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에서의 첫 인연들
    [파독광부 50년사] 딸의 유치원과 내가 가입한 학생연맹<검정밥-20>
        2013년 08월 01일 05:0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0월 초순에 베를린으로 갔다. 우선 혼자 가서 거기에서 집을 구하는 대로 아내와 딸이 따라오기로 결정했다. 아는 사람들의 주선으로 우선 간호원 기숙사에서 살다가 다음 달에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이라기보다 부엌과 화장실이 달린 단칸방이었다. 옛날 집에 화장실이 바깥 층계에 있지 않고, 집 안에 있는 것이 기뻤으나 욕실은 없었다. 방이 뒤쪽에 있는 옆 건물의 맨 아래층이어서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으나 우선 방을 구하기 힘든 베를린에서 방을 구했다는 기쁨에 아내를 오라고 했다.

    십일월 말에 아내와 코리나가 베를린으로 왔다. 내가 구해 놓은 집을 보고는 아내는 너무 한심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첫날 저녁에는 아내를 위로하고 설득하느라고 온갖 애를 다 썼다.

    실제로 베를린에 집을 구하기가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아내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츰 살아가면서 집을 옮기기로 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코리나의 유치원과 아내의 직장이었다.

    베를린에는 아이들에 대한 ‘비폭력 비강제 교육’의 실시운동이 부모들 사이에 일어나서 <부모-아이 모임>이라는 부모들이 스스로 경영하는 유치원 같은 것이 있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 벗어나서 아이들의 개인 인격을 존중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산 교육을, 강제와 폭력행위 없이 시행하기로 결정한 부모들의 보수사회에 대한 반항이었다. 나는 코리나를 그러한 유치원에 넣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에 그러한 유치원이 있었다. 나는 코리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열 명 가까운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청년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 청년이 일어나서 우리에게로 왔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온 사유를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도 호기심이 나서 우리를 둘러싸고 그 청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청년이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이 아버지 동무가 자기의 딸 동무를 우리 <모임>에 넣으려고 왔다. 동무들의 의견은 어떠냐?”

    그 순간 나는 코리나의 손을 잡았고, 그 청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 유치원을 나왔다. 나는 베를린의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이렇게 사상적으로 노골화되어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사상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을 헌법에 규정했다. 사상은 누구에게서 강요되거나 마약처럼 누구의 의도에 의하여 습관화되어서도 안된다.

    사상은 개인의 결정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척도에 비추어진 사회의 정의를 현실화시켜 표현하는 데 있다. 참된 인간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내가 가진 사상을 말하고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것도 판단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다른 형태의 강요이며 폭행이다.

    이러한 교육을 오용할 권리는 부모된 우리에게는 없다. 지배계급이 없는 사회의 평등은 민주사상이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소위 말단 층까지 뿌리를 내렸을 때, 그리고 이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와 의무를 분명하게 지각해서 지배계급을 떨치고 나올 수 있는 자주성을 가지고, 국가의 권리는 국민에 의하고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자신할 때에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평등을 통해 오게 된다.

    어떤 주의이건 사상이건 이것이 위로부터 주입되거나 강요될 때는 이것은 독재이지, 민주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권력층의 농락 밖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은 개개인의 사상이 공동분모를 이룸으로서 공동성을 가지고 현실화될 수 있지만 공동체제가 될 수는 없다. 사상은 개인의 자유로서 보장되고 또 활용되어야 한다. 나는 꼭두각시를 만드는 유치원이 싫었다. 그래서 코리나를 맡길 수 있는 곳을 계속 찾고 있었다.

    우연히 학교 동기의 소개로 버스로 한 이십 분 가야 하는 곳에 유치원을 찾아서 코리나를 거기로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이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베를린 원로회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집세와 잡비를 충당했고, 보모의 월급과 경영비는 부모들이 각각 월수입의 십분의 일을 내어서 감당했다.

