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성과 민주주의, 다양성의 정치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작은 정의가 지켜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
        2013년 07월 09일 10: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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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잠에서 깨면서 보았던 뉴스 단신이 계속 머리에 남아서 잠깐 언급하려고 한다.

    표창원 교수와는 내가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에서 프로파일러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이다. 물론 여기서 알고 지냈다는 의미는, 개인적인 인연이 아니라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부분으로 만났기에 표창원 교수의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딱 한번 술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대구경찰청 주최 혈흔형태분석 사례발표모임 뒤풀이 자리에서라고 기억된다. 그것도 잠시 인사만 나눈 정도. 내가 서울경찰청에서 일할 당시 경찰대학 교수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가 주도하는 법의감식연구회의 핵심 멤버였던 그분은 매달 서울경찰청 15층 강당 ‘서경마루’로 경찰학과 학생들에게 실습 겸 현장을 가르쳐주려고 방문했고 그 때마다 다양한 현장사례에 대한 토론에 같이 참여했다.

    머리에 남았다는 것은, 논문표절 사건의 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래도 세상을 향해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외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특정한 어떤 의도에 대한 것이다.

    물론 본인이 인정한대로 타인의 글에 대한 인용도 철저히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실수이든 고의든 표절이라고 비난받아도 이는 본인의 잘못이므로 당연히 감수해야할 것이다. 특히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는 자칭 보수주의자로서 안타깝지만 더 엄격한 잣대로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 때문에 그 사실 자체가 물타기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이나 그분이 주장해온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그분의 몫으로 두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주목하는 문제는, 언론이라는 가면을 쓰고 기득권과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과 정의의 목소리를 억압하려는 움직임이다.

    그전에 전제가 몇 개 있다. 그것은 도덕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여론과 정치 등과 관련된 몇 가지 모호하지만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그런 잘못이 실수인 경우도, 고의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명백히 잘못임을 알고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고, 실제 범죄로 규정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반론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가장 문제를 삼는 것은 아마도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자기도 큰 잘못이 있으면서 누가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는가?” 혹시 속으로는 나쁜 짓을 많이 하면서 겉으로는 도덕군자인 체 행동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작은 잘못은 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저지르는 큰 잘못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큰 문제이다. 등등.

    나도 위의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잘못은 그것이 과거이든 현재이든 도덕적으로든 사법적으로든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

    그런데 이런 매우 보편적인 사실과 주장만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일정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도덕성’이라는 것인데, 이 도덕성이라는 것이 표현상으로가 아니라 내용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불변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런던의 시장은 동성애적인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몇 년 전 파리시장도 동일했다. 만약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틀로서 도덕성의 내용을 규정할 때 그것은 절대 불변일 수는 없다. 낙태, 이념, 성 노동자, 타투, 성적 표현 등등 도덕성의 기준을 구성하는 내용은 말 그대로 ‘사회적’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도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일정정도 한계는 분명 있을 수 있다. 즉 아동 성추행, 노예 및 인신매매, 스너프 등의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폭력, 인류에 대한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변할 수 없는 기준이 있기도 하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덕성이라는 기준이, 많은 경우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다른 서구의 많은 나라들의 경우 정치 명문가가 상당히 많고 대부분의 경우 대를 이어서 국회의원, 상원의원, 하원의원, 장관, 대통령, 수상 등등을 해먹는다. 부시 가문, 케네디 가문, 아베 가문 등등. 그런데 이런 명문가 현상이 도덕성과 연결되는 아이러니가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민주주의는 다원성, 다양성을 핵심가치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절차를 마련하는데, 오히려 절차적인 민주주의와 미디어정치에 탐닉하는 사회일수록 도덕적 순수주의가 정치현실에서 득세를 한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배출되어야할 정치인들이 특정한 부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 명문가에서 양산되는 현실은 매우 절망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정치 명문가는 경력(학력, 도덕성, 이미지 등) 관리가 충분히 가능한 자원을 가지고 있고 실제 그런 자원을 통해서 재생산된다.

    아베의 가계

    일본 보수우파 아베 총리의 가계도

    정치가문들

    영국 중국 인도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정치가문의 인사들

    특히 이런 정치 명문가들은 사회에서 미디어의 일정부분을 장악하고 있기에 더욱 재생산에 용이하다. 그래서 일단 선거에 들어가면 이슈를 단순화 시킨다. 정의, 반부패 등.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복잡한 이슈파이팅보다는 단순한 이미지 승부로 선거를 몰아간다. 더군다나 낮은 투표율과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존재는 선거를 더 절망적으로 만든다.

    그런 도덕적 순수주의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대변하지 못한다. 단지 깨끗하고 이미지가 좋은, 머리 좋은 바보들만을 얼굴마담 정치인으로 내세우고 실제 지배자들은 대를 이어서 기득권을 유지한다. 이러한 현상은 탤런트와 같은 대중 스타들이 정치판에 투입되는 현상으로 우리는 많이 봐오고 있다.

