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하여
    - '기본소득론' 비판②
        2013년 08월 13일 0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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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해 비판 글을 보내왔다. 남종석씨는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논리이고 경제학적으로도 성립하기 힘든 몽상적 유토피아주의라고 비판한다. 글을 2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의 반론에 대해서도 환영하며 상호 비판과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하여 – 기본소득 비판 ① 기사 링크

    ***

    8.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계승?

    앞의 글에서 간략히 밝혔듯이 곽노완 교수는 자신의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자 마르크스의 이상이었던 코뮌주의를 실천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정당화 한다. 필자는 여기서 곽노완 교수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코뮌주의 체제의 분배원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당연히 사회주의를 어떤 도달해야할 모델이라기보다 현실의 운동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 간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의 상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체제가 어떨 것인가에 대해 그 어떤 구체적인 상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것은 노동자연합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 노동에 대한 자기 소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필자는 아래에서 곽노완 교수의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이고자 한다. 곽노완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굳이 비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입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곽노완 교수는 마르크스가 노동자계급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곽노완 교수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로소득, 투기소득을 추구하는 집단이 사회적 부를 가져가니 95%의 인구가 수탈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증적인 증거도 매우 취약하다. 예컨대 경제활동인구가 아닌 청소년, 대학생, 노인층을 보자. 이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빈곤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왜 유한계급에게 수탈당하는가?

    수탈이란 개념은 착취를 넘어서는 재생산 자체를 파괴하면서 이루어지는 부의 약탈이다. 수탈을 당하려면 순부가가치의 증가에 기여하거나 자산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토대마저 붕괴될 만큼 착취 받거나 순부의 유출을 경험하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

    노인층이든 장애인이든, 청소년이든, 실업자이든 이들은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빈곤층이 곧 수탈 당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개인들이 어떻게 수탈 당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불평등으로 고통을 받거나 빈곤한 존재들을 곧바로 수탈 받는 자로 규정하는 것은 곽노완 교수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과학적으로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인구의 95%가 수탈당한다고 함으로써 95% 내부의 계층적 차이를 전혀 사고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소득 8분위나 9분위, 심지어 10분위에 속하는 계층의 구성원들이 무슨 수탈을 당하는가? 이들 상당수는 곽노완 교수가 스스로 불로소득이라고 칭한 자산소득, 지대소득 추구자인데 말이다. 곽노완 교수는 불로소득 추구자가 수탈의 주체라고 했는데, 그의 분류법이라면 고임금 노동자 상당수는 자산소득(주식, 주택 등) 추구자라는 점에서 수탈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으로 계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곽노완 교수의 주장처럼 마르크스가 자본-임노동 관계만을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요소로 인해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적 관계를 절대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윤소영 선생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기획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란 생산관계 내부의 적대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적대를 분석함으로써 변혁을 새롭게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는 자본-임노동의 적대만이 아니라 남성-여성의 성적 적대, 인종간-민족간 적대도 존재한다. 이런 적대의 구조는 착취체제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착취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이런 사회적 적대를 중층적으로 인식함으로써 해방의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간다는 전략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사회적 관계의 유물론이다. 사회적 모순에 기초하여 변혁적 주체를 사고한다. 남성-여성의 성적 적대는 가부장제라는 구체적인 물질적 장치에 토대를 두고 재생산 된다.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하는 것도 생산관계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변혁주체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억압이나 착취를 당하는 집합적 존재이다. 모순에 토대를 둔 저항주체의 구성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주체인 것이다.

    곽노완 교수처럼 인구의 95%는 수탈당한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하고선 이들이 모두 사회적 변혁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주장에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곽노완 교수가 제기하는 이행론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종의 연기금 사회주의다. 국가가 축적하고 있는 연기금으로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합법적 이행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곽노완 교수의 주체이론이다. 그는 95%의 대중들이 수탈당하고 이들이 변혁주체가 된다고 했다. 인구의 95%가 수탈을 당한다는 그의 주장도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이지만 수탈당하는 개인들이 곧바로 변혁주체가 된다는 것도 기이한 주장이기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변혁과정에서 수탈당하는 대중들의 역할이란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정당에게 표를 주고 지지하는 것이 전부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정책이고, 정책의 주체는 권력을 잡은 정당이다. 대중들은 기본소득의 혜택을 보는 대가로 더 강력하게 이 정책을 추진하는 정당을 지원, 지지하면 된다. 이 프레임에서는 계급투쟁이 정책의 실현문제로 대체되고 정치의 주체는 집권정당이 되며 대중들은 유권자일 뿐이다. 국유화의 주체도 정부이다.

    이런 변혁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한다고 곧바로 그들이 변혁주체가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체는 급진적 이데올로기와 해후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자계급이 변혁주체인 것은 그들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사회운동에 동참하며 자주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과정을 거칠 수 있는 집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도, 다른 사회적 주체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특정 정책을 지지하거나 기본소득 캠페인에 동참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그들은 변혁주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대중일 뿐인 것이다.

    사진은 옛 사회당 홈페이지

    사진은 옛 사회당 홈페이지

    9. 나오며

    복지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복지 수요가 증대했을 때 매력적인 복지공약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희들이 이런 저런 복지 정책을 실현하겠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지지해 주세요’라고. 특히 경제위기 이후 팍팍해진 대중들의 삶 속에서 이런 복지 공약이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도 추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론도 근본적인 프레임은 다르지 않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청년실업의 증대, 노인층의 빈곤, 장애인 가구, 여성가장의 가족들의 힘든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방안으로 기본소득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주장한다. 대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지지를 받기에도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론은 훨씬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이다. 적어도 주장 자체는 그렇다. 그들은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는 더 올라갈 것이고 이를 토대로 사회체제의 이행조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요구투쟁일 뿐만 아니라 이행강령이기도 하며 코뮌주의 체제의 운영원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이 주장의 실현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사회적 재앙만 더 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 이것은 노동자운동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이 주장에 대해 윤종희·박상현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모두 기존의 노동자운동이 노동 중심주의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윤종희·박상현, “2007-09년 금융위기 논쟁 비판”,[2007-2009년 금융위기 논쟁], p.153, 공감)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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