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찰, 의심하라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데카르트『성찰』과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2013년 07월 29일 04: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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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사진을 보시라. 왼쪽에는 나치 게쉬타포 군복을 입은 장교의 깐깐한 얼굴이 있다. 맨 오른쪽에는 순하디 순한 구멍가게 아저씨의 온화한 미소가 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 법정에 성직자처럼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가 서 있다. 사진은 세 장이지만 모두 동일 인물이다. 이 사람의 죄목은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악’이라고 한다. 오늘 ‘의심'(doubt)에 대해 몇 자 남기려 한다.

    응1

    데카르트는 “생각[의심]하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했지. 칸트는 “존재는 행동하는 것이다(To be is to do)”라는 투의 글을 썼지. 니체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해야 존재하는 것이다(To do is to be)“라는 생각이고,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였던 스테판 에셀 翁은 “분노해야 존재하는 것이다(Indignez-Vous)”란 말을 남겼다.

    존재하는 방법도, 존재론도 가지 가지다. 인문학 정신은 돈 버는 성공학이 아니다. 인문학의 시발점은 의심하고 행동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1.

    데카르트『성찰』을 내 수업에 들어오는 귀한 학생들과 읽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이전까지 비판이나 의심보다는 일방적인 암기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 『성찰』, 특히 ‘제1성찰,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를 읽는 순간은 국정교과서식 모범생들에게 대단히 귀한 체험이다.

    성찰

    데카르트의 ‘성찰’ 타이틀 페이지

    이단이나 독재 혹은 몰이념을 한번쯤 비판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맹목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거짓신앙 거짓민주주의의 몰모트가 되기 쉬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들에게 한 마디로 명령한다.

    “의심하라”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존재의 참/거짓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감각마저도 철저하게 의심해야 한다고 썼다. 우리가 참된 것들이라 간주해온 것들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해선 안 된다고 데카르트는 썼다. ‘이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처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의심하자고 한다.

    “감각은 때로 틀리는 것이므로 믿을 수 없고 내가 지금 여기서 윗도리를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증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의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스럽다고 해서 멀리 할 수는 있으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감각도 의심하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롯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감각으로부터 왔음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참이므로, 감각은 의심해도 감각을 의심하는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하는 근본원리가 확립되고 이 확실성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이 도출된다. 나는 의심하고 있으므로 존재한다.

    신증명_사본

    비록 꿈 속에서 머리를 움직여 보는 것과 두 손을 뻗어 본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꿈 속에서 보이는 것은 상(image)과 같아 참된 것만 그려질 수 있다. 꿈에서 허구적이고 거짓된, 새로운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 상을 구상하는 색깔만은 참된 것이다. 즉, 일반적인 것이 거짓되다 하더라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은 참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안락한 휴식 다음에 오는 저 고통스런 각성이 나를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때 나는 앞에서 언급한 풀리지 않는 난국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의심하는 행위가 오히려 데카르트 자신을 덫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염려도 했다. 『성찰』의 머리말을 보면, 신을 믿지 않으면 마녀로 생사람을 죽일 수 있는 종교권력을 데카르트가 의식하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만든 신은 권력을 위한 신이었다. 데카르트는 그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런다 해도 의심은 필요하다고 썼다. “의심하라” 이 말은 몰이성적 맹목신앙만 강요했던 중세신학에 대한 인간 이성의 독립선언이었다.

    데카르트는 신이 아주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속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모든 외적인 요소를 섣불리 믿지 않고 실제로는 그 어떠한 감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고, 거짓된 것과 속임에 넘어가지 말라 했다.

    2.

    차분하고 매력적인 여성 한나 아렌트는 “사람은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저항해야 한다”며 악에 저항하며 의심했다. 데카르트를 분석하며 그녀도 모든 고정관념을 의심하라(『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3)고 권한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던 그녀가 본 것은 “생각하지 않는 죄, 의심하지 않는 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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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

