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출부에서 공장노동자로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3-3] 배우지 못해서 반장 못 돼
        2013년 07월 16일 0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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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의 김옥순 조합원 구술 생애사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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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머슴일과 거리감에서 달랐던 서울 파출부 경험

    (필자) 아까 파출부 일은 성격에 안 맞는다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안 맞으셨어요?

    (김옥순) 파출부를 하면 일도 대충 하고 그래야 하는데…철저하니 깨끗이 해야 되는 줄 알고-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지금 생각하면. 눈치가 보여서 못하겄더라고, 눈치가 보여서.

    (필자) 어떤 눈치요? 일을 계속 하고 있어야 될 것 같고 그런?

    (김옥순) 네. 돈 주는 시간인데 방에 가서 앉았기도 싫고 그렇더라고. 그냥 그때 생각에 신분차이도 많이 나는 것 같고 괜히…어떤 집은 가면 그래요. 계단 같은 것도 전부 손걸레로 닦고. 커텐 같은 것 이불 같은 것도 늘 빨면서 늘 손으로 빨으라고 . 와이셔츠 매일매일 벗어놓은 거 대려야 되구. 그런 것들이 싫더라고. 우리는 그냥 와이셔츠 같은 것도 한 번에 모았다 이렇게 하는데. 다 대려야 하고….못해, 못해…

    (필자) 일의 양 자체만 놓고 보면, 조합원님은 원래 시골 계실 때도 일 많이 하셨잖아요. 그러면 일을 많이 하는 것 말고도, 파출부 일 자체가 안 맞으셨던 거예요?

    (김옥순) 일은 하겠는데, 일 많은 건 하겠는데, 반찬 하고 그런 건 하겠는데. 반찬은 해놔도 왜 이렇게 했냐 이건 맛없다, 왜 이렇게 해놨냐 이런 소리는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이거 맛있네요 어떻게 했는지 잘했어요, 이런 소리는 들었어도. 왜 이렇게 했냐, 시장도 봐오라면 잘못 사왔다 그런 소린 안 들어봤는데, 그래도 거리감이 왠지 싫어.

    녹록지 않았던 남원에서의 행랑살이 경험에도 불구하고, 조합원이 도시에서의 파출부 일을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음에는 다소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고용 관계가 신분적 관계, 권위적 관계의 모습을 띠었던 6,70년대 입주가사노동에 비해 ‘출근노동자로서 일정한 형태의 노동규칙과 규제체계를 갖춘 보다 근대적인 가사노동’(강이수, 「가사 서비스 노동의 변화의 맥락과 실태」)이었던 파출부 일이 상대적으로 더 평등하고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김옥순 조합원이 서울에서 파출부 일을 하며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에는 단순히 ‘고용 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위화감이 생활격차로 인해 있었던 것 같다.

    (필자) 거리감이요?

    (김옥순) 편치가 않아. 주인하고 마음이 통하지 않고, 내가 자꾸 위축감이 들고. 저 사람은 돈이 많고 나하고는 이렇게 뭐, 아주 차이가 많은 사람으로 느껴져 갖고 싫어.

    (필자) 근데 전에 시골에서도, 말하자면 ‘시골의 파출부’도 하셨던 거잖아요.

    (김옥순) 시골 파출부는 파출부가 아니야. 시골에서는 다 농사짓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집에 가서 일해주면 엄청 고마워하지. 우리같이 젊은 사람을 일꾼으로 얻으려면 우리를 대우를 엄청 해줘요. 우리 두 내외가 그야말로 젊고 일도 잘하고. 예를 들어서 싹싹하고 눈치껏 알아서 착착, 오늘 이걸 합니다, 하면 우리가 알아서 다 해버리기 때문에 우리만 오면 그날 일이 다 되는 거야. 그래서 엄청 대우받고…. 예를 들어서, 하다못해 반찬 한 두 모이라도 더 먹으라고, 애들 갖다 먹이라고 주고 그렇게 대우받고 일을 했는데. 서울에 와서 보니깐, 무조건 머슴은 머슴이고 식모는 식모야. 서울에 오면은, 아주 이게, 차이가 완전 저기 되드만…. 없는 사람은 차별대우하고. 그러니까 그런 게 싫어서.

    공장 가면 똑같은 대우 받잖아요. 공장에서는 뭐 여럿이 하니까, 그냥 똑같이 뭐… 그런데 그런 가정집에 들어가면….내가 그러니까 좀 예민했나봐 지금 생각해보면.

    난 무슨 일을 해도 대우를 받고 했지, 어디 가서나. 그렇기 때문에 파출부일은 내가 갈 데가 아닌 것 같애.

    “일 잘한다”라는 자부심 

    (필자) 그런데 공장에서는 위에 감독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거나 그런 일은 없으셨어요?

