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내쫓는 남양유업...
    소비자의 모성과 노동자의 모성
    [안녕? 페미니즘!] 노동자를 재정의하는 기업조직의 전환 필요
        2013년 07월 25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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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상반기 ‘갑을’이란 단어를 한국 사회의 핫 키워드로 만들었던 남양유업이 결혼 임신을 이유로 여직원의 퇴사를 종용해 왔다는 사실이 한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결혼하면 계약직으로 신분을 바꾸고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두도록 압박해 온 결과, 현재 남양유업 본사의 여직원은 고객상담실 등 특정 부서를 제외하면 대부분 미혼이라고 한다(YTN 2013.6.27).

    국내 분유업계 1위 기업으로 엄마들에게 분유를 팔아 기업을 유지해 온 남양유업이 예비 엄마인 노동자들을 해고해 왔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게다가 남양유업은 ‘남양i’라는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며 임신육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예비 엄마들을 대상으로 ‘남양분유 임신육아교실’을 운영하는 등 모성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1979년 창립 이후 그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모순적인 관행에 맞섰던 노동자들이 없었을까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간단한 공식의 산물이다. 소비자의 모성은 수입(+), 노동자의 모성은 지출(-)이다.

    모성을 도구화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기에 노동자의 모성이 초래하는 ‘비용’에 다른 기업보다 더 민감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관된 태도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성과 이윤, 필연적 모순인가

    남양유업뿐 아니라 많은 기업이 임신출산에 따른 인건비 부담 때문에 여성고용을 꺼린다고 말한다.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 급여가 사회분담화 된 지 이미 수 년이 지났지만, 대체인력 등 휴가∙휴직 사용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여전히 기업이 떠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이 비용을 이유로 모성을 배제하는 것은 필연적인가. 다시 말해 노동자의 가족 역할을 지원하는 것은 이윤 추구라는 기업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업은 많은 비용을 들여 노동자의 가족 역할을 지원해 왔다. 적게는 가족 대소사에 경조금을 지급하는 것부터 많게는 자녀 학자금 지원, 가족 병원 진료비 지원, 사택과 주택자금 대출까지, 모두 법으로 강제되지 않은 복지 혜택들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이렇게 기업이 자발적으로 지출하는 복지 비용은 2010년 한해만 18조3천억원으로, 같은 해 공적연금 지출 규모에 맞먹는다.

    이 정도 규모라면 급여에 ‘부가’되는 급여라기보다, 기업이 고용하는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인 보상의 일부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결국 기업은 노동자의 가족 역할을 배제해 온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으며, 이를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과감히 비용을 투자해 왔던 셈이다. 다만 그것은 가족 생계를 부양하는 가장-남성의 역할이지,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여성 역할이 아니었을 뿐이다.

    가장-남성 노동자에 기초한 기업 조직

    이렇듯 산업화 이후 한국사회 기업들은 특정한 가족 지위와 역할을 지닌 노동자를 전제해 왔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대표 즉 가장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했고, 노동자라는 정체성의 요체는 가장 혹은 돈을 모아 결혼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미래의 가장이었다. 이는 또한 기업 내 위계 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은 어떤 비인격적 대우도 견딜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그러한 가장들 만의 유대가 강력한 위계질서를 지탱해 온 것이다.

    기업 조직이 가장-남성들 간의 수직적 관계망이라면, 노동조합은 이에 대항하는 가장-남성 유대의 또 다른 형태였다. 70년대까지 열악한 임금 수준을 보완하는 생계보조적 성격을 띄던 기업복지는 87년 노동운동의 성장 이후 <평생고용-가족임금>에 기초한 생계부양자 고용 모델의 일부로 재정비되었다.

    이 시기 급격히 증가한 가족부양 복지는 노동운동의 강화된 교섭력의 산물이자 그러한 노동운동을 억제하고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업의 핵심 기제였다. 이를 명분으로 기업은 노동자에게 가족생활을 희생하면서 온전히 회사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였고, 기업으로부터 받는 다양한 혜택은 노동자 가족 내에서 가장-남성의 지위와 권위를 보증해 주었다.

