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퀘벡 분리주의와 LGBT운동
    [세계 LGBT운동의 역사]1980년대 이후-세계화와 새로운 기회, 위협 (캐나다-3)
    By 토리
        2013년 07월 18일 05:3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82년 캐나다 인권 강령의 헌법 삽입은 캐나다 LGBT 운동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인권 강령 삽입 이전에는 1960년대 입법된 캐나다 인권법이 있었지만 이는 오로지 연방 수준에서만 작용했고 제한적이었다.

    일반법으로의 인권이 아니라 헌법으로의 인권 내용이 삽입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계속 되었고 자유당 수상 삐에르 트루듀가 주도하여 1982년 캐나다 의회의 요청에 따라 영국 의회가 캐나다법을 통과시키면서 완성되었다.

    캐나다 인권 강령의 헌법 삽입은 LGBT 운동에게 매우 강력한 무기였지만 이를 이용한 정치운동은 매우 서서히 시작되었다. 토론토, 몬트리올과 밴쿠버에서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AIDS운동이 주요 쟁점이었고 퀘백은 내셔널리스트들이 연방헌법 강화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헌법적 독재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캐나다 인권 강령의 헌법 삽입은 LGBT그룹의 잇단 승소 기회를 만들어냈다. 인권 강령은 간접적으로 연방법상 인권 법과 지역적 차원의 인권을 조화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성 결합의 인정에서 인권 강령 승소 사례들은 매우 중요했다.

    1995년 대법원은 성적 지향은 인권 강령-평등권 조항에서의 차별 금지 사유가 되지만 강령의 제한 조항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결정하였다. 1990년대 말 법원은 여러 사례에서 연방정부나 지방정부의 동성 커플 혜택 제한이 헌법에 위배한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헌법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1999년 대법원의 동성 커플 인정은 동성 결혼 이슈로의 길을 열게끔 하였다.

    캐나다에서 빠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양육과 관계 인정이 지방 법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지방 법은 헌법의 강령에 따라야 한다는 단서가 있고 사법 체계가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한 지역에서 사례가 시작하면 상소 과정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즉각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자원이 적고 분절되어 있는 캐나다 LGBT 정치운동이 동성결혼 인정과 LGBT 시민권 인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처럼 캐나다가 잘 조직되고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갖춘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크리스챤 조직들이 주민투표 등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주 단위 헌법을 수정하면서 법정에서의 LGBT 인권 승리에 따른 진전을 막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캐나다 정치 제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캐나다 LGBT 운동은 국가 구조에 따른 제도적 기회를 활용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동성결합에 대한 인정은 캐나다와 퀘백 내셔널리즘들의 경향과 흐름에서 얻게 된 기회이기도 하다. 퀘백인들은 동성결합 인정이 청교도적 영어권 캐나다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나머지 캐나다인들은 미국과 다른 관용성을 캐나다가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성 결혼 인정’ 이후의 시대에서 운동의 정책 의제는 좀 더 분절화되어 있다. 퀴어 사회운동조직은 항상 지역과 도시 수준에서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나 연방 수준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방 수준에서는 다문화주의와 지역주의의 복잡함과 다양함 때문에 소송 외에는 행동을 취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앞서 말한 정치 제도적 특징은 한편으로 잘 발달된 대규모 사회운동조직을 발전시킬만한 동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LGBT 조직은 캐나다의 LGBT 조직보다 몇 배는 부유하고 자원 동원력이 풍부하다는 점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캐나다의 분권화되고 흩어져 있는 퀴어 조직들은 보수당의 부흥에 따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충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가 현재 과제이다. 퀘백과 퀘백 아닌 곳에서의 내셔널리즘과 보수당 부흥과의 관계에 대해서 잘 살펴보아야 할 이유이다.

