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아가씨,
    머슴생활 청산하고 서울로
    [노동자 구술생애사 3-2] "내 새끼들 손에 흙 묻히기 싫다"
        2013년 07월 12일 12: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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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순 조합원의 구술사 첫 회 링크

    ***

    지난 인터뷰에서는 조합원의 어린 시절과 결혼 이야기, 그리고 결혼 초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이번 인터뷰에서는 남의 집 행랑살이를 했던 이야기, 그리고 상경 후 서울에서의 삶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난 때문에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다

    (필자) 남원에 사실 때요, 조합원님 댁은 땅을 많이 가지고 계셨어요?

    (김옥순) 절대 많지 않았죠. 처음에 큰애를 놨는데, 너무 먹을 게 없어 가지고 그 동네에서 최고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간 거야. 애기 그 뻘건 걸 데리고. 섣달에 추울 때, 살림은 숟가락 하나 밥그릇 하나, 이렇게 해가지고, 쌀 요만큼 해서 담아 갖고 무 몇 개 씻은 것 송판에 이고, 그 집 부잣집에 식모, 머슴 들어간 거지. 아휴…. 말도 못했어요 말도 못해. 그 사람이 아주, 동네 최고 부잔데, 과택이야.

    그런데 부자고 하니까 거기 밥 해주는 아가씨 있고, 나하고 우리 아저씨하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머슴이 셋이지. 양식도 없고 우리 시댁이 하도 가난하고 쌀도 없고 그러니까. 그 집 일 해주고 얻어먹고 사는 거야 이제. 눈만 뜨면 그 집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사는데…세상에 시어머니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 시어머니가 어렵대죠? 그래도 시어머니는 내 부모라고 좋은데 그 사람은요, 호랭이보다 더 무서워. 남의 집 가보니까.

    옛날에 부잣집에 문이 많잖아요. 그러면 이제 거울을 이따만하게 문에다 붙여놔. 가택이고 그러니까 사람을 다 거느려야 되니까는-호랭이 같이 해가지고-밖에 사람 형체만 알아볼 정도만 되면, 동이 틀 때면 벌써 앉아서 그 거울만 쳐다보고 앉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문간방에 사니깐, 몇 시에 들어가고 나오나 시계도 없지만은 벌써 알지.

    그래서 사람이 안 보일 때 나와서 일을 서둘러야 아무 소리 안 하지, 그렇지 않고 환해졌거나 그러면 막 난리가 나는 거야. 저렇게 해쳐먹고 해서 일 언제 다하려고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나는 또 꼼꼼해가지고 그 꼴을 못 봐요. 그래가지고 그 비위를 다 맞추고…. 세상에, 세상에.

    애기를 팔월에 난 거를 데리고 섣달에 거기 가 놓으니까는, 아직은 애기가 아주 갓난앤데… 애기 젖도 제대로 못 먹이고… 아침밥 해먹고 들에 가서 밭 매고. 그러고 나면 애기는 막 배가 고파서 울고. 들에 갔다 오면 애기가 아주 지쳐가지고… 우리 큰애 참 불쌍해. 젖은 이만큼 불어가지고 여기 치맛자락 다 젖고. 또 그걸 짜낸다고 짜내 멕여 놔도 막 설사를 해서. 말도 못했어.

    그래서 그렇게 살다가 힘들고 못 살겠어서 애기가 한번은 아팠어. 되게 아프더라고 애기가. 밤에 캄캄한데, 해가 저물었는데… 저 산고개를 하나 넘으면, 지금 생각하면 돌팔이 의사가 하나 있었어. 저녁에 밥을 하러 집에 오니까 거기 애기를 데리고 가라더라고. 그래서 이제 불덩이 같은 애를 업고 산고개를 넘어갔어. 넘어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방죽이 하나 있어. 내가 울다가, 저기서 빠져죽어야지. 그러고는 일단은 애기를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고는-치료를 헌다고 해도 그래, 시골이라-해갖고, 거기 엄청 무서운 덴데…나 같은 건 차라리 뭐가 잡아먹었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김옥순 조합원은 당시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물깃는머슴들

    물동이 지게를 지고 있는 머슴들 자료사진

    (김옥순) 캄캄한데 더듬더듬 오니까는, 세상에, 방죽 있는 데만큼 나왔더라고. 우리 신랑하고 할머니하고. 등불을 잡고. 하도 안 오고 하니까 좀 걱정됐나봐. 우리 애기가 재영인데, 재영아 재영아 하고 소리가 나더라고. 그래서 저 밑으로 내려오면서 귀신이 어디서 울어쌌나. 그러고 날은 희끄무레하고…근데 나도 간이 커. 그래 갖고 대답도 안하고 올라오다가. 할 수 없어서 그냥 여깄어요, 하니까 반가워갖고 그냥… 뛰어왔어. 에휴…죽도 못하고 또 따라 왔지 어째. 와야지….

