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언 타향살이 십년
    [파독광부 50년사] 광산도시에서 베를린으로 이사를 가려 하니...<검정밥-19>
        2013년 07월 25일 01: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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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이 가까이 닥쳐왔다. 졸업하기 전에 벌써 직장문제는 해결이 되어서 내가 옛날에 일하던 광산회사에서 슈타이거로 일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부에 맛을 들인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광산대학은 독일 대학제도의 팍혹슐레(Fachhochschule)에 속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일반대학과 같아서 여기를 졸업하고는 박사학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박사학위에 들어갈 수 있는 정규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본사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아무 반대도 없이 장학금을 계속 주기로 응낙하면서 새로운 계약서를 내어 놓았다.

    거기에는 내가 공부를 마치면 지금까지 지불한 장학금의 대가(代價)로 루르 석탄공사(Ruhrkohle AG)에서 5년 근무할 것을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이 계약은 내가 독일에 남을 경우에는 아주 이상적인 것이었다. 졸업을 하면 직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월급도 독일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조건은 나에게 아주 유리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고국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실무를 통하여 경험을 더 쌓고 싶었다. 독일의 광산 광업기술은 세계에서 으뜸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쾌히 승낙하고 공부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광산학을 가르치는 대학교는 악헨 공과대학교와 클라우스탈 첼러펠드 공과대학 그리고 베를린 공과대학교 등 세 군데가 있었다.

    나는 베를린을 택했다. 클라우스탈은 독일 사람들도 이름을 모르는 촌구석이었고 외국인이 없는 곳이라 가기가 싫었고, 기왕에 집을 옮길 바에야 잘 알려진 베를린으로 가기로 했다. 비록 사방이 막힌 섬과 같은 도시였지만 어떤 세계적인 분위기를 가진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막상 베를린으로 이사를 가려하니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더니 언제나 뿌연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는 산업도시인 두이스부르크가 정이 들어서 또다시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노모의 곁과 고향을 떠나와 평생에 생각지도 못했던 땅속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육년이란 세월을 넘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한지 육년, 꿈에도 소원이었던 학업을 시작한지 삼년, 이렇게 내 나름대로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그 터전 위에 아직도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는 것도 내 집의 터전을 더 넓게, 내 집의 벽과 담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또 낯선 곳으로 옮겨야하는 것도 10년 전처럼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설계도에 선을 그을 수 있는 계획적인 삶의 걸음이었고, 또 나 혼자만이 걷는 걸음이 아니고 아내와 자식의 손을 잡고 걷는 걸음이었다. 그래서 이 걸음은 어쩌면 10년 전보다 더 무거울 것 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혼자가 아니라는 커다란 위로가 나를 동반하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피땀과 눈물로 땅 속과 땅 위를 적신 추억들,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일들이 필름이 되어 눈앞에 떠올랐다.

    독일 어느 지역의 광경

    독일 어느 지역의 광경

    K와 나는 친했다. 그는 춤을 잘 췄다. 키도 크고 몸집도 좋아서 주말에 양복을 입고 나서면 늘씬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춤바람이 들었던 돈 많은 아줌마들의 파트너로 재미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비록 천길 땅속에서 숨이 넘어가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주말이 되면 춤방에 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하루는 춤판에서 알게 되었다는 독일 여인을 내가 자취하는 방에 데리고 왔다. 과부라고 했다. 여인의 나이는 삼십 전후로 보였다. 나는 그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오래만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잡담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나다가 약 3시간이 지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는 아직 그들이 있었고, 방안에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가에 웃음을 띠우면서 방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문이 열리는가 했더니 K의 손이 문밖으로 나오면서 나를 방안으로 다짜고짜 끌어드렸다.

    침대 위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몸을 비틀며 신음하고 있었다. K는 마치 머리 잘린 닭처럼 방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나를 애걸하다시피 쳐다보았다. K는 신음하는 여인을 가리키며 더듬거리듯 자초지종을 말했다.

    오랜만에 여인과 재미를 보고난 K는 마실 것을 찾느라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 넣어둔 계란을 발견한 그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손에 생계란 하나를 들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아직까지 욕정에 이글거리고 있는 여인을 끌어안았다. K는 여자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여인의 아랫도리에 가지고 있던 계란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아랫배 속에 든 계란을 빼낼 수가 없었다. 배속에 든 계란을 빼려고 지금 누워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K는 나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애걸하고 있었다.