    캐나다가 아닌 퀘백

    1960년대 퀘백 혁명으로부터 퀘백 내셔널리즘이 발흥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76년 퀘백당이 집권, 정부를 구성하면서 실현되었다. 퀘백 내셔널리즘은 소위 ‘진보적 내셔널리즘’으로서 전후 복지국가를 건설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정부 주도로 보건, 교육, 복지 프로그램을 완성시켰고 진보적 근대화 운동과 궤를 같이 하였다.

    퀘백 내셔널리즘 운동은 소위 ‘세속적’ 진보적 내셔널리즘으로 정의되며 과거의 신정통치주의나 전통적 내셔널리즘과는 구분된다.

    퀘백 내셔널리즘은 1970년대 스페인 카탈로니아 내셔널리즘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어 공립학교 등 공공 체계를 확장시켰다. 퀘백은 가톨릭교회가 영향력을 오랜 기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청교도적 영어권 문화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또한 여성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새로운 가족법을 입안하였고 북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인권법을 도입,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부터 구제될 수 있도록 하였다.

    퀘벡당

    작년 퀘벡주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퀘벡당 지도부들

    그러나 나중에 인권 강령을 헌법에 삽입한 자유당 수상이자 1960년대 퀘백의 조용한 혁명 지도자였던 삐에르 트루듀는 퀘백 내셔널리즘이 퇴행적이고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였다.

    트루듀가 보기에 퀘백 내셔널리즘은 전통적 권위주의의 한 형태였고, 자아와 국가를 분리시키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문제는 ‘퀘백 내셔널리즘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변동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내셔널리즘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다.

    퀘백 내셔널리즘이 퀘백 문화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연방 정부의 다문화정책에 대한 반기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퀘백에서는 다문화주의 대신 “문화상호주의”가 선호된다.

    퀘백의 “문화상호주의”는 퀘백 내 프랑스 헤게모니의 공고함, 그리고 시민권 부여의 전제로 프랑스 헤게모니에 대한 동화를 요구하는 것 등을 특징으로 한다. 퀘백이 지난 20년간 추진해 온 교육, 이민, 공공표지, 원주민 정책등은 이 “문화상호주의”의 역사적 증거들이다.

    모든 이민자의 아동은 프랑스어 학교를 다니도록 하고 영어 학교를 다니는 것은 금지하는 이민법안 역시 이 시기에 통과되었다. 공공표지에는 오직 프랑스어만이 허용되었으며 영어나 다른 언어는 금지되었다. 퀘백 내셔널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 “프랑스”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오랜 국가적 포부에 캐나다식 연방주의가 방해가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다른 내셔널리즘처럼 퀘백 내셔널리즘은 국가의 경계에서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지에 대해 복잡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퀘백 공문서의 담론을 연구한 한 연구에서는 “퀘백의 민족적 분절의 개념 모델은 개인들의 완전한 통합(미국식의 용광로)이나 평등주의적 병치(캐나다식 모자이크)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신화적 가치의 “퀘백 국가”와 “문화적 공동체”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위계적 구조에 가깝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내셔널리즘은 페미니스트 이슈에서도 진화하고 있다. 1970년대 내셔널리스트 동맹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1980년대 “인구적 문제”가 등장하면서 국가 생존이라는 전통적 기표가 재등장하였다.

    1960년대부터 하락한 퀘백 출산율은 다른 자본주의 고도 발달 국가처럼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고 내셔널리스트들은 인구 위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1988년 리버럴 정부는 세번째 혹은 그 이상 아이를 갖는 여성에게 한 아이당 4,500불의 수당 지급을 도입하였다.

    출산 등 여성 의제를 자연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민족의 정의를 ‘분명하게’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 “‘국가’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자연적’이고 통과가 불가능하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으로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 없으며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가 아닌가는 출생에서부터 결정된다.”