    애 내팽겨 놓고 눈 뜨면 또 그렇게 일을 해야 돼. 소용없어… 그래갖고 무슨 놈의, 그 집에서 애를 하나 또 낳았어요, 8월에. 그니께 두 살 터울이구만. 또 그 집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 입덧을 또 심하게 했는데, 애를 또 낳아가지고는 아주… 그것도 추석 때. 그때는 추석 명절이 엄청, 아주 컸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 한가위만 같아라, 해갖고 밤이고 감이고 올리고. 새 쌀을 해서, 추석 명절을 어마어마하게 제일로 알고 하는데. 추석 돌아오기 한 삼일 전에 애를 낳아버렸어 내가.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래갖고 애는 어매가 또 조리도 못하고 그냥 콩 거둬오면 그거를 무릎을 꿇고, 그 놈을 이렇게 두드려요 마당에 널어놓고. 그걸 키로 밤새도록 까불라요,

    애기 놨으면 한 달이라도 조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거 없어. 식모가, 머슴이 무슨 조리를 해. 밥 얻어먹은 것만 해도 감사하지. 그래 갖고는 콩 한 가마를 그 식모 아가씨랑 까불고 나면은 밤에 잠이 안 와. 이런 데 쑤시고 애리고 막… 또 아침에 동이 터서, 저기 바깥에 문이 환하게 되면 또 나가야 돼. 에휴…그러고 살았어요.

    근데 지금 같으면 나 못 산다 그러고 도망가면 되는데. 그 때 생각에는 우리 아버지, 친정에 그 말만 비쳤다가는 나는 뼈도 못 추리고 죽을 거 같애, 가문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기집애가 시집살이 못하고 와갖고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 동네에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실 것 같애 가지고.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것 같아서 친정에도 못 가고 그러고 살았다니까.

    (필자) 그럼 그 집에서 머슴살이는 언제까지 하셨어요?

    (김옥순) 이제 그렇게 하다가 애기 백일이 돌아왔어. 큰집에서 이제 농사도 없고 그러니까 서울로 가신다고, 시숙님이 운전을 하실 줄 아니까 택시운전을 하러 서울로 먼저 올라가셨어. 그때 이제 서울로 다 올라가신다고 큰집이 비는 거야. 나 시집갔던 큰집이. 형님하고 시숙이 서울로 올라가시고 우리가 그리 올라가서 이사를 했지. 그 머슴 사는 집을 떠나온 거지. 거기서 고생해갖고 논이 한 삼백 평 생겼어요, 인자. 그 집서 먹고 우리 아저씨 일한 삯을 주는 게 한 2년? 3년? 애를 하나 낳아갖고 왔으니까 꽤 살았지.

    그렇게 큰집에 가서 살기 시작했어요. 거기 올라가서 사니까 세상에, 굶어도 살겄어. 굶어도 살겠는데, 이제 너무 살림이 없으니까. 내가 젊어서 돈을 모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에 얼마나 둘이 억척으로 일을 했던지. 우리 집 양반도 일은 잘해요 아주. 힘은 좋아 그래도. 일을 그렇게 둘이 해가지고. 낮에는 품 팔고-나 이런 소리 참 저기 하네-밤에는 불 써놓고 우리일 하고. 우리 시집가니까 그 동네 전기는 들어왔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좋더라구.

    그니깐 이제, 마당에다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밤에 우리 일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낮에는 품 팔러 댕기고 둘이서. 그래 가지고 논을 몇 평을 사고… 또 닷 마지기 사고 거기가 두 마지기고 그러니까 또 사백 평을 사고… 그랬어요, 둘이서. 얼마나 지독스럽게 했는지….

    둘이서 일을 하면요, 서로 오라고, 서로 자기네 일 오라고 난리를 치고, 우리 때문에 싸움이 나고,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였어요. 우리는 일을 하면, 정확히 해버리고 꾀를 안 팔고 이렇게 하니깐. 얌전하고 일 잘한다고 동네에서 뽑혔어요, 뽑혔어. 그게 뭐가 좋아. 솔직히 말해 골병드는 거지. 근데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일하면 부자 될 줄 알고 일을 했어.