    여인은 이제 수치심을 넘어서 살길을 찾아 ‘사람 살려라’ 고함을 지를 것 같았다. 나는 그 여인에게 아프냐고 물었다. 아프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 일어나서 옷을 입고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막상 계란을 뱃속에 넣고 병원으로 갈만한 용기는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계란을 빼기로 하고 일에 착수했다. 나는 알을 낳는 여인의 산부인과 의사가 된 셈이었다. 다행이도 여인의 몸이나 계란을 상하지 않고 빼어 낼 수가 있었다. 그 후로는 그 여인은 K를 빼어낸 계란과 마찬가지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박에 빠진 친구의 거짓말

    내가 결혼한 후에 언젠가 K가 나에게 돈 3000마르크를 맡겼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쓸 것 같으니 나더러 제가 미국에 갈 때까지 대신 보관해 달라고 하면서, 제가 와서 아무리 돈을 달라 해도 자기에게 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다.

    사흘 후였다. 밤늦게 우리가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우리 침실의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보니 K였다. 급한 일이 있으니 제가 맡겨둔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대로 나는 거절했으나 그의 애걸은 끝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막역하게 친한 친구가 고향에 계시는 부친 때문에 꼭 돈이 필요해서 자기에게 도움을 구하려 악헨에서 왔다고 했다. 친구가 그러는데 어찌 도우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했다. 자기가 나에게 한 말을 아무리 돈이 급하기로 이틀 밤 동안에 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며 제가 쓸 돈이 아니고 친구를 위한 것이니 안심하고 돌려달라고 했다. 친구를 위한 것이면 나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돈을 줬다. 주고 나니 의심이 갔지만 아무리 급하더라도 친구를 팔아먹지는 않았겠지! 하고는 다시 잠자리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밤에 기숙사에서 도박장이 크게 벌여졌다. K는 나에게서 찾아간 돈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말을 믿었던 것을 원망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 2월부터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 다시 파견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사람들이 왔을 때부터 통역을 맡았다. 하루는 우리 회사로 새로 온 광부들을 뒤쎌돌프 공항에서 인수했는데,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H가 새로 온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H는 1964년 나와 함께 독일로 왔다가 일년이 조금 넘어서 김 군과 함께 함부르크로 도망가서 배를 탄 사람이었다. 배가 부산항에 정박했을 때 그는 배에서 내려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은 일이 있었다.

    몇 주 후에 나는 그가 다시 독일로 온 사연을 알았다. 그는 한국에 아내와 자식들을 둔 가장이었는데, 한국에서 사업할 때 어느 여인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인은 간호원으로, 그는 광부로 독일로 사랑의 탈출을 한 것이었다. 여인은 남독의 어느 도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H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를 이 근방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면서 나더러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여자가 근무하는 병원에 가서 계약에서 빼내는 것이었다. 이 근처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느 병원에서나 간호원을 찾고 있었다.

    내가 그 여인이 일하고 있는 병원에 갔을 때, 그 여인을 언니라고 하며 따라다니는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어린 간호원을 만났다. 그 간호원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병동에서 일하는 이태리 남자와 친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임신이 되었다. 임신된 후에야 이태리 사람이 기혼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밴 아이를 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낙태수술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떼려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차에 이태리 남자가 낙태수술을 한다는 여인을 안다고 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도 잡고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물불 가릴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 간 곳이 어느 건물의 뒤칸에 있는 지하실이었는데 집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어린 간호원은 마취도 옳게 되지 않은 채 견딜 수 없는 아픔 속에 뱃속에 든 아이가 뜯겨나가는 것을 감당해야 했고, 무엇으로 뜯어내고 무엇으로 쑤셨는지 만신창이가 된 아랫배를 움켜쥐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간호원은 의식을 잃어버렸고 방바닥은 피바다가 되었다. 우연히 찾아온 동료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생명을 구했다.

    석 달 전의 이야기라고 했다. 나는 몸속의 상처는 아물었을지 몰라도, 마음속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은 채 외국의 하늘 아래서 첫사랑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던 그 어린 여인이 한없이 가여웠다. 그래서 병원장에게 기왕 한국간호원 한 사람을 계약에서 벗어나게 해줄 바에야 이러한 사정이 있는 젊은 소녀도 주위 환경도 바꿀 겸 정신적인 거리감도 가지게 하도록 언니와 함께 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빼낼 수 있었다.

