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
    - ‘기본소득론’ 비판 ①
        2013년 08월 12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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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해 비판 글을 보내왔다. 남종석씨는 기본소득론이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논리이고 경제학적으로도 성립하기 힘든 몽상적 유토피아주의라고 비판한다. 글을 2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의 반론에 대해서도 환영하며 상호 비판과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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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지동맹으로부터 기본소득까지

    최근 몇 년간 한국 진보주의는 ‘복지동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복지 확대를 강조해 왔다.이들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복지의 확대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복지공약은 진보주의자들의 득표 전략에서도 핵심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에 이르기까지 복지 공약은 진보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구호가 된 것이다.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로 기염을 토했고 이들이 공약으로 내세운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은 우파정부에서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은 사실 잘못된 표현이다. 복지는 정부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시장에서 재화를 공동구매해서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유상급식 유상보육’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무상보육을 탈상품화한 재화라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재화나 복지 서비스의 공급은 여전히 사적 기업이나 개인사업자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을 생각해보면 이는 쉽게 이해가 된다. 정부는 단지 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여 시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일 뿐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결국 시민이다. 단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은 누진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소득수준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낼 뿐이다.

    복지가 무상이든 유상이든 한국 사회에서 복지동맹은 강화일로에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더 높은 수준의 복지 공급을 공약함으로써 더 많은 지지를 확보하려 하고, 복지연구자들은 실질적으로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선량한 의도에서 다양한 복지 의제를 다루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캠페인, ‘노령연금 현실화’, ‘반값 등록금’ 등 계층별, 세대별 요구를 복지공약으로 내세워 지지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민생을 챙기려 하고, 우파정부 또한 복지공약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한다. 가장 왼쪽의 급진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복지공급을 강조한다. 가히 복지동맹의 시대라 할 만하다.

    물론 이런 주장들의 ‘정치적 올바름’과는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이 내걸고 있는 복지공급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심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복지 공급의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무엇 무엇을 하겠다’라고 외쳤지만 어떻게 그것을 실현가능하도록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대부분의 복지주의자들은 한국의 복지모델을 유럽에서 찾는다. 그러다가 유럽 경제가 붕괴되자 이제는 북유럽에서 그 모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독일과 같은 나라들은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고 남유럽/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하고 있기 때문에 견고한 복지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더불어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결여한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재정위기로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기본소득론은 범람하는 복지동맹의 가장 최신 버전이자 가장 급진적인 버전이다. 기본소득론의 핵심은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개인들에게 정부가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인연금과 같은 공적 급여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기본’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노동을 하는 이들은 노동소득과 기본소득을 향유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기본소득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모든 시민들에게 충분한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복지담론이다. 아니 기본소득론은 급진적인 복지담론일 뿐만 아니라 이행론이자 새로운 사회체제의 이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론은 복지담론을 훨씬 초과한다.

    이 글은 기본소득론에 대한 비판이다. 기본소득론은 학계에서도 얼마간 논쟁이 되었지만 이는 결코 학계의 논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내가 속한 노동당의 한 분파는 기본소득 쟁취를 전면적으로 내걸고 있다. 최근 노동당 부대표 장석준 동지 역시 [프레시안] 기고문 “케인즈도 마르크스도 모든 사람에게 100만원”이라는 기고문에서 기본소득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장 부대표의 이런 행보는 기본소득론 자체가 노동당 내부의 의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기본소득론이 학계뿐만 아니라 좌파정치 내부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본소득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성도 없으며, 심지어 실현되었을 때조차 한국경제의 지속가능성을 파괴시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곽노완 교수의 글을 핵심 텍스트로 하여 기본소득론을 검토한다. 곽노완 교수는 국내에서 기본소득론을 정력적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기본소득: 급진적 복지담론이자 이행론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학교: 해방적 기본소득의 현실적 비전]에서 기본소득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그의 코뮌주의를 능동적으로 계승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착취 당하는 노동자계급만 혁명적인 계급으로 보았지만 오늘날은 착취 당하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수탈 당하는 95%의 시민들 모두 반자본주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한다. 95%의 시민에 속하는 이들은 실업자, 도시빈민, 영세자영업자, 장애인, 대다수 노령층 등 인구 대다수이다.(82쪽)

    그에 따르면 이들은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을 가져가는 지배계급에게 수탈 당하는 존재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배제된 자들의 수탈로 인한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이들의 변혁성을 기각하고 협소한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도 노동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하에서의 분배원리를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 간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듯 노동에 따른 분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노동 중심에 갇혀 있다. 곽노완 교수에 따르면 기본소득론은 노동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코뮌주의에 조응하는 자유로운 인간형을 창출할 수 있다고 한다.[143쪽]

    그에 따르면 21세기의 대안적 경제모델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노동유인을 만들되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과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필요에 따른 분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개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곽노완 교수는 이것이 진정한 코뮌주의적 삶이라고 설명한다.

