 좋다는 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큰형과 어머니, 동생은 국립의료원에 가서 의사들을 찾아 나섰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시험을 봐도 좋다고 하는데 신경과 의사만은 동생이 반사 신경이 둔하다고 허락을 해 주지 않았다.

    큰형은 병원 문을 나서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래도 시험을 보는 자격조차 주지 않는 것은 너무 하다는 생각에 다시 그 의사에게 뛰어 들어갔다. 제발 시험만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의사 선생님! 지금은 팔 다리 없는 사람도 차를 고쳐서 운전을 하는 세상인데 내 동생은 팔 다리 멀쩡하게 다 있는데 왜 운전을 못 한다고 하십니까. 운전시험에 붙을지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험만이라도 한 번 보게 해 주세요.”

    동생은 영업용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면허시험을 볼 수 있었다. 동생은 딱 두 번 시험을 보고 면허증을 땄다. 나도 운전시험에 여섯 번이나 떨어져서 창피했는데 동생은 이렇듯 기술을 익히는 일에 재주가 있다. 공부 머리는 아니지만 장기, 바둑, 보울링, 검도 같은 것은 나 보다 훨씬 잘했다. 자동차 운전도 지금껏 큰 사고 나지 않고 잘하고 있다.

    “그렇게 운전면허를 따서 기뻤지. 근데 니 동생 취미가 뭔지 아냐! 차 바꾸는 거다. 조금 타다가 새 차 사고 또 조금 타다가 새 차 산다. 지금 차를 네 번인가 바꿨지.”

    차를 바꿀 때 큰형이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동생은 차종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했다. 자기가 돈을 벌어서 차를 샀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중국에 큰애 친구가 있어서 그곳에 공장을 차렸어. 전화요금도 많이 나오고 사업이 잘 됐어. 그랬더니 중국 사람들이 그걸 먹으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다시 한국에 왔지. 그곳에서 일하던 중국 사람들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일을 했지. 그 식구 가운데 아가씨가 있었어. 니 동생하고 어떠냐고 해서 보니까 소띠고 괜찮다고 하고 그 아이도 니 동생이 괜찮다고 해서 결혼을 한 거야.”

    “그런데 그 얘가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민수 나이 4살 때 집을 나가고 내가 키우고 있지. 잘 먹지 않아 걱정이지만 공부는 잘한다. 도둑질 말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민수를 잘 키워야지. 너희들도 민수 클 때 많이 도와야 한다. 지(너희) 자식들만 끼고 살지 말고.”

    우리 집은 누군가 태어나는 날이면 부모님 집에 다 모인다. 다른 이는 몰라도 지금 12살인 은영일 아들 민수가 귀 빠진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와야 한다. 엄마 없이 외롭게 자라는 조카를 보면 가슴이 많이 아프다. 아이 아버지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어머니는 동생 병이 낫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동생 병을 고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머지 위로 형 셋은 먹을거리도 못 먹고 공부도 못 시키고 길에 나 앉을 판이었다. 아무튼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하신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숨 막히는 더위가 하루하루 이어지는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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