    따라서 이 구조 안에 여성이 진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90년대까지 기업에서 미혼 여성은 사업의 중심에 있는 남성노동자를 보조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가 결혼과 동시에 퇴출되었고, 생계보조자로 여겨진 기혼 여성은 일반 사원이 아니라 ‘주부’ 사원인 저임금 노동력으로 흡수되었다.

    여성을 수용하기 시작한 노동 유연화

    그러나 오늘날 기업은 과거의 모델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노동 유연화로 <평생고용-가족임금>이라는 생계부양자 모델의 기반이 침식되고 여성인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이제 가족의 대표가 아니라 남성/여성 개인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할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이에 많은 기업이 가장-남성이라는 가족 역할에 기초하여 노동자를 통제하고 충성을 이끌어내 온 기존의 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한-1

    사진은 유한킴벌리 홈페이지

    그러한 기업에서 여성-개인의 차이는 과거 가장-남성에 대한 지원이 그러했듯 기업의 시스템 안에 자연스럽게 수용되기도 한다. 나아가 모성을 기업의 플러스 요인으로 의미화하는 다양한 전략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유한킴벌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한킴벌리의 여성인력 정책은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흥미로운 건 유한킴벌리가 지난 2010년부터 가족친화경영을 사회공헌사업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관련 기사 링크]

    저출산 문제가 대두되면서 많은 기업이 이러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미혼모, 결혼이주여성, 빈곤여성의 모성을 지원해 왔다. 유한킴벌리가 색다른 건 이를 기업 내부의 변화와 연결시키며 사내 합계출산율을 사회적 책임의 지표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 방침에 따르면 기업 내에서 모성은 배려나 보호 차원을 넘어 기업이 표방하는 가치 실현의 척도가 되는 셈이다.

    이 외에도 삼성전자, SK, KT등 여러 대기업이 가족부양 복지를 줄이고 대신 근무에서 시공간적 유연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자의 가족 역할을 지원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스마트워크, 유연근무라 불리는 이 정책은 글로벌 경쟁 시대에 조응하여 경직된 조직 문화를 혁신하고 창의성과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가장-남성 노동자 모델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기업의 전략은 저출산 ‘위기’ 극복을 위한 실천으로 모성을 도구화하거나, 많은 경우 일과 가족 돌봄을 병행하는 노동자를 여성’만’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이중 부담을 완화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회사에 보다 헌신적인 노동자-남성과 덜 헌신적일 수 밖에 없는 양육자이자 노동자-여성이라는 위계화 된 트랙이 유지된다면 조직 내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과 권한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기업의 조직 원리를 새로 짠다는 것

    그 동안 쏟아진 비난에 위축되어 있던 남양유업은 YTN 보도 이후 부랴부랴 계약직 기혼 여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삭감했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사건에 대해 여성단체와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하고 고발장까지 접수했으니, 앞으로 남양유업의 여성인력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기업들, 대기업 또한 남양유업식 모델을 고수하고 있다. 유능한 ‘남녀 인재’를 요구하면서 과거의 시스템을 고집하는 기업이 과연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련의 남양유업 사태는 괜히 일어난 게 아니다. 전근대적 밀어내기 영업방식을 고수한 남양유업은 공정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시장 질서의 교란자로 지탄을 받으며 결국 기업의 존립 근거를 위협받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쟁력을 갖춘 시장 주체로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여성들을 밀어내는 기업이 도태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물론 모성과 양육 지원을 경영의 일부로 통합시키기 위한 사회적 개입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를 위해 모성권과 양육권 보장에 관한 법률을 정비하고 기업에 강제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나아가 기업이 노동자의 성적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경제적 부양과 가족 돌봄이라는 노동자의 다중 역할을 인정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가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모성은 노동자의 정체성이나 구성원 간의 유대 관계에 어떻게 기입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노동시간과 생애주기를 조정하는 것이 기업의 인사관리체계에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까.

    이러한 변화는 기업으로 하여금 전에 없던 이상적인 노동자의 삶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족 돌봄에 대한 아무런 책임과 의무도 없이 회사에 올인하는 가장-남성 노동자야말로 실재하지 않는 이상에 가깝다. 이제는 일과 가족, 여가생활을 오가며 살아가는 남녀노동자를 전제로 기업의 조직 원리를 새로 짜기 위한 기획이 필요할 때다.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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