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 사랑 구원의 서사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에서「레미제라블」을 읽는다
        2013년 07월 22일 12: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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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당신의 귓가에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 깃발 아래 다양한 차림의 민중과 혁명가들이 모여 이 노래를 부르던 장엄한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가?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은 한국에서 누적 관객 590만 명을 넘어서며 뮤지컬 영화로서는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한국인에게 너무도 친숙한 줄거리, 반전이 없고 극적인 긴장이 부족한 서사, 긴 상영시간, 짧은 대사까지도 노래로 처리한 ‘송 스루(song-through)’ 방식의 완전 뮤지컬 영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것이기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원작의 감동, 최상급 배우 캐스팅,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 장중한 화면,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 등 작품 내적 요인도 작용하였지만, 이런 흥행에는 사회문화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원작지인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의도적으로 대통령 선거일인 12월 19일에 맞추어 세계 최초로 개봉하였으며, 대선 이후 소위 ‘멘붕’에 빠진 48%들이 이 영화에서 의미를 찾고 ‘집단 힐링’을 하였다.

    19세기의 프랑스 독자들이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왕정 복고기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인간 구원, 부조리한 앙상레짐에 대한 분노와 혁명의 길을 읽었다면, 2012년 말 2013년 초의 한국 대중들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에 던져진 한국 민중의 비참한 삶과 구원의 길, 부조리한 체제에 대한 분노와 희망의 메시지를 읽었을 것이다.

    이에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레미제라블>을 중심으로, 먼저 프랑스 혁명기의 맥락에서 작품을 읽은 다음, 이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겪고 있는 오늘 한국의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자.

    소설은 “1815년,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씨는 디뉴의 주교였다.”로 시작한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1789년에서 1799년에 이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15년의 제2차 왕정복고기에서 시작하여 1832년의 6월 봉기로 이어지는 시기다. 혁명과 반혁명, 혁명의 희망과 반혁명의 좌절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중세 봉건사회 모순의 극대화와 해체,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로 귀족 및 이에 편승한 자본가 계급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 및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 흑과 백처럼 대조되던 시대였다.

    저자인 빅토르 위고는 6월 봉기가 일어난 1832년 6월 5일에 튈르리 정원에서 희곡을 집필하다가 총소리를 듣고 바리케이드로 피했다. 그는 그 경험을 살려 1845년부터 소설 <레미제라블>의 집필을 시작하여 1862년에 출간하였다. 소설은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1815년에 시작하여 6월 봉기를 클라이막스로 하고 1834년에 끝난다.

    여기서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현실은 혁명이 왕정복고로 유린당하고 무지와 빈곤으로 비참한 상황에 있는 민중들과 이를 정당화하는 그늘, 곧 부조리한 법과 제도 등 앙상레짐이다.

    리얼리스트로서 빅토르 위고는 이 현실을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세계관, 자신이 민주공화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영국의 저지섬과 건지섬으로 망명하는 권력관계, 공화파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장중한 서사로 엮어낸다.

    하지만, 여기서 그쳤다면 그가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만티스트로서 빅토르 위고는 이 비참한 현실에 존재해야 할 인간의 사랑과 구원, 부조리한 세계를 극복할 진보와 혁명의 빛으로 세계를 재질서화하여 이를 당시 풍미하던 낭만주의 소설 양식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하였다. 때문에, 이 소설은 당시 현실에서도, 21세기 오늘의 맥락에서도 크게 세 가지, 곧 ‘구원의 서사’, ‘사랑의 서사’, ‘혁명의 서사’로 읽힌다.

    이 소설은 당대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소설이 묘사하고자 하는 현실은 무지와 빈곤으로 비참한 민중들의 삶과 어둠, 곧 선한 이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세계다. 빅토르 위고가 서문에 쓴 대로, 그곳은 “무산계급에 의한 남자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세계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첫째 부조리가 선한 남자인 장발장이 굶주리는 조카를 살리려 빵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살이한 것이라면, 둘째 부조리는 순진한 처녀였던 팡틴느가 남자에게 쾌락의 대상으로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후, 공장으로부터도 쫓겨나서 창녀로 전전하다가 절망과 병으로 죽는 것이다. 셋째 부조리는 순박한 어리아이인 코제뜨가 비열한 사기꾼인 떼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겨져, 양육비를 매달 물면서도 하녀로 전락하여 비참한 시련을 겪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과 부조리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동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860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720만 명의 자영업자 가운데 57.6%가 100만 원도 벌지 못한 채 빚만 키우고 있고, 이도 여의치 않아 다단계판매로 나선 415만 명 가운데 3/4이 단 돈 1원도 벌지 못하였다.

    공공기관과 지방 정부를 합한 국가부채는 938조원에 이르며, 아파트 전세 시가총액 908조 원을 포함한 실질적인 가계부채는 2,000조 원에 달하는데, 집값은 하락하고 전세와 물가는 폭등하고 교육비 부담은 가중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하여 거리를 헤매고 있다. 여성들은 가정경제 위기를 맞아 양육을 미룬 채 ‘여성 비정규직’으로서 헐값으로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고, 그 중 일부는 팡틴느와 유사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아이들은 신자유주의 경쟁 위주의 교육 속에서 폭력과 자살의 유혹과 싸우고 있다.

    이런 비참한 현실에 구원은 있는가. 이 소설에서 장발장은 구원에 의하여 끊임없이 향상되며, 결국 성인에 이른다. 장발장은 가지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다. 그는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가 19년의 감옥생활을 한 후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인간으로 변한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의 용서와 관용을 매개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 후에 그가 추구하는 대상은 사람들의 구원과 자선이며, 이름도 마들렌느 시장으로 바꾼 후 포슐르방과 코제뜨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 자신의 원수라 할 자베르마저 구원한다.