    시숙이 애들 중학교는 서울에 보내줄 거라 믿었지만…

    (필자) 서울에는 어떻게 올라오시게 됐어요?

    (김옥순) 그러니까 이제 큰집이 서울 가서 벌어 잡순다고 올라가고 나서…시어머님이 농사 때 되면 시골 우리 집에 오셔서 애기 봐주시고, 그러면 우리는 고춧가루, 나물 같은 거 해가지고 서울에 갖다 드리고 그랬는데. 시어머니가 그때 맨날 하신단 말씀이, ‘너희 애들 중학교는 서울에 가서 보낼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농사지으면서 이렇게 시골에 있어라’ 그러셨어요. 난 곧이 들었지. 그때만 해도 내가 서울이라는 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니까. 아 그래도 되나 보다, 우리는 학비만 보내고, 우리 애들은 중학교를 다 그쪽으로 서울로 보내야겠다. 나 공부 못해서 한이라. 내가 했나 그 얘기? 들었어요?

    (필자) 네, 전에 사친회비 이야기…

    (김옥순) 네, 사친회비 2백 원… 그때 2백 원이 없어 학교를 못 가 가지고. 우리가 칠남매니까 동생들도 보고 해야 돼 가지고…그래갖고 공부가 한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애들은 죽어도 공부를 가르쳐야겠다. 이래가지고.

    애들 할머니가 맨날 서울에서 시숙이 데려다 중학교는 가르칠 것이다,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까 난 그렇게 알았지. 시골에서 공부 가르치기 뭐하니까 서울로 보내라. 큰집이 딸만 다섯이니까. 그놈 양자 앞으로 설 것이고. 그놈은 가르칠 것이다 큰집에서.

    (필자) 그때 서울 처음 가보신 거죠? 그 때가 조합원님 몇 살이실 때였어요?

    (김옥순) 그러니까 서른… 삼십대였지. 큰애가 이제 내년이면 중학교를 가는 그 겨울에 시숙 생신이 돌아왔어. 최고로 좋은 진자주색 벨벳 한복을 해 입고 인절미를 해갖고 막 싸고… 참 옛날은 옛날이네. 닭을 막, 생닭을 싸고 그래갖고 그야말로 상경을 했어요 내가. 서울에 왔는데, 차 탈 줄도 몰라갖고 사촌 시동생이 데리러 왔었어. 아유 또 차를 못 타요. 시골서 생전 차를 안 타봐 갖고….

    그렇게 해갖고 서울에 딱 왔는데, 와서 보니까 이건 도저히 내가 보기에 우리 아들을 여기 갖다 놓을 수가 없어. 왜냐 그러면 큰집에도 방 두 개가 있는데, 딸이 다섯이고, 할머니 계시고, 시숙하고 형님 이렇게 주무시는 방에 우리 애가 낄 자리가 없어. 그니까 우리 시어머니만 괜히 그랬지, 우리 시숙은 꿈도 안 꿔. 내가 눈치가 백단이여 또, 이렇게 생겼어도. 딱 보니까, 시숙이 내가 왔다고 남산을 구경시켜주러 가시는데. 남산에서 내려다보시더니, 서울에 보통 갖고는 못 산다, 봐라,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서울에 아무나 사는 줄 아냐, 하시더라고.

    그렇게 애들 데려다 가르치는 것도 택도 없고…그래서 하루를 쉬고 내려가 갖고 내가 아무리 밤낮으로 생각을 해봐도 우리 애들을 갖다 놓을 자리가 아니야. 택도 없어.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신랑을 조른 거야. 우리 서울로 갑시다. 우리 애들 거기 갖다 놔봐야 틈에서 견뎌내도 못하고. 시숙은 꿈도 안 꾸고 계시고 형님도 마찬가지고, 어머니 혼자 그러시니까, 우리 애들 갖다놔 봐야 괜히 큰집 못할 일만 시킨다고.

    영감님은 엄두를 못 내는 거야. 내 그랬어.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시골에서 노력한 만큼 하면, 거기 사람 사는데 못살겠나. 입에 풀칠은 하겠지. 그러다 보면 뭐가 되도 되겄지. 가보고 후회하나, 안 가보고 후회하나. 일단은 내 일생에 후회는 안하게 가보겠다. 내가 젊어서 가봐야지.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자신감이 없어질 것 같다. 난 이 정신이면, 내가 공부 못한 게 한이라 저 새끼들, 저 자식들 삼형제 손에 흙 묻히기 싫다. 그 때부터 이제 서두른 거야.