    곽노완 교수의 기본소득론은 한편으로 이행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코뮌주의 체제의 재생산논리이기도 하다. 이행론의 측면은 다음과 같다. 좌파들이 기본소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이는 좌파집권의 지름길이 된다. 집권 이후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대중의 확고한 지지기반 하에 은행을 국유화하고, 은행의 기업대출을 증권화하고 연기금을 통해 주요 기업들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들 기업들을 국유화 한다는 것이다.

    국유화 이후 이자소득과 배당소득, 투기소득 등 불로소득을 모두 국가로 환수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착취와 배제를 사실상 종결시킬 수 있다고 한다. 곽노완 교수는 이런 소득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제공되는 기본소득과 구별하기 위해 사회연대소득이라고 개념화 한다. 현존하는 시장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착취와 배제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이행론보다 훨씬 실현가능성이 높은 변혁전략이라는 것이다.[73쪽]

    2010년 기본소득 관련 국제회의 모습(사진=참세상)

    2010년 기본소득 관련 국제회의 모습(사진=참세상)

    3. 연기금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

    곽노완 교수의 이행론은 이행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제위기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시한다. 그의 이행론에서는 어떤 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연기금 사회주의 측면만 살펴보자. 그는 앞에서도 썼듯이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통해 기업들의 국유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한국의 자산시장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국채시장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국과 같은 주식시장은 근본적으로 취약하다. 국채시장에 토대를 둔 통화정책이 운용될 수 있을 때 주식시장은 안정화되는 것이다. 한국 주식시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을 반영한다.

    더군다나 한국은 세계에서 개방화의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환율변동의 위기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는 국가이다. 원화의 폭력적인 평가절하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가계부채와 정부부채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회다. 위기의 구조가 다방면에 존재한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연금 등 연기금으로 대기업 주식을 전부 매입하고 이를 토대로 이자와 배당을 금지시켜버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외국자본은 이탈할 것이고 한국 주식시장은 붕괴될 것이다. 배당과 이자 때문에 국내시장에 들어왔는데 그것들을 제거해버리면 어떤 투자자들이 남아 있겠는가?

    현재와 같이 주식이 시가평가제로 회계처리가 되는 상황에서 주식시장의 붕괴는 자산가치의 폭락을 초래하고 부채가 자산보다 더 많게 됨으로써 기업 파산을 촉진할 수 있다. 1997년 한국은 이 상황을 경험했다.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이 보유하는 자산은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리고 연금 기반은 붕괴해 버린다.

    곽노완 교수는 이런 비판에 대해 연금이 없어도 국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이윤에 토대를 둔 배당, 이자소득을 배분하면 된다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주식시장이 붕괴하면 기업의 자산가치가 부채보다 작아지기 때문에 그런 기업은 파산해 버린다. 이런 기업은 영업 이윤이 마이너스다. 이자와 배당의 토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연금체계가 붕괴되면서 노인들에 대한 연금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연기금 사회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현재 축적된 국민연금을 모두 주식시장에 투자해서 기업들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만큼 위험천만한 발상인 것이다. 경제위기를 그렇게 강조하는 좌파들이 주식시장의 붕괴 가능성을 전혀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주식의 유상매입을 통한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도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조차 경제위기 국면에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파산한 기업을 국유화 한다. 미국 경제를 상징하던 자동차회사 GM이나 미국국제금융그룹(AIG)도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화 했다. 정부가 투여한 공적자금을 보통주로 전환하여 정부가 다수지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유화는 사회주의적인 조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국유화 자체가 사회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1인당 600만원씩 나누어 주자고?

    곽노완 교수은 자본주의 하에서도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민가처분소득 가운데 노동소득은 그대로 유지하고 소위 불로소득 부분에 과세함으로써 300조 가량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강남훈 선생은 최근 [녹색평론]과의 토론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가처분소득에서 국민조세 분담률을 현재 25%에서 서구 국가들처럼 50%로 확대하면 300조 가량 신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담 :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녹색평론 131]호 : 이하 대담)

    현재 한국은 300조 가량 세금이 거둬지는데, 300조 정도 추가로 세입을 확대해도 경제적인 안정화를 이루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국민 각자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면 산술적으로 개인당 600만원,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세와 같은 수단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현가능성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강남훈 선생이 예로 들고 있듯이 서유럽 국가들 상당수는 국민총생산 대비 조세분담률이 50%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의 조세는 대부분 법인세, 간접세, 개인소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개인소득은 노동소득과 이자, 배당이 포함되어 있다. 곽노완 선생이 주장하듯이 이자, 배당, 투기소득에 토대를 둔 과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들 국가에서는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을 개인들에게 현금으로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니다. 유럽의 복지지출은 철저하게 노동유인, 노동생산성에 토대를 두고 진행되고 있다. 실업급여는 노동시장에 참여해야만 받을 수 있다. 교육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에 현물급여로 제공된다. 연금 또한 근본적으로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두고 제공되는 것이다. 노동시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복지가 제공되는 것이다.