    소설 전편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며,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로부터 주교관에서 구원을 받고 수녀원에서 감시의 시선을 피하여 안식을 얻는다. 장발장이 죽어갈 때 그를 찾아온 마리우스는 코제뜨를 향하여 장발장을 천사라고, 순교자라고 말한다.

    소설에서 구원을 매개하는 것은 용서와 관용이다. 미리엘은 자신의 물건을 훔친 장발장의 죄를 용서하고, 장발장은 팡틴느의 타락을 용서하고 팡틴느도 장발장이 자신을 공장에서 내쫓아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을 용서하며, 장발장은 감옥으로 몰아넣고 평생을 도망자로 살게 한 자베르를 용서하고 자베르는 악의 화신이라 생각한 장발장을 용서하며, 마리우스는 추악한 범죄자라 생각했던 장발장을 용서하고, 장발장은 마리우스와 떼나르디에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을 용서한다.

    구원은 안과 밖이 줄탁동시(啐啄同時)를 이룰 때 진정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대속(代贖) 덕분에 구원은 밖으로부터, 무한한 초월자로부터, 그분께서 죄 많고 한계가 많은 우리 인간에게 은혜로 다가올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무한한 초월자가 제한된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려면 인간이야말로 애당초 무한한 초월자와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비구원적 상황 ‘밖’이 아니라 ‘안’에서, 더 ‘깊고 깊은 안’에서 온다.

    미리엘 주교의 관용과 용서가 예수님의 대속 구실을 하였지만, 원래 선한 장발장이 깊이 참회하며 웅숭깊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장발장은 대자적 자아를 실현하여 코제뜨, 자베르, 마리우스, 시민들을 구원하며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

    소설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로도 읽힌다. 독자들이 사회성이나 역사성의 해석을 거부한 채, 장발장의 코제뜨에 대한 사랑, 코제뜨와 마리우스와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서 적대적 인물을 자베르 등 사랑의 방해자와 사랑을 구속하는 낡은 인습과 제도로 읽을 경우, 소설은 한 편의 아름다운 낭만적 사랑의 서사로 읽힌다.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쫓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코제뜨를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고 딸처럼 양육한다. 마리우스는 가문, 부와 명예, 모든 인습과 제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코제뜨를 사랑한다. 그들은 비참한 조건, 비극적인 여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상을 향하여 모든 것을 내던진다. 그들은 부조리한 세계, 사랑을 향한 열정과 욕망을 옭아매는 온갖 법과 제도와 인습과 감시의 시선에 맞서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하고, 결국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이룬다.

    이 소설은 그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지극한 사랑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의 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상투적 메시지를 떠나서 “과연 사랑 없이 구원과 혁명이 가능한가?”라고 되묻는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 비참한 민중의 삶과 이들을 억압하는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혁명의 비전을 잘 제시한 리얼리즘의 서사로 읽힌다. 알베르 마띠에는 <프랑스혁명사>에서 “농민들은 이 사회의 짐 나르는 짐승이었다. 10분의 1세, 화폐지대(貨幣地代), 현물지대, 강제노역(부역), 왕국세, 의용군 복무 등 일체의 부담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그들은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살았는데 이 집들은 흔히 이엉으로 얹은 것으로서 더러는 굴뚝도 없었다.”라고 서술한다.

    빅토르 위고는 파리의 뒷골목과 하수도에서 1820년대의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나타난 공장에 이르기까지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선한 자들이 단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농민이나 노동자라는 이유로 과도한 착취를 당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는 부조리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거기에 내재해야 할 혁명의 당위성과 비전을 제시한다. 소설에서는 혁명의 실패로 막을 내리지만, 6월 봉기는 2월 혁명으로 이어지고 앙상 레짐은 완전히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섰다.

    대선 패배 직후 이 소설을 영화로 보았던 한국의 독자들은 이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에서 읽는다. 배를 끌어올리는 첫 장면에서 죄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리해고 노동자, 혹은 양극화로 인하여 가난한 서민으로 전락한 대중, 간수는 권력과 자본, 도크는 신자유주의 체제, 파도는 양극화, 비정규직, 정리해고 등의 신자유주의 모순으로 해독된다.

    이들이 대단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지막 바리케이드 장면이다. 죽은 자와 산자, 승리한 자와 실패한 자, 비참한 자와 구원을 받은 자, 사랑하는 자와 실연을 당한 자들이 모두 나와 삼색기를 흔드는 장면을 보고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노래를 들으면서 대선의 패배, 신자유주의 모순을 풀어버리면서, 모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가 철폐되고 신자유주의가 해체된,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다시 품게 된다. 보수언론은 이를 “좌파 독자들의 대선 패배의 감정이입”으로, 진보 언론은 “대선 패배에 따른 집단 힐링”으로 해석하였다.

    한국 사회문화의 장에서 이 영화를 각각 ‘구원의 서사’, ‘사랑의 서사’, ‘혁명의 서사’로 읽으려는 해석 사이에 담론 투쟁과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도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구원의 서사로 읽으려 할 것이고, 청소년과 사회성과 역사성, 맥락을 제거한 채 서사 텍스트 자체에만 주목하려는 이들은 사랑의 서사로 읽으려 할 것이다. 반면에 해석에서 맥락이나 사회성, 역사성을 중요시하거나 신자유주의 모순에 분노하는 이들은 혁명의 서사로 읽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도가니>와 <의자놀이>에서 <레미제라블>로 이어진 이 담론 및 헤게모니 투쟁은 이와 유사하게 신자유주의 모순을 고발한 작품의 창작과 수용과 해석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레미제라블> 소설과 영화, 뮤지컬은 신자유주의의 모순, 특히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철폐하라는 담론에 무게를 실어줄 것이다. 정녕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필자소개
    민교협.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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