    독재와 민주주의가 맞서던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들도 정치인으로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런 다양성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반면 절차와 미디어에만 의존하는 시대에는 비록 아무런 도덕적 문제를 가지지 않는 무색무취한 정치인은 얻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양성 구현에는 큰 한계가 생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표창원 교수의 논문표절에 대해 변호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면 ‘아닌 것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중에 논문표절을 안한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고 아니 논문을 아예 안 써서 표절시비에 휘말릴 이유가 없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도덕성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오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사회가 가져야 하는 도덕성의 기준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반성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작은 정의, 큰 정의

    며칠 전에 거의 10여년 넘게 못 봤던 학과 후배로부터 매일을 하나 받았다. 그 내용은 과학수사와 관련된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좀 흥분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만나보니, 동생이 7년 전에 사법당국으로부터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 후배의 동생이 제본한 두툼한 법원 판결문을 보여주면서 30분 넘게 열변을 토해냈지만, 후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피의자신문조서 앞장을 보는 순간 이 후배가 나를 찾아온 이유와 사건의 전말, 전개 과정, 왜 억울해 하는지 등이 그냥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후배의 하소연을 3시간 넘게 그냥 들어만 주는 것이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부동산을 했던 후배의 동생이 옆 점포의 건달과 시비가 붙었는데 처음에 일방적으로 맞아서 정신이 없는 사이, 자신을 폭행했던 건달이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출동한 경찰한테 쌍방 폭행이라고 주장해서 결국 일방적으로 맞고도 법적으로는 쌍방 폭행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건이다.

    사건의 진실은 그 전과 2범이었던 그 건달이 동생을 폭행하고 가중처벌 될 것이 두려워서 아는 동생을 시켜서 주변에 있던 돌로 자신의 머리에 부상을 입히게 하고 주변 아는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목격자 진술을 하게 했던 것이다.

    문제는 사건을 조사했던 수사형사가 그 건달과 건달로부터 회유 받은 주변 목격자 등의 말만 믿고 정작 피해자였던 동생의 주장은 무시한 채 검찰로 송치했고, 검찰에서는 별다른 보강수사 없이 기소했고, 판사도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대로 선고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느냐고? 실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짚어보자. 물론 사건 관련자 즉 용의자가 자백을 하면 일은 쉬워진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 자백의 진부여부와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런데 수사의 기본은 증거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 증거를 분석하고 해석하기에 일단 실력도 모자라고 더 깊이는 그럴 의욕도 없다. 그래서 가장 쉬운 길, 즉 주변 CCTV를 우선 확보하고 그것이 없으면 다음으로 목격자의 진술을 듣는다.

    사실 이런 경로는 한 번이라도 경찰의 수사를 받아본 사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건달도 잘 알았기에 CCTV가 없는 곳에서 범행을 조작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목격자를 회유한 것이다. 일단 목격자의 진술이 확보되면 이 목격자 진술은 다른 여타의 분석을 요하는 불확정의 증거들보다 우선시된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관계인의 진술은 반드시 물적 증거에 대한 분석으로 진부를 판단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하지만 순서가 바뀐다. 즉 목격자의 진술에다가 증거의 분석을 맞추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진술의 신빙성은 자해를 한 돌에서 찾았어야 한다.

    돌의 특정 부분에 묻은 DNA 혈흔 조각난 파쇄흔 등에 대한 분석에 기초해서 역으로 진술의 진부성을 판단하고 그 진부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로 진행되어 결국 국과수의 분석은 목격자의 불완전한 진술을 진실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일단 심증이 굳혀진 수사형사는 불확실한 진술과 분석에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수사경력을 더해서 기소의견서라는 소설을 쓰게 된다. 여기까지가 완성되면 검찰에서도 법원에서도 다시 뒤집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특히 사건이 누가 죽거나 엄청나게 많은 재산이 관련됐거나 등의 사건이 아니면 더욱 그렇다.

    대충 심증에 따라 수사하고 기소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쌍방 폭행범으로 몰린 피해자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지금 살인범이 되는 것도 아니고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큰 재산상의 피해를 본 것도 아니므로 비싼 돈을 들여 변호사를 사서 정식으로 재판을 하는 것도 아니라 형사재판을 잘 모르는 싼 변호사를 구해서 대충하다가 법원 판결이 나는 것이다.

    멋있게 연쇄살인범을 잡고 신출귀몰한 발바리를 잡는 것도 물론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연쇄살인범이 수천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발바리가 수만 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해에 4-5명 정도, 한 해에 열 댓 명 정도, 그러나 그들이 벌이는 사건의 사회적 파장이 커서 그렇지 전문가들에 의한 정교한 스크리닝과 예방, 관리 등으로 그중의 상당 부분은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정작 실제 생활에서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정의는 앞서 후배의 동생처럼 작고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그런 사건일수록 공평무사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처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작은 범죄를 적절히 처리하는 것은 사회의 신뢰성과 관계되며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안전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죄와 그 수사는 하나의 사회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통신호체계와 같고 기후예보와 같다. 그 시스템이 잘 관리되고 운영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후배 동생의 경우를 보통 사람들은 너무도 많이 경험하지만 그것을 정의로운 사회의 지표로 생각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큰 정의는 작은 정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작은 정의가 잘 지켜지는 사회가 진짜 좋은 사회이다. (다음 회에 계속)

    필자소개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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