    게이 레즈비언의 경우에도 유사한 내셔널리스트 담론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몬트리올 대학의 ‘동성애에 대한 학제간 연구 그룹’은 1995년 분리독립 주민투표 두 달 이전 “국가적 문제”에 관한 콜리키움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콜로키움에서 프랑스어권 젊은 학자들은 게이 레즈비언 권리에 관한 내셔널리스트들의 레토릭에 대해 불안을 토로하였다. 한 보고서는 퀘백의 공적 담론 내에 레즈비언 게이에 관한 언급이 완전히 사라지고 “가족” 그리고 “국가”가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994년 퀘백당의 공식 당 강령에서는 환경주의자,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자, 원주민 의제에 대해서는 각각 별도 섹션을 할애하고 있으나 레즈비언 게이 의제는 강령에서 사라졌다.

    대신 강령은 “자주 독립은 퀘백에 효과적이며 일관된 가족 정책이 수립될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퀘백의 젊은 세대 활동가들은 1980년대 및 90년대 들어 게이 레즈비언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고려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캐나다에서 독립하여 인종-민족적으로 순수해진 ‘퀘백 국가’가 마이너리티 권리 보호를 제도화할지를 묻는 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연방의회의 퀘백 의원들은 내셔널리스트 퀘백당 소속이든 리버럴 연방주의당 소속이든 캐나다 인권법에 성적 지향을 삽입하는 것에 찬성투표하였다.

    1995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연방의회 의원인 레알 메나드 퀘백당 의원은 연방의회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M-264 법안을 발의하면서 연설에서 끝끝내 법안을 패배시킬 ‘연방 의회 반동’들에 의해 퀘백인들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퀘백의 자주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퀘백 수상 리쉬엥 부샤르는 1995년 퀘백 분리독립 주민투표 캠페인 중 온타리오나 알버타의 ‘화전식’ 신보수주의 경제 의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퀘백의 자주통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퀘백이 다른 지역보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더 저항하고 있지는 않다.

    퀘백 게이 레즈비언 공동체의 상당수는 연방주의는 비지니스나 정치적 위협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며, 내셔널리즘이 연방주의보다 호의적인 안식처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 후 권위주의의 재래를 막을 만한 안전책을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퀘백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퀘백이 없는 캐나다

    프랑스어권과 영어권 문화 사이의 긴 역사적 교착, 연방 다문화주의, 약한 연방국가는 무한한 타협과 관용, 겸양이라는 캐나다의 특징을 만들어냈으며, 엘리트 헤게모니에 손상을 주었다. 특히 1990년대 퀘백 내셔널리즘은 연방 국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퀘백이 없는 영어권 캐나다는 두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1960년대 1970년대 진보적 캐나다 국가 정체성을 추구하는 운동이 퀘백의 “조용한 혁명”과 함께 등장했다. 이들 좌파 내셔널리스트 경향은 소위 신민주당의 “와플” 분파와 협력하여 경제, 대외정책, 문화 등의 영역에서 (주로 미국으로부터 벗어난) 캐나다의 자율성을 수호하려 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1) 느슨한 지역 연합에 기반해서는 공통성을 그려내기 어렵다는 점 (2) 캐나다 내셔널리스트 프로젝트에서 퀘백을 포함시키는 게 어렵다는 점 (3) 할리우드 제국과 캐나다 영어권 대중문화의 높은 동화성 (4) 북미자유협정을 체결한 캐나다 정치인들과 기업계의 결정에 따른 캐나다의 미국으로의 정치, 경제, 문화적 ‘포섭’ 등의 어려움에 부딪쳐 곤란을 겪는 중이다.

    개혁당(극우파)은 또다른 요소이다. 개혁당은 퀘백당을 의회에서 물러나게 하고 개혁당이 공식 야당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개혁당 성향 유권자들은 퀘백에서는 무시할 만하지만 앵글로-캐나다에서는 무시못할 숫자이다. 중산층 남성, 고소득, 영어 사용자들이 개혁당의 핵심 보수층을 이루며 캐나다에서 가장 잘 조직된 정치적 세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현재는 5.9%이나 퀘백이 없는 캐나다에서는 7.5%를 차지하게 된다. 개혁당은 강하게 다문화주의, 이민, “특수 이해 그룹”에 반대하고 권위적인 백인 앵글로섹슨 기독교 유권자들을 대변한다.