    경제위기 하에서 이조차도 재정적자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더불어 유럽의 경우 복지 공급은 재정위기를 감안하여 계층적 차이에 토대를 두고 있고, 노동규율을 유지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개인들의 선택을 매우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정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의 소비를 확대시킴으로써 성장을 추동하는 전략과 맞물려 있다. 고소득자들의 부를 빼앗아와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계층이 소비하도록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금 급여는 노동시장 유인을 매우 약화시킬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4인가구당 모든 계층이 월 240만원의 현금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이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물론 더 많은 소득을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저소득층은 저임금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비정규직이거나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여가를 선택해도 4인가구당 200만원을 받을 수 있는데, 무엇하러 인격적 모독과 고된 노동, 자유시간의 부재, 저임금을 참으며 노동을 선택하겠는가? 일하지 않아도 가구소득이 200만원이나 된다면, 최소한 노동소득은 이것보다 몇 배 더 높아야 노동시장 유인 요소가 된다. 이것이 노동경제학의 기본적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저임금을 통해 유지되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자영업은 거의 소멸된다.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국민총생산은 줄어들고 불로소득자, 기본소득 수혜자들만 늘어날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올라가지 않는 상태에서 가파른 임금상승은 지속적인 이윤압박을 발생시킨다.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업들은 영업을 지속할 수 있지만 한국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나 자영업자들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 자본의 역외유출이나 폐업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경쟁력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이다.

    당연히 경제는 축소되고 조세기반은 붕괴되며 국민총소득은 지속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자와 배당을 제거해버리면 투자유인도 사라진다. 당연히 한국 경제의 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지속가능성은커녕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 즉 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뿐이다.

    5. 기본소득이 역동적이라고?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의 역동성으로 나의 비판에 대해 답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역동성에 대한 곽노완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이 풍족해져서 좀 힘드는 경제적인 노동을 절반으로 줄인다고 가정하면, 쉽게 이야기 해서 GDP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거죠, 그러면 기본소득의 재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이듬 해에는 기본소득도 종래의 절반밖에 못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정도의 기본소득을 가지고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GDP가 증가하고 기본소득의 재원도 늘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역동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죠”[대담]

    이 주장이 경제적 현실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GDP가 반으로 줄어들면, 즉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그 회복기간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붕괴된 경제가 균형 상태로 돌아오려면 수년간의 고통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IMF 경험이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더군다나 균형의 회복과정에는 피를 깎는 구조조정이 유발된다는 점이다.

    곽노완 선생은 이런 문제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 한 해 전에 GDP가 반 토막 났는데, 그 다음 해에 균형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경제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만 있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이다. 더군다나 한 번 파괴된 경제가 곧바로 균형을 회복한다는 주장은 ‘균형의 안정성’을 논하는 신고전파도 주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공황은 이윤율의 장기적 성장국면과 맞물려 미국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을 통해 극복된 사례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일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 돌아오니 곧바로 GDP가 정상으로 회복된다는 주장은 소설로서도 감히 쓸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기본소득론을 가장 열정적으로 주장했던 구 사회당의 기본소득 홍보물

    기본소득론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구 사회당의 기본소득 홍보물

    6. 화폐주조차익의 활용?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도 핵심적인 쟁점이다. 곽노완 선생은 근본적으로는, 연기금으로 기업들을 국유화해서 이 기업들의 이윤에 토대를 둔 이자와 배당 소득 및 토지세와 같은 불로소득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자와 배당 소득을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재원 마련 방안을 제안한다. 기본소득을 할 의지만 있다면 재원 마련 방안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깜짝 놀랄만한 재원 마련 방안들을 한번 들어보자.

    “화폐를 국가가 한국은행을 통해 발행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화폐주조차익이 있지 않습니까? 그중 최소한 20~30%라도 기본소득 재원으로 할 수 있죠. 100억원을 발행하면 중앙은행의 자산, 이자, 부채로 잡힙니다. 그런데 이 부채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구성원 누구도 갚으라고 하지 않아요. 사실상 국민 모두의 순 자산이나 마찬가지지요…..(여기에 강남훈 선생이 덧붙인다: 필자) 미국은 무역적자를 달러를 찍어 메우고 있어요. 만약 유엔 같은 데서 국제화폐를 만들었다면 6000억 달러 정도를 찍으면, 60억 인구에게 100달러의 기본소득을 줄 수 있는 거지요.”[대담]

