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모하는 자식을
    쫓아다니며 말리는 어머니
    [어머니 이야기 15] 가장 가까운 어머니 마음도 못 바꾼 안타까움
        2013년 07월 15일 1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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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글은 어머니가 나를 키우면서 겪었던 이야기다. “니가 태어날 때 물구덩이에서 태어나서 먹을 것도 없고 그랬지. 그래 그 얘기는 전번에 했지.”

    내가 다섯 살 때 휘경동 위생병원 가까이 사는 작은 집으로 가다가 어머니는 나를 잃어 버렸다. 어머니는 말을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으로 팔을 두드렸다.

    “내가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얘기하는 동안 너가 없어진 거야. 나는 반팔 입었다는 것이 말이 안 나와서 팔만 두드렸지. 그러다 너가 어느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 그 뒤론 나는 절대 아들 손을 놓고 다니지 않는다. 니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진 만날 축구공 들고 야구 방망이 들고 다니며 놀러 다녔지. 그러다 4학년 되니까 공부를 잘했어. 니는 과외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갔어.”

    “니 대학 들어갈 때 내가 5일간 따라다녔지. 버스 타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우겨서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들어갔지.”

    나는 1984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시골에 살던 할아버지가 서울에 내려오셨다. 몸이 많이 아프셔서 서울 큰 병원에 고치러 왔다. 하지만 병이 너무 깊어서 고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종복아, 니는 나중에 농과대학 들어가라. 그래서 이 할아비랑 농사지으며 살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정작 농과대학을 들어가겠다고 하니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 없으니 그런 꿈은 꾸지도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대학 입학식에 참석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그 해 6월에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날, 음력 6월 18일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래서 한 동안 내 생일 잔치는 치르지 않았다. 그땐 학기 중이라 할머니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금슬 좋은 부부는 함께 간다고 이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땐 방학이라 시골에 내려갔다. “보지 말라고 했는데 니가 할아버지 염하는 것을 문틈으로 옆으로 사람 틈으로 봤지. 그러구 너는 많이 아팠어.”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처음에는 한동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밤이 어두워 사람들이 잠자리를 찾으러 부산거릴 때 혼자 밖으로 나와 길을 걸었다. 하늘에 하얗게 떠 있는 별들을 보는데 갑자기 속에서부터 울컥한 것이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시골 고샅길을 걸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겨울방학이 되면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시골에 내려갔다. 어머니는 집에 먹을거리가 없으니 아들들을 방학하자마자 시골에 내려 보냈다.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을 불러 모아서 다락방에 있는 상자에서 사탕을 꺼내 주셨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가고 나면 나를 한 번 더 불러서 사탕을 더 주셨다. 그러면서 꼭 농과대학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랑 농사지으며 살자고 했다.

    나는 그날 밤 할아버지 집에 잠자리가 없어 5분쯤 걸어가서 사촌 큰누나 집에서 잤다. 밤새도록 천둥 번개가 쳤다. 한여름이었는데 무척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할아버지 집에 와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사람 얼굴이 여러 개로 보이면서 의식이 왔다 갔다 했다. 나는 할아버지 장례 치르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서울로 바로 올라왔다.

    “니가 많이 아파서 급하게 삼베 치마 둘둘 말아서 입고 서울로 올라왔지. 비가 어찌나 오던지. 차도 다닐 수 없어서 서울에 와서 큰애 오토바이 타고 집 가까이 최내과에 갔지. 그랬더니 어서 큰 병원 가보라고 해서 동부시립병원 갔어.”

    나는 폐가 망가졌다. 늑막염에 폐결핵을 앓아서 엑스레이를 찍으면 폐 두 쪽이 모두 하얗게 나왔다. “니 삼촌은 자꾸 굿하라고 했지만 입원을 시켰어. 스무 하루를 있다가 퇴원했지. 그리구 군대 영장이 나온 거야.”

    그 해 9월엔 비가 많이 와서 학교들이 휴교를 했다. 물난리가 나서 북한에서 쌀을 보내 주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를 휴학하고 대구육군통합병원으로 군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어머니도 같이 갔다.