    (김옥순)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그거는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자랑 아닌데. 자랑 같나? 항상 일을 하면 거기에서 인정을 받았지, 미움을 사지를 않았어요. 난 그거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애. 어디에든지 가도. 아줌마 뭐 이렇게 했어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를 못했어, 아직까지는. 돈이 없어 탈이지. 어디 가서 남한테 뭐 아줌마 못쓰겠다, 왜 이렇게 해놨냐 그런 소리를 안 들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일하는 중에서도 귀염을 받았다 그래야 되나 인정을 받았다 그래야 되나. 그렇기 때문에, 딴 사람은 막 저기했어도 그런 거는 못 겪었어요. 일할 때.

    (필자) 그럼 감독이 있고 해서 특별히 힘들고 그렇진 않으셨나 봐요.

    (김옥순) 네. 미싱할 때도-처음엔 미싱을 못하니까 시다를 했는데-시다할 때도 여반장이… 그땐 미싱 시다 사람 취급도 안했어. 월급도 조금 주고. 그땐 일자리가 귀하니까 젊으니까 그나마 그러고 눈치껏 하니까 그랬지. 시다도 시원찮게 했다가는 잘리고 그랬는데. 시킨 대로 내가 잘 했나봐. 그러니까 일을 하면 나갈까 싶어서, 어디든지, 벌벌 떨고. 어떻게라도 그냥, 그 사람들이 더 챙겨주고 이랬기 때문에. 몰랐어요 그런 거. 구박받고 그러지는 않았어, 일하면서. 거기서 항상 나갈까봐, 나가지 마라, 인정받고 했지.

    (필자) 그런데 일을 잘하셨다면, 사람이 아무래도 잘하는 일은 좋아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일이 재미있기도 하셨어요?

    (김옥순) 힘은 들어도. 그래도 어디에든지 가면은, 거기 아니면-학교도 마찬가지지만-여기 아니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렇게 일을 해서 그냥…. 그래서 억지로 하는 일은 없었어요. 허면 허는 대로 다… 나는 컴퓨터도 그렇잖아요. 컴퓨터도 하면 재미있으니까 이제까지 붙어서 하고. 신기해하고. 일을 해도, 어 이런 일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하니까 좋다 그런 마음으로 항상 하기 때문에, 일을 할 때마다 재미있었어요, 힘은 들어도. 보람도 느끼고.

    그동안 해온 여러 가지 노동에 대한 김옥순 조합원의 구체적인 생각은 각각 달랐지만, 모든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을 잘한다”는 자부심이었다. 조합원에게는 노동이 단순한 생계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옥순 조합원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다른 공장 노동자들에게서도 노동에 대한 의미 부여와 자부심을 찾아볼 수 있다. 노동청이 발행했던 정기간행물이라는 성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한 공장 노동자는 1970년대 발행된 『노동』에 투고한 수기에서 “직장에 충실해 일에 열중하다보니 다른 의욕이 새삼 생겼고”-비록 자신의 집에 TV 한 대 놓을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저의 조그마한 손놀림이 하루에 일 이 천대 이상 TV를 생산하는 일부분을 담당한다는 일하는 보람에 대한 즐거움을 찾았다“고 말했다.(박세련,「누가 이 소녀에게 미소를」, 『노동』, 1976)

    또 다른 노동자의 수기에서도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그는 “도자기 요업을 알았을 때 이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까지도 진실하게 느꼈고” 자신의 직업에 “추호도 짜증과 권태를 모르고 살아왔다“고 말했다.(김정자,「억척스런 가시내」,『노동』, 1978)

    봉제공장

    (필자) 공장에서는 어떤 일을 주로 하셨어요?

    (김옥순) 공장은 봉제를 많이 했어요. 교복을. 교복이 영락없는 양복이에요. 이게 쉬운 것 같아도 소매 하나만 잘못 달리면 옷이 진짜 안 편하고 안 맞아. 누가 옛날에 양복쟁이가, 양복 기술자가 약속을 하자 그러면 소매를 달아봐야 안다고 그랬대. 하도 이게 까다로우니까. 근데 그 까다로운 양복 교복 이거를 내가 다 달거든. 앞에서 이렇게 몸통 해서 내면, 끝에 앉아서 소매를 내가 달아놓으면, 그 다음으론 애리(※옷깃을 뜻하는 일본어)를 달아갖고 완성이 되거든. 진짜 그런 것도 한 번도 어려움 없이 잘하고, 여튼 돈이 없는 대신 그런 건 잘했나봐 시키는 건. 그러니까 봉제해도 일이 그렇게 막 힘들거나 그러진 않았어…시간은 길지. 시간은 길어요. 계속 하니까 팔하고 목 디스크가 걸려가지고… 에이고. 그때 삼성 ss패션 그런 데 다녔지. 티 만드는 데. 공장도 메이커만, 좀 괜찮은 데로만 다녔어.