    화폐주조차익이라는 것은 최근 미국이 양적완화를 하면서 이슈화된 주제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달러발권이익이라고 한다. 달러발권이익이란 100달러짜리 슈퍼노트 한 장을 찍는데 만약 5달러의 비용이 든다면, 95달러의 신규 구매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어 구매력을 창출하고 있기도 하다. 곽노완 선생은 이런 현실을 두고 미국이 세계를 대상으로 수탈을 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주장한다.(곽노완, “달러지배체제의 위기와 21세기 코뮌주의한국경제 비전”, [진보평론] 28호)

    미국이 달러발권이익을 활용하듯이 우리도 재원 확보를 위해 화폐발행차익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헤게모니 화폐로서의 달러와 원화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달러가 발권이익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달러가 세계화폐이기 때문이다. 달러는 세계화폐이기 때문에 가치는 변동하지 않는다. 모든 국민화폐는 달러와 비교하여 환율이 표시되지만 달러는 그 자체가 세계경제의 본위화폐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러는 환율 폭락이나 폭등이 없다. 달러에 대비해서 엔이나 유로 가치가 변동할 뿐이다.

    달러는 세계화폐이기 때문에 가치가 안정화되어 있고, 그로 인해 가장 안정된 자산투자의 대상이 된다. 미국 경제가 붕괴직전까지 간 2008년에조차 달러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수출달러나 서아시아의 오일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메워주는 이유이다. 양적완화를 위해 최근 달러를 찍어낸 것도 역시 달러의 이런 지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달러조차도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다. 달러는 곽노완 선생이 쓰고 있듯이 미국 연준의 부채이다. 그러나 연준은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연준의 달러 발행은 궁극적으로 재무부의 조세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세기반이 해체되면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도 상실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달러의 발권이익도 사라져 버린다. 달러의 구매력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지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달러발권이익을 통해 달러가치를 인하시켜 수출경쟁력의 회복과 중국에 대한 채무를 줄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조차도 임의적으로 달러를 발행할 수 없는 것이다. 당장 화폐 공급량 증대로 인플레이션 조세 논쟁을 촉발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화는 세계화폐도 아니고 발권이익을 향유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원화의 발행을 통해 발권이익을 노린다면 곧바로 원화에 대한 투매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이는 환율의 폭등으로 귀결될 것이다.

    더군다나 원화가치의 폭락은 주식시장의 붕괴도 유발할 수 있다. 원화는 매우 취약한 화폐로서 외국 자본의 유인할 어떤 매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 자본을 유인할 수 있는 매력은 한국 기업들의 이윤이거나 신흥시장으로서의 주식시장이지 원화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권이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곽노완 선생의 주장은 화폐를 단지 교환수단의 상징물로만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격 표준으로서의 국민화폐가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 교환수단의 상징물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화폐는 단지 교환수단이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금과 같은 상품화폐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지만 중앙은행권은 국가의 지불능력, 보다 정확히 말해 국가의 조세체계에 기반을 두고 발행되는 것이다.

    원화의 가치도 한국 정부의 조세기반을 토대로 발행되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가 부채이지만 누구도 갚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곽노완 교수의 주장은 화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남훈 선생이 세계화폐를 언급하는 것도 전혀 적절하지 않다. 세계정부가 있어 세계로부터 조세를 거둘 수 있다면 몰라도 그런 기능이 없는 상태에서 세계화폐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인 것이다.

    7. 국영카드사는 어떤가?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 재원마련 수단으로 국영카드사를 설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카드수수료를 없애면, 자영업자들이 현금을 받던 것을 카드로 받게 되며 세금에서 누락되는 것을 조세 수입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에 대하여 4탄” [딴지 일보])

    영세자영업자들이 카드 수수료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카드를 받지 않고 현금을 받고자 하는 것은 카드수수료 때문이 아니라 카드를 받게 되면 매출액이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영 카드회사를 만드나 그렇지 않으나 똑같다. 국영카드사가 카드 수수료를 받지 않아도 탈세를 위해 현금으로 받기 때문에 세금 누락은 여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 경제의 초보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국영카드회사라니! 카드는 일종의 소매대출이다. 원래 은행은 도매대출, 그러니까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가 은행에 대한 통제를 주장할 때 주요 산업의 관리와 성장이라는 전략적 차원을 고려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불어 은행은 통화정책, 경제정책의 전달 수단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가 은행소유지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드사는 카드 수수료, 카드 이자로 돈을 버는 거래중개 금융기관이다. 자체적으로 예금을 받아 도매 대출을 하는 기업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돈을 대신 갚아주고 고이자율을 받는 중개금융기관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관들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어떤 이도 주장하지 않는다. 국영 카드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국가가 일종의 약탈적 소매대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최근 은행의 겸업화와 함께 은행들이 신용카드 발행을 직접 하거나 자회사를 두어 적극적으로 카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영업이 아니라 기형적인 것으로 은행의 본업으로부터 분리시켜야할 대상이지 정부가 나서서 카드사를 차릴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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