    1995년 퀘백당 대다수 의원들은 메나드의 동성관계 인정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지만, 개혁당은 레즈비언 게이들을 가족의 파괴로 규정짓고 만장일치로 이에 반대하였다. 1명을 제외한 모든 개혁당 의원들이 1996년 캐나다 인권법에의 “성적 지향” 포함에 반대하였다.

    세계화와 신보수주의

    세계화된 국제 경제 체계에서 ‘퀘백이 없는 캐나다’가 어떻게 비추어질까. 캐나다는 보수정부가 미국과 NAFTA를 체결함으로써 지난 한 세기간의 경제 보호주의를 버리고 세계화로 새롭게 투항하였다.

    캐나다는 아직 미국처럼 신보수주의적 경제 사회 의제가 결합되지는 않았다. 또한 “지방 정부 사회주의를 독재로, 반인종주의를 민주적 자유에 대한 침해로, 레즈비언 게이 정치를 AIDS 유행으로, 환경 규제를 유럽 관료들에 대한 국가 자주성의 굴복으로” 정의하고 공격하는 대처리즘의 특징이 바로 캐나다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가 국가 문화를 보다 억압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분석은 캐나다에서도 유효하다. 어떻게 사회적 보수주의가 경제적 보수주의에 결부될 것인지가 남아 있는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보수주의의 결합은 다른 주변부 그룹과 마찬가지로 게이 레즈비언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결합이 되어 왔다.

    1980년대와 90년대 신보수주의와 도덕적 규제의 접합은 국가와 국가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국가 지출의 감축은 캐나다 게이 레즈비언 조직에는 매우 적은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에서 게이 레즈비언들은 국가 지출이나 국가 정책에서 항상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보수주의 의제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적’에 대응하는 도덕적 권위와 문화적 헤게모니를 약속하면서 다수의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의 투표를 모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적에서 공산주의자가 빠지면서 비백인, 이주민, 원주민, 미혼모, 게이 레즈비언들이 새로운 적이 되었다. 신보수주의는 이들에 대한 대응과 도덕적 헤게모니 지위를 약속하면서 표를 호소한다.

    대안적 시나리오는 뉴질랜드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뉴질랜드는 신보수주의의 흐름에 따른 경제 구조 조정으로 고통 받아 왔지만 게이 레즈비언 이슈에 대한 심도깊은 국가 논쟁으로 도덕적 규제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레즈비언 게이들의 법적 지위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가 이끄는 앵글로-색슨 전통주의자들과 앙글로-마오리 식 비젼 지지자들 간의 갈등의 핵심에 있었다. 게이 레즈비언 인권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전쟁은 결국 국가 체제에 동성애자들을 포함시키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며 인권법에 성적 지향을 포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퀘백 분리가 일어난다면, 캐나다의 영국/프랑스 교착 상태는 소멸되고 양쪽은 보다 분명하고 “순수한” 인종 문화로 나아갈 것이다. 영어권 캐나다에서는 신보수주의 개혁당이 약진하고 리버럴리즘은 이러한 경향에 거의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퀘백 분리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국/프랑스의 교착 상태는 캐나다 내 노동운동 발전과 사회민주당(신민주당)의 충분한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이해되어 왔다. 퀘백 내 노동조직들은 퀘백의 내셔널리스트들과 전통적 동맹을 맺어 왔기 때문에 신민주당은 한번도 퀘백을 기반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퀘백 기반 없이 당을 꾸려가면서 캐나다에서 정부를 수립하기란 쉽지 않으며, 퀘백 분리는 신민주당의 약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캐나다의 연방 신민주당과 좌파세력의 몰락은 이러한 가능성을 별반 남겨두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