    “그곳엔 새도 한 마리 날아들지 못 하는 곳이야. 내가 새로(샛길로) 몸을 웅크리고 살금살금 따라 들어갔어. 전부 팬티만 입고 번호를 부르니까, 하나 둘 하면서 있었어. 나를 보자 거기 높은 사람인가 중대장인가가 깜짝 놀라면서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 그러는 거야. 내가 그랬지. 내 아들이 너무 아파서 겁나서 따라 들어왔다고 했지. 그러더니 그 높은 사람이 그러면 이쪽에 가만 앉아 있으라고 했어.”

    나는 군의관 앞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보기 앞서서 어떤 다른 사병에게서 “아주머니 걱정 마세요. 운이 좋아서 이 사람 나가고 다음 사람 들어오면 좋아요.” 내 앞에서 군의관이 바뀌었고 그는 내게 학교에서 데모를 많이 하냐고 물었고 내가 이제 1학년인데 뭘 알아서 데모를 하냐고 말했다.

    그땐 전두환이 광주 사람들을 총칼로 죽이고 정권을 잡아 대학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다니던 대학에선 연합집회가 있어서 막 텔레비전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군의관이 나를 면접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왔다. “아니, 어머니는 여기 들어오시면 안돼요.” “아니, 아들이 아파서 죽으려 하는데 어디인들 못 가요. 아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물속에라도 들어가고 불속에라도 들어가요.” 그랬더니 그 군의관이 어머니 보고 “대단한 어머니!”라고 했다.

    아무튼 나는 군대를 면제 받았다. 어머니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니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무슨 군대 훈련을 받더니, 엄마 나 군대 가면 죽을 것 같아. 그랬다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너 살리려고 군대 안 가게 해 주었다”고 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군대 유격훈련을 받는 문무대에 들어갔다. 2학년 땐 전방입소를 해야 하는데 이재호, 김세진이 온몸을 불사르며 양키용병훈련거부를 외쳐서 없어졌다.

    나는 한 해를 쉬고 다음 해에 복학을 했다. 날마다 데모를 하러 학교에 갔다. 학사경고를 두 번 연속 받았다. 어머니는 대학에 와서 학장을 만났다. “내가 학장을 두 번이나 만났지. 학장한테 그랬어. 내가 배운 게 없어서 내 아들들 대학을 졸업시키고 싶은데 어쩌면 좋아요.”

    학장이 말했다. “나도 종복이에게 학점을 주고 싶은데, 시험도 안 보고 숙제도 안 내니. 그래도 종복이는 결석을 안했으니까 어떻게 해 보죠.”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사실 대학을 그만두고 싶었는데, 어머니 힘이었는지 아니면 돈을 밝히는 대학정책 때문인지 학칙에 따르면 퇴학인데 학교를 졸업했다. 남들은 8학기면 학교를 마치는데 난 12학기를 다녔다. “니가 대학을 몇 년 다녔냐. 7년이냐 8년이냐, 모르겠다.”

    “어느 날은 아침에 내가 나물 다듬고 있는데, 니가 학교 간다고 하더라. 시험 있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그날 슬리퍼를 신고 나를 따라 나섰다. 어머니가 동네 통장 일을 보고 있어서 그날 데모하러 아들이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87년 민주화시위 장면 사진 출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 민주화시위 장면 사진 출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박종철은 물고문으로 죽고 이한열은 직격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나는 날마다 데모를 하러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나를 바짝 따라왔다. 학교에선 벌써 수 천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최루탄, 지랄탄(다연발탄)이 터지면서 전투경찰과 백골단들이 마구 학교 교정으로 쳐들어왔다.

    “너를 따라 학교에 가니까 무슨 고사를 지내더라. 그러더니 수류탄(최루탄)이 마구 터지는 거야. 학생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 그러니까 학생들이 밀고 나가려고 했지. 니는 엄마 다친다고 손을 꽉 잡고 여기 가만 앉아 있으라고 했어. 나는 그랬지. 니가 앉아있으면 나도 앉아있고 그렇지 않으면 난 불구덩이라고 들어간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학생회관 4층으로 갔다. 내가 문학모임을 하는 곳이다. 그곳까지 최루냄새가 몰려왔다. 그날 어머니는 나를 따라서 청량리로 발이 부르트도록 쫓아다녔다. “야 말도 마라. 너 쫓아다니느라 집에 오니 2시간 넘었지. 배가 고파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너를 감시하고 쫓아다녔으니까 책방도 하고 그랬지. 안 그랬으면 넌 지금 교도소에 있을 거야.”