    점심은 유치원에서 끓였는데, 밥하는 일은 부모들이 매일 돌아가며 맡았다. 내가 밥을 할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대학교 식당에 가서 먹였다. 버스를 타고 대학교 식당에 가서 대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아이들에겐 어떤 모험 같아서 내가 당번차례를 맡으면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폭력적, 강제적, 보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비폭력 비강제적의 교육이 목표인 아이들을 대하는 나는 행동하는데 불안한 점이 많았다.

    하루는 한 아이가 붉은 신호등인데 길을 건너가려는 순간 내가 곧장 목덜미를 잡아챘다. 때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화를 낸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가 길을 건너는 순간 아마 내 자신이 더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는 차를 보고 눈앞이 아찔했고 차를 운전하던 사람은 급부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아이의 뒤를 쫓아가서 목덜미를 잡는 동시에 뒤로 낚아챈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경악할 정도로 고함을 치며 나무랐다.

    필자의 시대가 아닌, 최근 베를린 유치원의 풍경

    필자의 시대가 아닌, 최근 베를린 유치원의 풍경

    주말에 열린 부모들의 회의에서 그 문제가 토론되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내 자신이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아이를 경악하게 만든 것을 사과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나의 경우에 있었더라면 당신들은 어떻게 처신했겠는가 물었다.

    내 행위의 변호이면서 또한 나는 경험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배우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의견과 내 행동에 대한 찬반이 나왔는데 결론적으론 이러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쓸 만한 대책을 얻지 못한 채 헤어졌다.

    모두 아이들을 하나 둘 가진 젊은 사람들로서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폭력 비강제적 교육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보면 ‘무책임 무관심적 교육’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폭력 비강제적 교육은 한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이것을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이 교육제도의 결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결점이 있어도 보수적인 유치원보다 아이들의 개성을 살리기에는 이러한 아이와 부모들 모임이 낫다고 보고 코리나를 계속 거기로 보냈다. 물론 코리나의 의사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학생연맹에 가입하다.

    베를린에서 광산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두 약 20명 되었다. 광산과의 독일학생들의 약 삼분의 이가 학생연맹(Burschenschaft)에 가입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광산학도에게 대해서 친절하게 우의를 베풀었고 또 학생연맹은 회원들의 기숙사에서 관리하는 도서클럽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클럽에서 지난 학기의 시험문제집을 배부했기 때문에 내가 자료구입 문제로 도서클럽에 갔더니 그들이 나를 연맹회원 모임에 초대했다. 내가 처음으로 학생연맹에 초대받아 참가한 것은 광산학과에 적을 둔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

    독일의 학생연맹은 1815년에 처음으로 창설된 후 곧 전국에 퍼지게 되어 1817년에는 전 독일 대학생의 모임이 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서적과 상징을 불태우자는 연설 및 경제와 교회의 단일화, 법의 단일화, 헌법에 의거한 왕권 상속, 언론의 자유, 법 앞에서 만민의 평등과 같은 주장들은 정부의 의심을 초래하게 되어 1819년 독일연방의회는 학생연맹이 “선동적인 운동체” 라는 낙인을 찍고 금지시킴으로서 학생연맹은 비밀단체로 지하조직 운동으로 들어갔고, 1834-36년 사이에 근 200명의 학생들이 국가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어 1840년대에는 학생연맹회원이 적극적인 정치운동에 참여했고,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참여는 1848/49년의 독일연방의회 회원 중 거의 150명이 전(前)학생연맹의 회원들로 구성됨으로써 국가정치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1850년 중엽에는 학생연맹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은 해제되었고 학생연맹은 1871년에 다시 통일된 모습을 나타내었다.

    나치정권이 집권함으로서 1934년 이래 여러 연맹단체가 이리저리 합치고 헤어지면서 이차 대전 후 1950년에 독일학생연맹이 재탄생했다. 요즈음에는 이 학생회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특성 때문에 우익단체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학생들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광산학과의 학생연맹은 칼을 가지고 결투를 시행하는 연맹으로서 무엇보다 회원 사이의 우의가 중요시된다고 했다. 회원끼리는 나이와 직위의 차별 없이 존대어를 쓰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도 존대어 없이 형제와 같이 대화했고 이것은 나중에 직장생활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사장과 신입사원이 같은 연맹의 회원일 경우에는 형제와 같게 대한다고 했다.