    조합원의 시댁 식구들이 그랬듯, 당시 농민들 중에서 빈농의 상당수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도시로 이주하였으며, 빈농들이 아닌 경우에도 ‘도시적 생활문화’에 매료되어 도시로 이주하는 이들이 있었다(김보현,「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그러나 김옥순 조합원의 경우 경제적 목적이나 도시 생활에 대한 동경보다는, 자녀 교육이 이주의 가장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이렇게 서울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서도 김옥순 조합원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강한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김옥순) 이제 논 같은 거는, 옛날엔 1년 지으면 쌀을 땅 주인에게 얼마 주고 갈라 먹기로 해요. 우리 논이 다 괜찮았기 때문에 서로 지을라고 해. 우리가 이제 논을 도지 내놓는다, 하면 동네에서 내가 지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은 없는데, 그때만 해도 땅이 모자라가지고, 땅만 바라보고 사는 시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논을 내놓고, 논을 뭇갈림으로 주자 하고….

    그래서 그렇게 논 그거 다 남 뭇갈림으로 주고. 논은 팔고 가지 말자 절대로, 우리가 농사지은 것이 있으니까 일 년치를 가져가서 먹고, 이 사람들이 지어서 준 거 갖다 먹고, 몸뚱이로 벌면은 밥은 못 먹겠냐. 쌀은 이 사람들이 우리 논 지으면 줄 거 아니냐. 그럼 우리 둘이 가서 뭣을 한들 간에 굶어 죽겠나. 일단 논을 팔지 말고 도지를 주고 가자….

    (필자) 그럼 나중에 혹시나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신 거예요?

    (김옥순) 네, 그렇죠. 집도 놔두고 논도 있으니까. 그거 놔두고 가면, 가서 한 일 년 살아봐서 못살면 다시 그 자리 돌아와서 우리 논 우리 집에 살면 되지 않겠나. 일단은 가보자, 그러고는 이제 그해 했던 콩, 팥, 고추 이런 거 파니까 방값 백 오십 만 원 되더라고.

    저 홍운동 알아요? 홍운동 꼭대기. 홍운동 꼭대기에다가 형님보고 방을 얻으라고 백 오십 만원을 올려보냈더니 백만 원을 주고 방 두 개를 얻어놨더라고-오십 만원으론 형님이 한 달 이자 놔 갖고 옷 한 벌 해입었다 하더라고. 그러고 나중에 오십 만원 돌려받아서 그거 갖고 먹고 살았지. 오십 만원 가지고 전기세도 내고 그렇게 하고 살다가….

    셋방의 풍경

    그렇게 하니까 완전히 거지지 뭐. 된장국도, 풀어갖고 된장만 끓였어요. 멸치가 있어 감자가 있어, 두부를 살 돈이 있어? 근데 거기서 또 그 오십 만원에서, 시골서 이사 왔다 하니깐 당숙이라는 양반이 오셔 갖고는, 이십 만원만 빌려달라고 하도 그래갖고, 또 띠였어. 그것만 있어도 그렇게까지 고생 안 했을 건디. 삼십 만원만 갖고 살자니 얼마나 그랬겠어. 그래갖고 큰애는 불광중학교에다가 입학시켰구만. 홍운동에서 산으로 넘어가면 불광동 가나보더라고 그때.

    그렇게 해가지고는 그 때부터 그냥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거야. 닥치는 대로. 파출부를-파출부가 아니라 그땐 식모라 그랬지-. 식모살이를 형님이 소개를 해서 국회의원 집에 보내줬는데. 가서 이놈의 촌놈이 와가지고, 방에 들어앉아 있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서서 맥없는 그릇도 닦고 여기도 닦고 저기도 닦고. 그냥 집이 반질반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그냥…오죽하면 그 사람이, 아니 좀 들어와서 쉬지 밖에서 뭘 그렇게 해쌌냐고… 한 달에 육 만원 준다 해서 갔거든. 그때 육 만원이면 엄청 컸어요.

    (필자) 요즘으로 치면 한 얼마 정도 될까요? 대충?