    어머니는 내가 집에 안 들어오면 학교에 찾아와서 나를 찾았다. 어느 날은 내가 도서관에 있다고 하는데 집에 오지를 않자 찾아 나섰다.

    “그때는 핸드폰이 있냐 뭐가 있냐 내 발로 찾아 나섰지. 니가 또 어디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 학생이 2천 명이 넘는데 내가 도서관 3층까지 줄줄이 다니면서 찾으니까, 학생들이 여기서 못 찾는다고 했어. 하지만 난 찾는다고 하면서 결국 너를 찾았지. 그랬더니 너는 옆에 있는 후배 이름을 부르더니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주면서 배고프면 사먹으라고 하더라. 아무튼 너는 2천 원을 주면 천 원 쓰고 나머지는 다 후배들 주었지. 엄마가 내일 또 차비 줄 테니까 하면서. 그래도 돈이 조금 있으면 니 형수 고구마, 옥수수 사갖고 왔지. 아무튼 너는 돈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구 한 날은 내가 김치를 담그고 있는데 학교 간다고 용돈을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엄마 지갑에 돈 꺼내가라고 하니까. 니가 그러면 많이 가지고 간다고 안 된다고 하더라. 엄만 돈도 별로 없지만 난 그 말이 생전 안 잊혀진다.”

    어머니는 또 한 번은 학교에 나를 찾으러 왔다. 학교 총학생회실에 와서 나를 찾아내라고 생떼를 썼다. 그곳에 있던 학생이 “오늘 데모를 하다가 200명 정도 잡혀갔다”고 했다. 어머니는 학생회 벽에 붙어 있는 나무로 된 임수경 사진을 보았다. 임수경은 남한 학생으론 처음으로 북한 평양에 가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온 사람이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하니 어머니는 그 나무를 확 뜯었다. “어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영창 가요.” 어머니는 더욱 화가 나서 그 나무를 발기발기 쪼개서 휙 뿌렸다.

    “그 학생회 간부지, 높은 사람이 그러더라. 살면서 이런 아줌마는 처음 본다고. 그러면서 너가 데모하다가 붙들려갔는데 오늘 밤에 나올 거라고 했어. 근데 넌 다음 날 아침이 되서야 나왔지.”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집에 오는 길에 파출소를 지나쳐 온다. 그땐 파출소에 꼭 철망을 두르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져서 파출소가 불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 그 파출서 담벼락에 오줌을 갈겼다. 그러다 걸렸다. “어이, 여기다 오줌을 누면 어떡해?” 경찰관은 내게 딱지를 끊으려 했다. “이왕 끊을 거면 제일 비싼 걸로 끊어요.” 어느 날 집으로 벌금 용지가 날라 왔다.

    “야, 말도 마라. 오줌 한 번 눴다고 2만 5천 원짜리 딱지가 날라 왔다. 그걸 들고 파출소에 갔더니 경찰이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경찰관 말이 오줌 한 번 비싸게 눴다고 웃더라. 할튼 말 마라. 니는 에미 속 많이 태웠다.”

    1991년 봄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이 백골단에 짓밟혀 죽었다. 나는 그날도 데모를 하러 집에서 몰래 나오려 했다. 어머니는 또 따라 나섰다. 지하철엔 아침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학생들도 가득 찼다. 성대 수원캠퍼스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어머니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계집애 하나 죽었다고 이 난리야.” 나는 어머니가 더 이상 말을 못 하도록 막았다. 화가 난 학생들이 어머니를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혜화역을 나서니 전투경찰들이 짝 깔렸다. 혜화역 들머리에서 혹시 화염병 같은 시위용품이 있는지 보려고 가방 검사를 했다. 나는 어머니 손을 꼭 잡고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금잔디광장엔 수 만 명이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또 말했다. “여기다 폭탄을 터뜨려서 다 죽여 버려야 돼.”

    나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내가 그렇게 많이 데모를 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어머니 한 사람 바꾸지 못했으니 내가 어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시위대는 교문을 밀쳐 나갔다. 최루탄이 터지고 한꺼번에 서른 발 넘게 쏘는 지랄탄이 마구 터졌다. 하지만 수많은 시위대를 막을 수 없었다. 열사람씩 열을 지어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로 나갔다. 미국놈들 물러가라! 군부독재 타도하자! 학살정권 살인정권 노태우 정권 물러가라!