    요즈음 시행하는 결투(칼싸움)는 무술에 능통해야 하는 일반적인 개인간의 결투와는 달리 교육적인 목적으로 회원이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결투 수(數)가 규정되어 있으며 독일에서는 이제 다만 형식적이다.

    결투 자체는 결투를 주관하는 심판 외에 결투자 각자가 지정한 입회인과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심판이 정해준 간격에서 위험한 상처에 대비하기 위해서 응급치료에 필요한 의료기구를 준비해두고 결투용 안경을 착용한 후에 칼로 상대편을 내리치는 형식이다. 찌르거나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곧게 서서 칼 잡은 팔만 움직여서 각 네 번씩 때리는 행위가 40 내지 60 합이 지나면 끝난다. 그 전에 한 사람이 부상을 입거나 혹은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결투를 끝낼 수 있다.

    결투는 1850년 경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1933년까지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나치정권 때에는 벌이 없어졌다. 이 면죄법은 다시 1946년에 취소되었다.

    그러나 민법상으로는 학생연맹의 결투가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 아님으로 상해(傷害)나 일반적인 결투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한다. 가톨릭 교회법에 의하면 결투가 위험한 상처를 내지 않을 경우와 사생을 결단하는 준비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위법으로 취급하지 않지만 윤리신학적으로 죄로 인정한다.

    스위스 법에는 결투가 위법으로서 5년의 감옥형이 내려지나 다만 결투자들이 생명의 위험에 대한 모든 대책을 준비했을 경우에는 구류에 한한다.

    내가 베를린 공과대학교 광산학과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생연맹에 처음 참석하는 날에 모든 회원들이 광산제복을 입고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검정-빨강-노랑 색의 넓은 리본을 걸치고, 칼을 차고, 창이 없는 반 모자를 쓴 채 두 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내가 한 친구의 안내를 받아 그들의 사이로 지나가니 모두 칼을 빼어 위로 치켜 올리며 경례를 했다. 일차적으로 내 이름과 가족사항을 소개하고는 비록 내가 외국인으로 회원이 아니지만 광산의 동료로서 생명을 같이하는 전우임으로 앞으로는 정회원과 조금도 차별 없이 모든 도움과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과 우의를 가꾸는 데 노력할 것을 서로 간에 맹세했다.

    그 다음에는 정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 소개가 있었다. 개인 소개의 진행이 재미있었다. 모든 회원이 두 줄로 나누어서 서로 마주보고 섰다. 두 줄의 간격은 약 2m 정도 되었는데 줄의 가운데에 마루바닥에 우리의 술잔이 놓아졌다.

    맨 오른쪽에 선 사람부터 한 사람씩 한 걸음 앞으로 썩 나서서 몸을 굽혀서 마루바닥에 있는 가득 찬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자기 이름과 별명을 말하고는 꼿꼿이 선 채로 술잔을 비운 후 그 빈 술잔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그가 있던 대열에 다시 들어가 섰다. 독일에 도착한 날부터 특수한 날 이외에는 의식적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좀 힘이 들었지만 나도 그들이 하는 대로 내 술잔을 비웠다. 이러한 순서가 자꾸 계속되었다.

    세 번째 차례에는 술잔을 잡으려던 사람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차례가 점점 많아질수록 앞으로 곤두박질을 하거나 술잔을 잡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회원 중 세 명이 쓰러지면 교감(校監)이 오늘의 행사는 이것으로 끝낸다고 발표했다.

    교감의 말이 떨어지자 아무도 계속 술주정하는 사람 없이 정답게 남은 술잔을 비우고는 술자리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러한 학생연맹의 친교자리에 함께 참석함으로서 독일 학생들의 다른 얼굴을 본 듯 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