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의 소녀”
    [산하의 오역] 한 컷 안에 찰나의 시간과 공간이 담긴 보도사진
        2013년 07월 09일 1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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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2월 2일 오늘날 세종문화회관이 서 있는 그 자리에 있던 서울 시민회관에는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MBC 개국 11주년을 기념하는 10대 가수전이 열린 때문이다. 남진, 하춘화, 정훈희 등 당시의 슈퍼스타들이 출연하기로 한 터라 시민회관은 몰려드는 시민들로 미어터졌다.

    가요 청백전이 마무리됐던 8시 30분경 갑자기 무대의 조명 장치가 펑하고 터지면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은 불길로 번졌고 당황한 주최측이 막을 내려버리자 그 막으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시민회관은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출구로 몰렸지만 계단에서 밀려 넘어져 서로 짓밟았고 2층과 3층에 있던 사람들은 불길에 포위됐다. 창문 밖으로 매달린 사람들은 힘이 빠지면서 땅으로 떨어졌고 그날 시민회관에서 죽어나간 사람은 51명이었다. 대연각 호텔 화재와 대왕코너 화재와 더불어 70년대 3대 화재라 할 끔찍한 사건.

    서울시 소방차와 미군 소방차까지 총출동하여 화재를 진압하는 가운데 시민들의 눈에 안타까운 광경이 포착됐다. 예닐곱살쯤 됐을까 하는 여자 아이가 4층 회전 창틀에 허벅지가 낀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직전 한 기자는 가요 청백전 취재를 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기마저 꺼져 아비규환이 된 통로를 포기하고 무대 위를 엉금엉금 기던 기자는 천만다행으로 소강당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고 필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그에게 불어온 엄동설한의 겨울 바람은 생명의 훈풍이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저 살았습니다!”를 보고한 후 기자는 다시 세종문화회관 정문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창틀에 매달린 소녀를 바라보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든다. 몇 방을 찍은 뒤 그는 소방관에게 소리를 지른다. “저 아이를 구해 주시오. 빨리!”

    천만다행히도 이때 한국에는 고가사다리가 처음 도입돼 있었다. 이영주 소방관은 고가사다리를 타고 소녀에게 접근했다.

    이 긴박한 순간을 소방관의 회고로 들어 보자. “고가사다리차를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건물벽에 바짝 접근시켰다. 나는 사다리 바스켓에 올라타 소녀가 떨어질지 모를 위치에 바싹 붙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내 발등에 떨어졌고 그 순간 함께 떨어져 내린 소나기 유리 파편과 쇠창틀을 겨우 몸으로 막아냈다.”

    기자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상황을 보고하려고 소속사인 한국일보사로 뛰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겨우 건진 뒤 필사적으로 찍은 사진은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한다. 때는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뒤의 계엄령 치하였다.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에 알려진 건 외신을 통해서였다. 결정적인 현장을 놓친 AP통신 기자가 하릴없이 한국일보를 방문했다가 “대박!”을 부르짖으면서 얻어갔고 외국의 신문 지상을 먼저 장식한 것이다. 당시 옥살이를 하고 있던 김희로(영화 ‘김의 전쟁’의 그 사람)를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대체 그 소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비상한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병원을 방문하여 소녀를 위로하기도 했다. 김희로는 소녀에게 거의 매일같이 위문 편지를 썼다고 전한다.

    기적의 소녀

    한국일보 특종사진전

    계엄령 하에 신문을 검열당해야 했던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화제가 됐던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한국일보의 박태홍 기자다. 그는 그 설움을 다음해 1973년 7월 9일 한국 보도사진전 금상을 차지하면서 풀어낸다. 박태홍 기자와 이영주 소방관은 이후 이 소녀의 후견인이 됐다. 기자는 소녀가 커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주었고 결혼 사진까지 담당했고 소녀를 구한 소방관은 주례 선생님이 돼 소녀의 결혼을 축복했던 것이다.

    이 비극 속에 피어난 훈훈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일보’의 보도 사진의 역사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어서다.

    한국일보는 유난히 현장에 강한 신문이었다. 서울역 구정 귀성객 압사 사건(1960.1.26)의 현장을 찍었던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를 “당신 같은 용감하고 연구하는 기자가 필요해!” 한 마디로 스카웃했던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은 참 유능한 ‘신문쟁이’였고 그 전통은 ‘특종 사진’ 분야에서도 꽤 면면히 흘렀다.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부산 문현동 시위 사진, 즉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웃통 벗고 달려나오던 그 먹먹한 순간을 포착한 것도 한국일보의 카메라였고, 전경환이 분노한 시민에게 뺨을 맞았던 순간 역시 한국일보의 카메라로 역사에 남는다. 1986년 서울대의 잔인한 봄에 서울대생 이동수가 불덩이가 되어 아크로폴리스에 떨어지던 찰나를 잡은 것도 한국일보의 카메라였고 지옥불 같은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온 경황에 카메라를 끝까지 부여잡고 다시 현장으로 가서 ‘기적의 소녀’를 잡아낸 것 역시 한국일보였다.

    그러나 호부에 견자 없다는 말은 대개 틀린다. 대개는 그 아버지까지 의심스러워지는 개들이 호랑이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법. 비슷한 연유로 한국일보는 지금 ‘개판’이 됐다.

    기자들은 쫓아냈고 용역들이 편집실을 지키는 가운데 몇 명 안 되는 사장의 수족들로 한때 대한민국 4대 일간지였고 현장을 지키는 기자정신의 산실이었던 한국일보가 누더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미 한국일보는 역사와 전통의 한국일보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일보 뿐 아닌 한국 언론의 현실로 적나라하게 내동댕이쳐지고 있다.

    보도사진의 매력은 그것이다. 그 한 컷 안에 찰나의 시간과 공간이 담겨 있으며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극도로 응축되어 맺혀 있으며 그 프레임 안의 모든 것을 역사로 만든다. 한국일보 기자 박태홍이 1972년 12월 2일 찍고 1973년 보도사진전 금상으로 보상받았던 사진 <기적의 소녀>도 그랬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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