    1960년은 아렌트의 삶에 획을 긋는 해였다. 그 해에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 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정권의 이인자였던 아히히만은 유대인 학살의 임무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던 아히히만은 체포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졌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사람들은 아이히만에게서 ‘짐승’의 모습을 기대했다. 평범한 사람은 그런 악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심리이다. 나랑 전혀 다른 괴물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을 ‘괴물’로 만들어놓고, 그를 비난하면서 내 안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싶은 치졸한 무의식이 구경꾼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놀랍게도 평범한 가장이었고 자상한 남편이었다. 깔깔거리며 가족과 함께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성실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또한 직장에서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관리였다. 토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거 같은 사람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놀랍게도 유대인 수백만명을 가두고 때리고 벌거벗겨 가스실에 쳐넣었던 것이다. 비위 약한 분은 아래 동영상을 보지 마시라

    상상할 수 없는 학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살인이 무얼 뜻하는지 몰랐다. 아우슈비츠의 기획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이 법 앞에선 무죄다.”

    사형대에서 선 아이히만은 독립투사처럼 비장하게 최후유언을 했다.

    “독일이여, 영원하라!”

    죽는 순간까지도 아히히만은 생각하지(thinking) 않았다.

    아이히만의 죄는 무엇일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 “의심하지 않았던 죄”라고 지적했다. 하이데거 제자였던 그녀의 데카르트 『성찰』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확대되었다. 그녀는 이 책을 이렇게 평가했다.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의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회의하라” 곧 회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근대적 회의를 최초로 개념화 했다….데카르트 회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의 보편성이다. 어떤 경험도 회의를 비켜갈 수 없다. 회의의 진정한 차원을 가장 정직하게 탐구했던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이다. 그는 이성이 아니라 회의로부터 단숨에 믿음에로 도약하여, 근대 종교의 심장부에 대한 회의를 실행했다. 회의의 보편성은 감각의 증거로부터 이성의 증거를 거쳐 신앙의 증거로까지 확산된다.”(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3. 339~341면)

    “보편적 회의의 데카르트적 해결 또는 내적으로 연관된 두 악몽, 즉 모든 것은 꿈이며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신이 아닌 악령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을 조롱한다는 악몽으로부터의 구원은, 방법과 내용의 차원에서 보면, 진리로부터 진실성으로, 실재로부터 신뢰성으로의 전환과 유사하다….(데카르트는ㅡ인용자) 어떤 것을 회의할 때 나는 회의하는 과정을 의심한다라는 단순히 논리적인 확실성으로부터 인간 정신에서 진행되는 이 과정들이 그 자체 확실성을 가지며, 자기 반성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3. 345~346면)

    ‘악의 폄범성’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생각없이 사는 평범한 삶 속에 무서운 악이 존재할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만족을 즐기는 삶은 엄청난 악행을 유발할 수 있다. 아렌트는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악행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로 결심한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 진다. 이것은 슬픈 진실이다”

    검사는 아히히만의 죄를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이것이 피고의 진짜 죄”라고 탁월하게 정리했지만, 이보다 더 명징한 것은 한나 아렌트의 규정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다만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은 잘못이다. 이웃은 우리이지, 타인이 아니다.

    3.

    젊은 예수도 “살펴라” “의심하라”고 말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마태복음 7장 15절)

    이름없이 헌신하는 목사님이 아닌, 사리사욕만 채우는 비루한 사기꾼 목사의 헛설교를 들으며 헌금 내는 것은 ‘악의 보편성’을 더욱 굳게 해주는 격이 아닐까.

    잘못된 전체주의는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비판하지 못하게 한다. 통제하기 쉽도록 무조건 믿으라고 충성하라고 길들인다. 그럴 때 개인은 기름 칠 당한 너트나 볼트처럼 도구로 살 뿐이다. 심하게 말해서 단독성이란 1%도 없는 파손된 전두엽이거나 자가작동불능의 몰모트일 뿐이다. 거꾸로 어떤 조직이 의심도 비판도 대화도 못 하게 한다면, 얼마나 거대한 조직이라 할지라도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의심하는 것은 찬양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 //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의심을 찬양하라」, 1939)고 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우리의 발이 어디에 있는지 의심하고 회의하라며 이렇게 썼다. “매일매일 우리는 한쪽 발은 아름다운 동화 속에, 다른 한쪽 발은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속에 담근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법의 순간』 95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여, 브레히트, 한나 아렌트 등이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ㅡ고정관념을 의심하라. 헛된 우상들을 의심하라.

    필자소개
    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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