    (김옥순) 글쎄…모르겠어 지금은. 그건 확실히 기억을 못하겠는데…그래도 공장일 한 것보다 많이 준거여 식모살이가. 그래갖고 갔는데. 한 일주일 되어갔어 거의. 그랬는데, 주인이 목욕탕을 갔다 오더니 시계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시계가 엄청 좋은 시계래 팔목시계가. 근데 그 집 애기들이 그때 방에서 막 뛰놀고… 한 네 살? 다섯 살 그 정도 된 고만고만한 게 둘이 있었어. 걔들은 방에서 놀고, 저거들 엄마는 목욕탕을 갔다 오고 난 밖에서 뭘 치우고 그랬었는데. 갔다 오더니, 저녁때 집에 갈 때가 다 되어 가는데 시계가 없어졌대.

    난 보지도 못했거든 방청소 했어도. 아유 큰일 났어 이거. 나는 못 봤는데. 못 봤다 그러니깐 또 뭐 책상 어디에 있었다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는데…그래서 큰일 났어. 집에도 못 가게 생겼어. 해는 넘어가는데… 목욕탕을 나보고 갔다 오래. 내가 가니, 어디어디 열어보라는데 있어? 없지. 그래갖고 아유 어떡하나. 보통 시계가 아니래. 엄청 비싼 시계래. 그래서 가지도 못하고 시간이 넘어서 섰으니까, 일단 가라 하데. 내 가방이랑 다 보여줬지. 이거 보시라고, 난 보지도 못했다고. 밤에 잠이 안 와 집에를 왔는데. 아유, 저 시계를 내가 어떻게 해야 찾아주고 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에 잠이 안 와 뜬눈으로 새다시피 하고 갔지.

    그만 둔다 소리도 못하고 또 하루를 지내고 며칠을 또 지냈는데, 나중에 내가 찾았어. 앞닫이가 있는데, 고 너머로 어떻게 했는지 애들이 이렇게 떨어뜨렸나봐. 갖고 댕기다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래서 그것도 내가 찾아줬으니 얼마나 저기해. 당신이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도 미심쩍더라고. 반갑기는 일단 반가운데, 내가 찾아서… 내가 아무리 없이 살아도… 그러거나 말거나 주고는, 아유 난 못한다고. 내 성격에. 나는 아무리 없어도 파출부는 못해요. 그 와중에도 다니다가 일이 한 달 없어서 파출부를 또 한 번 가봤는데 그것도 나는 못하겠더라고. 파출부는 못해요. 어떤 사람은 파출부가 좋다는데, 내 성격은. 파출부는 얼마 안 해봤어.

    그러다 우리 큰애가 몇 살 때였나. 집을 하나 샀어. 하도 지독하니 해가지고. 우리집 양반이 이제 말단 공무원이 됐어요. 말단 공무원이 돼 가지고…

    (필자) 원래는 어떤 일을 하시다가?

    (김옥순) 농사짓다가…우리가 식모 살았던 그 부잣집 딸이 증산동에 살았었어. 그 신랑이 높은 공무원이었어. 그래갖고 이제 우리집 양반을….우리가 고모, 고모하고 맨날 거기 가서, 나도 일할 사람 없다 하면 일요일날 같은 때 틈틈이 빨래도 청소도 해주고, 좀 가깝게 지냈지.

    그랬더니 고맙다고 취직을 시켜줬는데, 동사무소에서 사무직이 아니고 말단 공무원이 됐었어. 그래서 십 만원을 받아오던가, 첫 월급이. 그래갖고는 무조건 그 양반 버는 거는 저축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버는 걸로 이리 찢어 쓰고 저리 찢어 쓰고 해갖고 어떻게, 어떻게 살다가….사천 오백인가 주고 집을 하나 샀어요, 홍은동 그쪽에.

    세를 이쪽에 하나 이쪽에 하나 주고, 애들이랑 다락방 하나 갖고 사는 거야. 돈이 모자라니깐. 전세를 줘야 집값이 되니까, 양쪽을 전세 주어버리고 우리는 방 하나 다락방 갖고. 애들 셋 다섯 식구가 살았지.

    뛰놀던 세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무리해서 구했던 집

    에휴…그러기 전에 우리 세 들어 살 때 고생 많았어요. 왜 고생을 많이 했냐면은, 우리 애들이 삼형제잖아요. 머시매들이, 시골에서 뛰어놀던 놈들이 서울에 데려다 놓으니까 아주 천방지축이야 이거는. 그런데다 내가 집에서 데리고 앉아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나는 밥만 먹으면 나가 버리지, 지들끼리 놔두면 대문에 불이 나니까 누가 좋아하겠어 나라도 싫어하지.

