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 몽양 여운형!
    [산하의 오역] 1947년 7월 19일 조선의 아까운 사람, 암살되다
        2013년 07월 20일 0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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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공간에서 불운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을까마는 그 역량과 인품에 비추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닌데 너무 ‘모진 꿈만 꾸다가’ 가 버린 사람이라면 단연 몽양 여운형일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에 10번의 테러를 당하고 집까지 폭파되는 참극을 겪었다. 그나마 해방 후 2년을 버틴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여운형은 그를 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해방 3일 뒤에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두들겨 맞은 것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여관방에 투숙했다가 방을 바꿨는데 마침 그 이전 방이 쑥밭이 되기도 했고 괴한들에게 포위되어 행인에게 구출을 받거나 죽기 직전 벼랑으로 몸을 던져 살아난 영화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며 납치되어 나무에 묶였다가 줄을 풀고 탈출한 기사회생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 ‘불행 중 다행’은 1947년 7월 19일로 끝난다. 대여섯 명의 암살자가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드는 여운형의 차를 습격했고 정확하게 총알을 여운형의 몸에 박아 넣은 것이다.

    여운형1

    해방 공간의 암살 피해자들의 배후가 흔히 그렇긴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자 배후 용의자는 유독 많았다.

    우선 많은 이들은 이승만 이하 극우 친일파 세력을 지목한다. 암살범을 쫓던 경호원을 경찰이 범인이라고 붙잡은 해괴한 상황이나 이전 테러에 대한 미지근한 수사, 그리고 좌우합작을 끈질기게 주장했던 여운형에 대한 반발 등으로 미루어 친일경찰들을 위시한 극우들의 합동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임시정부에 대한 폄하에 분개한 김구 계열의 암살설도 있고 한때 일생의 동지였지만 결별 후 미군정에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고 얘기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던 박헌영 계열이 죽였다는 말도 따라붙으며 심지어 김일성이 박헌영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여운형을 이용하다가 죽였다는 설까지 있다. 해방 공간의 유력한 정파 모두가 여운형 암살의 용의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건 무엇을 말할까. 여운형은 그 높은 대중적 인기와 ‘한국 현대사 최고의 명연설가’로 대변되는 정치적 역량 등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에 몸을 싣기보다는 끈덕지게 이념과 분파의 합작을 추진했고 그 와중에 한쪽에서는 빨갱이로 한쪽에서는 기회주의자로 오인받고 비난받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요즘의 열혈 민족주의자들이 들으면 책상을 치고 일어날 연설을 한다.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지칭한 ‘극소수 친일파’는 오늘날 발간된 ‘친일인명록’보다는 훨씬 그 범위가 좁다.

    어려서 과일을 훔쳐먹다가 도망나오느라 가시에 얼굴이 긁혀 오자 아버지가 “상놈의 과수원이 내 아들 얼굴에 상처를 내?” 분기탱천 나무를 찍어 버리는 양반 가문에서 자라났지만 그 아버지에게 3년상의 예우를 다한 다음에는 노비를 해방시켜 버리고 신주들을 불태워 버린 지식인.

    그를 회유하려는 일본인들 앞에서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라고 통렬히 연설했던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유격대가 혜산진 보천보를 습격한 뉴스를 듣고는 환호작약 밤새 술을 마시고는 현지로 달려갔던 사람. 일제 패망 당시 전국적인 자치 조직을 결성하여 새로운 나라에 한 발 더 다가서고자 노력했던 정치인.

    “지정학상으로도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 국가건설과 유지 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협력에서만 가능하다.”는 그의 발언처럼 해방 이후 몽양은 어찌 보면 중심추처럼, 나쁘게 보면 시계추처럼 좌우를 아우르며, 또는 좌우를 오락가락하며 살았고 그 모두로부터 미움을 샀다.

    아마 지금조차도 그의 말을 써먹는다면 대번에 기회주의자에 반민족주의자 아니면 종북주의자로 양쪽에서 화살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망 이후 수십 만 명이 모여들어 사회장을 치렀다. 하지만 그에게 전해진 조사와 치사, 평가 가운데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음직한 말은 이 말이 아닐까 싶다.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이후 조선에서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리처드 로빈슨)

    1947년 7월 19일 참 아까운 사람이 동포의 손에 죽었다. 우리 민족은 참 사람을 아끼지 않는 민족이다. 김구, 김원봉, 여운형 등 일제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내린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포의 손에 죽거나 비참하게 죽어갔다. 총알을 받은 뒤 여운형이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다.

    그 조국과 그 조선은 지금도 갈라져 있고 어느 쪽이나 상대와의 ‘합작’을 거부하는 강경파들로 그득하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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