    피아노 간첩의 슬픈 에피소드

    하루는 내가 사는 도시 두이스부르크 시내에서 한국간호원 십여 명을 만나게 되었다. 며칠 전에 소아과병원에 파견된 사람들로서 오늘 처음 시내에 구경을 나왔다고 했다. 내가 학생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달라 했다.

    남에게 독일어를 가르칠만한 실력이 부족했지만 아무 말도 못하는 그들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병원에 둘러서 함께 독일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는 중 한 간호원이 피아노를 사고 싶으니 나더러 어디에 월부로 살 수 있는 곳을 한번 알아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래서 피아노를 한 대 구해서 그의 방에 들여놓았다.

    그 이튿날 병원에 가니 그 간호원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나에게 그 여인은 다시 울먹거리며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평생 가지고 싶던 피아노를 장만한 그 여인은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는데 갑자기 복도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을 세차게 두들기면서 ‘문 열어라’ 는 고함소리가 났다. 그래서 치던 피아노를 그치고 방문을 여니 서너 사람이 자기를 옆으로 밀어제치고는 물밀 듯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방안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무엇을 찾고 있었다. 옷장의 문도 열었고 이불도 뒤집어엎었고 짐가방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방주인이 그들에게 반항하듯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내 방을 샅샅이 뒤집어엎는단 말이에요? 내가 무엇 훔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을 하면 되지 않아요?”

    “야! 너 그것 어디다 숨겼니?”

    간호장교로 근무했다는 나이가 제일 많은 간호원이 눈을 부라리면서 물었다.

    “그것이라뇨? 그것이 무엇이란 말에요?”

    “네 이년, 정말 못 내놓겠니? 우리가 바깥에서 다 들었단 말이야. 네가 무선전신기를 사용해서 신호를 보낸 것을 다 들었으니까, 잔소리 말고 그 신호기 내놓아!”

    “도대체 무슨 무선전신기란 말이요? 나는 그런 것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아니 얘가! 네가 피아노 치는 척하면서 ‘도 도스 도도’ 신호하는 소리를 우리가 들었는데도 왜 시치미를 딱 잡아 떼냐? 왜 네가 피아노 사들였는지 이제야 짐작하겠다.”

    “나는 신호한 일 없어요. 다만 피아노만 쳤어요.”

    옥신각신하면서 전신기를 내어놓으라, 없는 것을 어떻게 내어놓느냐? 등 다시 한번 방을 뒤집다시피 수색했으나 결국은 그 신호기를 발견하지 못한 체, 대사관에 연락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방에서 나갔다고 했다.

    피아노 주인은 원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또 울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에 내가 온 것을 알고 다른 간호원들이 그 방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또 간호장교였던 최 여사가 다른 사람들을 대표해서 오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동시에 피아노 주인은 간첩이라는 단언을 내렸다.

    나는 어처구니 없었다. 간첩이 신호를 정말 보낸다면 피아노 소리만큼 크게 바깥 복도에까지 들리는 기계를 사용할 것 같으며, 도대체 소아과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들로부터 무슨 요긴한 정보를 보낼 것이 있다고, 그 신호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피아노까지 사들이겠느냐? 틀림없이 무엇을 잘못 들었거나 오해한 것으로 간주되니 오늘 오후처럼 그 간호원이 피아노를 치도록 하고 우리는 복도에서 듣기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방문을 닫고 그 여인은 오후에 한 것처럼 피아노를 치고 우리는 복도에서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피아노 소리와 함께 뚝딱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떤 신호 보내는 소리가 아니고, 규칙적인 박자조절기의 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한 대로 박자조절기가 똑딱거리고 있었다. 무작정 간첩이 보내는 신호라고 해석했던 동료 간호원들은 부끄러워하며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우리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는가? 왜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도 운명을 같이하는 동료를 이토록 간첩으로 만드는 사상 아닌 사상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가?

    그 일 후에 나도 그들에게 대해서 심적으로 간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한국 간호원과 결혼한 독일인 사범대학생이 그 동네에 살면서 몇 사람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모두 그 사람에게 가도록 했다.

    불행하게도 그 한독가정은 독일어를 배우던 한 간호원이 그 독일인과 정을 통하다가 부인에게 발각됨으로서 파괴되었고, 그 독일인은 새로 정이 든 간호원과 살다가 졸업 후 다른 도시에 발령이 나서 그 곳에 간 후로 또 헤어졌다고 했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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