    한번은 홍은동 꼭대기에서 토끼 키우는 집에 갔는데 토끼를 마당에 내놨던가봐. 따뜻하니까 뛰어댕기라고. 근데 우리 애들이 대문을 열어놔 갖고 토끼가 나가버렸네. 그래갖고 일하는 데로 연락이 왔어. 그래서 쫓아와 보니까 토끼를 막 찾아내라는데. 어떻게 찾기는 찾았어. 그래도 쫓겨났지 뭐. 육 개월 만에 또 쫓겨나고…

    한집에는 또 갔는데 하도 지붕에 올라가니까, 공이 올라가서 애들이 공 내리려다 기왓장을 깨갖고 그런 거 물어주고. 또 장독을 묻데? 그럼 또 그런 데 위에 올라가서 뛰어갖고 깨서 그런 거 물어주고. 아휴… 얼마나 진짜, 아주 붙들고 울기도 퍽 울고 매도 무지 때리고. 또 한 집은 갔는데 이층에는 주인이 살고 밑에는 시장 있는 덴데, 애들하고 우리만 살았는데 문을 벼락 치는 소리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거기서도 또 육 개월 만에 쫓아냈어. 또 한 집에는 가니까 애들이 수돗가에다가 쉬를 하고 물로 안 씻는다고, 냄새난다고 또 쫓겨났어. 에휴…. 죽겄더만, 죽겄어. 그런다고 그냥 내가 들어 앉았으며는, 빚져버리면 안되겠고. 그래갖고 말도 못했어요 말도 못했어.

    그래서 살다가 어떻게, 어떻게 집을 하나, 사천 오백이 되어갖고 내가 그 집을 산다니까 우리 영감님은, 아유 그거 어떻게 하려고 그 집을 사려 그래. 반도 안 되는데. 어느 정도 저기 해야지, 나중에 빚만 더 저기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그래서, 걱정 말라고,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그래서 알아서 하라 해서, 집을 계약을 허고 그 자리에서 복덕방에다 이 방하고 이방하고 빼 주슈, 우리는 하나만 갖고 살테니까. 우리가 그렇게 해야지 형편이 풀리니까 그렇게 해 달라 그랬어. 우리는 이제 조금만 주니까 되잖아. 되니까 거기서 살고. 살다가 이제 어떻게 전세 하나 빼주고. 또 하나 빼고. 그래서 집값이 제대로 되면 또 한 칸 늘려서 가고. 그 다음에는 이제 이층집으로 가서 세놓고 살고. 그 다음에 녹번동으로 와서 다가구를 지었는데, 여러 집 사니까 안돼서 다시 단독으로 지금 와서 살고 있는데…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진짜….

    (필자) 서울 오셔서 이사를 많이 다니신 거네요. 집 사신 후에도 그렇게 이사를 다니셨어요?

    (김옥순) 집 사고 나서는 늘리느라고 이사를 했지. 조금 나은 집으로. 돈에 맞추느라고. 한번만 더 이사를 했으면 아파트 같은 거 좋은 거 하나 떨어졌을 텐데 영감님이 아파버리고…. 그리고 우리 영감님이 죽어도 아파트를 싫어했어요. 우리 이거 살 때, 단독 평수는 집은 진짜 허술하고 볼 것은 없어도 땅은 오십 평이거든. 그때 그 돈 일억 오천 주고 샀거든. 일억 오천이면 삼십 몇 평 이런 아파트도 가격이 똑같았어요. 그 돈 가지고 아파트도 살 수 있었어. 근데 아파트가 싫다고, 죽어도 싫대요, 아파트가. 아파트만 보러 간다 그러면 싸울라고 댐비더라고.

    (필자) 조합원님은 아파트 살고 싶지 않으셨어요?

    (김옥순) 난 아파트 가자고 했지. 주택은 춥고, 아파트는 편하고…그랬더니 이 양반이, 아유 아파트는 위아래에서 다 들리고 그게 뭐 벌집 같애 가지고 남의 땅이지 내 땅이냐, 내 땅 마련하자고. 그래가지고 땅만 보고는 집은 허술해도 오십 평을 샀는데, 내 생각엔 여기서 한 번 더 했으면, 한 번 더 집장사를 했으면 좀 괜찮았을 텐데. 이 양반이 절대 싫어하니까 한참 눌러 살다 보니까, 지금은 이제 아파트가 너무 비싸져가지고… 그래서 추워요 집이, 많이 추워.

    고생은 말도 못하게 했어. 진짜 나는…그, 야쿠르트 장사하면서도 얼마나…봉제공장 다녔지, 파출부 했지….<계속>

    필자소개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생. 교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컴퓨터를 배우는 모임인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을 통해 구술생애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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