    배우지 못해 반장을 하지 못하고 나머지 청소를 계속해야…

    한번은 이제, 집에서 에스콰이아 신발을 갖다가, 에스콰이아 공장에서 신발끈을 갖다가 요렇게 왜 뀌는 거 많잖아 에스콰이아 신발은. 또 이렇게 가죽끈을 갖다가 끈을 뀌어 가방도 만들고 했는데, 하도 일을 야무지게 했던지. 신을 한 삼십 쪽을 오늘 가져오면, 내일 아침 아홉시까지 작업하게 갖다가 줘야 돼. 그러면 그걸 밤을 새어서라도 기어이 다해서 갖다 주고 갖다 주고 했는데. 거기 반장이, 여자 반장이 아가씬데,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일하라고 하도 그래서… 이제 집 옆이니까 가서 일을 했는데, 거기서 반장이 시집을 가게 돼서 나보고 사장이 반장을 하라고 그러는디.

    아 근데 이놈의 영어를 알아야지. 에스콰이아 그 이런 거 쓴 것이 영어예요. 뭐 니들이라 그러나 택이라 그러나. 그런 것들 써서 붙이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중학교만 나왔으면 내가. 그래서 그때같이 후회해본 적이 없었지. 중학교만 내가 나왔으면 이거를 할 수 있었는데. abcd를 모르고. 나 국민학교도 어렵게 어렵게, 2학년 때 사친회비 못 내서 중퇴했다가 쑥 캐서 팔아서. 힘들게 어떻게 어떻게 국민학교를 가서, 엄마가 그래도 좀 도와주시고 해서 했는데.

    근데 영어를 해야 반장을 하지. 반장을 하면 편하고 돈도 많이 받고…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못 배운 게 아주 그렇게….

    (필자) 그러면 그 전에 반장하던 분은 영어를 할 줄 아셨던 거예요?

    (김옥순) 그렇죠, 아가씨니까. 나는 옛날 아줌마였고 그래도 내가 그때만 해도 한 사십대 초반이었나? 그 아가씨는 영어를 알아서 그런 걸 하고 그랬는데… 영어 조금만 알아도 한다고 그랬거덩. 근데 a가 뭔지 b가 뭔지도 몰랐는데 뭐, a b가 뭔지도 모르고 진짜 그냥, 그런 상태에서 얼마나 그때 서럽던지. 그때같이 속상해 본 일은 없었어.

    (필자) 안 그래도 조합원님은 공부에 대한 한이 있으셨잖아요.

    (김옥순) 네, 공부가 한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아들은 맨날 지가 공부하고 나면 나보고 공부 보내준다고 그랬는데 즈그 살기 바쁘지. 내가 맨날 공부, 공부 하니까 그랬는데. 에휴…. 엄청 후회했어요 그때. 중학교만 내가 갔으면 내가 나머지 쓰레기 청소 그런 거 안 하고 공장에서 그래도 박스 같은 데 그런 거 붙이고, 택 달고 해서 숫자 세서 적어서 납품 보낼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영어를 모르니까 뭐. 똑같은 글자를 찾아서 해야 되는데 뭘 알아야지. 사이즈 그런 거 그때만 해도 잘… 지금만 같아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애.

    김옥순 조합원은 컴퓨터 교실의 학강(※학생. 컴퓨터 교실에서는 ‘배우는 동시에 가르친다’는 뜻에서 ‘학생’ 대신 ‘학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들 중에서도 특히 출석률이 높고 열성적인 학강으로 꼽힌다. 컴퓨터 교실에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된 김옥순 조합원에게는 대부분의 수업 내용이 익숙하다보니 싫증을 낼 법도 한데,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며 꾸준히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합원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배움에의 의지와 욕구뿐 아니라, 위와 같이 실제로 지식(영어)이 더 나은 노동 조건과 소득으로 이어짐을 실제로 체험한 것이 배움에 대한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지금은 그래도 abcd 다 아시잖아요.

    (김옥순) 응. 지금은 그래도 보면, 저것이 r인지 뭔지 쪼끔은 알지 자세히는 몰라도. 지금 같으면 저녁에 와서 그거 하고 막 외우고 해서 했을 거야. 그런데 그때는 뭐, 아예 까마득하니깐 엄두를 못 냈지 솔직히. 거리가 먼 줄 알고 아주. 간단한 영어인데도. 그때 많이 후회했어요 진짜. 공부를 못 해서.

    공장 노동에 대한 김옥순 조합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강한 의문이 생겨났다. 당시의 많은 공장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장 환경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어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악조건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옥순 조합원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으며 큰 불만 없이 순응하며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김옥순 조합원이 대학에서 청소 노동을 하며 노조에 참여하고 저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궁금해졌다.  <계속>

    필자소개
    유채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생. 교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컴퓨터를 배우는 모임인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을 통해 구술생애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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