    어머니는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김대중이가 시켜서 그러는 거지.” “어머니, 그럼 내가 구호를 외칠 테니까, 어쩐가 보세요.” 기만적인 정치놀음 김대중은 각성하라! 내가 이렇게 구호를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기만적인 정치놀음 김대중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하고 따라 외쳤다.

    어머니는 조금 의아해했다. 하지만 자꾸 김대중이가 돈을 주고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우겼다. 그날 어머니는 나를 따라서 명동 백병원과 명동성당까지 갔다. 백병원은 김귀정 시신을 지킨 곳이고, 명동성당은 6월 항쟁에 불씨를 놓았던 곳이다. 어머니와 나는 아침밥을 먹은 뒤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날은 어두워 저녁 9시를 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쫓아서 갑자기 나오느라 돈을 챙겨 오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빵과 우유를 샀다. 나는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제일이네. 에미 배고픈 것은 알고.” 어머니는 빵과 우유를 먹을 듯하다가 못 먹겠다면서 내게 주었다. 나도 배가 고팠지만 어머니가 먹지 않는데 나 혼자 먹을 수 없었다. “어머니, 이 빵을 드시면 집에 들어갈게요.” 그렇게 어머니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일을 어머니에게 물었는데 하나도 기억을 못했다. 기억을 안 하려고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그날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1992년 겨울 나는 대학을 겨우 마치고 집에서 소설을 쓴다고 하다가 동네 신문보급소에서 배달원을 찾는다고 해서 일하게 되었다. 한겨레신문 보급소다. 나는 한겨레신문 창간 독자였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신문을 날랐다. ‘일하는주민회’라는 지역 운동도 함께 했다.

    “니가 새벽에 운동을 한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지. 낮엔 글도 쓰고 취업 공부도 한다고 해서. 근데 일 년이 지나도록 신문배달만 하는 거야. 나중에 신문보급소를 하겠다고 해서 내가 안 된다고 했지. 대학까지 나와서 평생 신문만 나르겠냐고.”

    어머니는 신문보급소장을 만나 내가 그 일을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보급소장을 만나 말했다. “당신 아들 같으면 대학을 나와서 신문배달부를 시키겠냐고. 그랬더니 딱 일 년만 더 일하게 해달라고 했어. 하지만 난 안 된다고 했지. 내가 대신 신문을 나르겠다고 했어. 일할 사람이 생길 때까지 나르겠다고.”

    나는 신문을 나르다가 김영삼이 대표로 있는 민자당 깡패들에게 잡혀서 얻어맞기도 했다. 대통령 공명선거운동을 하자는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에 주차장으로 끌려가 오뉴월 개 패듯이 맞았다. 병원에 3일 동안 입원을 했다. 경찰은 나를 때린 사람들은 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난 그 일로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벌금을 내야 했다.

    아무튼 나는 어머니에게 불효자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진 순한 양처럼 살았는데 대학을 들어오고 나서 5.18 광주 항쟁에서 군부 총칼로 사지가 찢어진 사진을 봤을 때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유신혁명을 했던 박정희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좌에 앉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역사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 목숨 바쳐 조국의 정의를 구하고 싶었다. 북녘에 사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물들어 남녘을 호시탐탐 적화야욕을 노린다고 들었는데 남북이 갈라진 것은 미국놈들이 나서서 그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손에 볼펜 자루를 쥐는 대신 돌과 화염병을 들었다.

    이 마음을 어머니는 알까. 아니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나를 지켜주고 늘 감시를 해서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제 목숨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나는 1987년 6월 항쟁 때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다. 학교 교정까지 쫓아온 전투경찰이 직격탄을 쏘아서 내 뒷목을 맞혔다. 나는 바로 기절했다. 그날 마침 내가 함께 하는 문학회에서 시화전이 있는 날이라 후배들이 나를 보고 들쳐 업고 왔다. 잠시 뒤 깨어나긴 했지만 그 최루탄이 조금만 더 머리 위쪽으로 맞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연세대학교에서 수 만 명이 모여 연합집회를 할 때 앞에 나섰다가 최루탄이 교문 벽에 터지면서 최루분말이 얼굴로 쏟아져 또 한 번 기절했다. 그때는 한참 무더울 때여서 등짝으로 수포가 생겨 두 달 가까이 머리를 감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이 늘 못마땅했다. 그래도 자식 사랑은 끝이 없다.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며칠째 내린 비로 길도 마음도 축축한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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