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떠한 합의도 없었다"
    날치기 처리된 보고서는 '무효'
    [에정칼럼]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가 남긴 교훈
        2013년 07월 11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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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송전탑 건설 관련 전문가협의체 구성 중재안’이 발표되고 40여일이 흘렀다. 전문가협의체의 활동에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협의체의 운영 과정과 그 결과를 접하고 참담함을 감출 수 없다. 여전히 최소한의 의사소통의 룰도 지켜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또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밀양 주민들의 기대와 달리 출발부터 ‘협의’에 이르는 길에 어려움이 예상됐다. ‘밀양 전투’의 심각성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아니면 핵발전을 둘러싸고 터지고 있는 각종 사건 사고와 부정 비리가 부각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서인지, 박근혜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늘 하는 것처럼 과거 정부를 탓했다.

    “시작된 지 벌써 7~8년 됐는데 그 세월 동안 뭘 하고 있었느냐 … 미리미리 성의를 갖고 대화를 나누고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까지 갈등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매번 문제가 빚어질 때마다 듣게 된다.”

    전문가협의체를 낳은 권력자의 의지가 담긴 국무회의에서의 발언이긴 하지만, 청와대 입성 전 거대 정당의 핵심 정치인이로 살아오면서 밀양과 관련한 의정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전무했다는 점은 그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그렇다보니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하는 상명하복만으로 협의다운 협의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시작이야 어떻든 전문가협의체라는 합의 기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전문가협의체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엉터리 보고서를 멋대로 작성해 제출하기까지 이뤄진 40일간의 논의 과정이다. 8년간 전투가 40일간의 논의로 해결되긴 난망했지만 애당초 진정한 협의를 위한 한전 측과 송전탑 찬성 진영의 전향적인 자세는 없었다.

    765kV 송전탑을 반대하면서 지중화 등 그 대안을 찾고자 했던 밀양 주민들과 반대 진영의 지속적 노력을 무색하게, 백수현 위원장 등은 토론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보고서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제출했다.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 반대대책위 및 야당 추천 위원’이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 종료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 밝혔듯이 찬성 측 위원들이 작성한 내용은 한전의 자료를 베껴 사실상 한전이 대필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밀양 현장방문과 여섯 차례 회의가 편향적으로 진행됐음은 물론이고 최종 보고서 논의 과정도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심대한 하자가 있었다. 그러나 백수현 위원장은 한전 측이 밀어붙이고 있는 송전탑 건설 찬성 내용을 골자로 하는 ‘우회송전 가능여부 등에 대한 검토결과 최종보고서’를 전문가협의체 명의로 ‘날치기’ 제출했다.

    이미 한전 측에서 주장한 기존노선 증용량과 우회노선 가능성에 대한 불가 입장과 전혀 다른 논리가 제기되고, 765kV 송전선을 추가로 세우지 않더라도 대규모 정전 가능성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근거가 제공되었다. 또한 한전이 계산한 지중화 비용이 과장돼 송전탑을 건설하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주민 보상을 실시하면 오히려 경제적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경고도 무시됐다.

    밀양

    사진 출처는문탁 카페 cafe24.com/photo_board/295247

    더 큰 문제는 올해 수립된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다. 2025~2027년간 핵발전의 신규 반영물량에 대해서 2차 에너지기본계획이 확정되기까지 유보해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상위 계획인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이 수립될 때까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제2의, 제3의 ‘밀양 사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송배전 설비계획 추진방향’만 제시하고 ‘송변전설비계획’을 별도로 수립․시행한다고 밝힘으로써 적법한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

    건설기간, 공사비, 사회적 수용성 등 송배전 설비계획이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음에도, 그리고 서울-지방간, 지역간 전력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 당국은 여전히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송변전설비계획을 발전설비계획에 종속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현재까지 신고리-북경남 765kV 구간 초고압 송전선로 분쟁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 이에 더해 건설 중인 신울진원전과 신규 부지로 선정된 삼척, 영덕 핵발전 단지로부터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765kV 송전선 갈등이 예고되어 있다.

    이참에 전력 생산-유통-소비 전반에 걸쳐 따져봐야 한다. 밀양은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믹스를 설계할 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할 전력계통(송배전망)에 대한 계획(송변전설비계획)도 민주적, 참여적 방식으로 수립해야 한다. 이는 전력계통을 전력미스의 하부 계획으로 여기는 정책 마인드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아 보인다. 새롭게 실행된 전문가협의체라는 갈등관리기구의 실패에 대해 핵 카르텔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조선일보 등은 사실 관계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짜깁기 사설로 여론을 호도한다.

    어떠한 합의도 없었고 다수와 소수 의견으로 기록될 수 없을 정도의 논의를 협의체라는 외피를 무기로 삼아 정당화하고 있다. 정확한 것은 전문가협의체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위원장이 임의로 의견을 취합해 독단적으로 제출한 보고서는 ‘무효’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그들을 탓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물론 합의체 구조의 불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반대 측이 얻어야 할 것이 있으면 들어가 얻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미 짜인 판에 들어가서는 자칫 잘못하면 명분도 실리도 찾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특히 사회적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의 전문가’와 ‘그들의 전문가’의 차이는 바로 그 사회적 힘의 불균형으로 사라지게 된다. 공정한 의사결정의 구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참여 민주주의니 사회적 합의니 하는 것들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늦었지만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워킹그룹에서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탈핵 인사들도 되돌아봐야 한다. 무엇이든 참여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룰에서 어떤 권한을 갖고 참여하는가가 중요하다. 이제라도 참여의 조건을 따지자. 시민이 투표일에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시민-노예로 돌아가듯 단체 전문가도 회의가 끝나면 다시 활동가-노예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차이가 누군가를 부르고 안 부르고의 차이가 아니다. 명심하자. 대표 없이 탈핵 없는 게 아니다. 더 넓은 참여, 더 깊은 숙의 없이 탈핵 없는 것이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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