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쉽게 위로하지도,
    섣불리 절망하지도 않기 위해
    [서평] 『살아남은 자의 슬픔』『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베르톨트 브레히트)
        2013년 07월 06일 12: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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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략…)
    좋지 않은 토양으로 인하여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가 휘어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무가 휘어졌다고 하면서 비난을 한다.

    나는 푸른 조각배나 돛단배를 바라보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부들이 사용하는 닳아버린 어망이다.

    (…중략…)
    과꽃에 대한 감동의 정서와
    미장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의 정신이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시를 쓰도록 만드는 것은
    분노의 정신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 中
    (*히틀러를 지칭)

     작년 12월 말 즈음, 이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모국어와 단절된 상태로 지내다가 오랜만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대선 결과에 관련된 글들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SNS든, 인터넷 뉴스든, 내가 들여다 본 (사이버) 공간 안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모국어의 풍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당시, 대선 결과를 두고 오가던 수많은 말들, 글들을 차례차례 접할 때마다, 마치 한글 자모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저들끼리 불규칙한 모양으로 엉킨 채 내 주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습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러한 경험은 올해 1월, 용산 참사 4주기 집회에 참가했다는 지인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또 다시 반복되었는데, 그 후에도 몇 차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말들의 풍경 때문에, 때로는 그 말들 자체로 인해, 종종 몸과 마음이 저릿하고 아팠다.

    그런데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보다 어지러운 말들과 절망적인 풍경에 특히 더욱 민감하여,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면 혹 시인들, 작가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그들이 보여 온 작품 활동이나,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광장으로, 직접 향했던 그들의 연대 혹은 지지 선언, 활동, 등을 보면서다.

    그들은 비정규직 정리 해고 문제에 대해,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에 대해, 용산 참사에 대해, 대기업의 횡포에 대해, 썼다. 또한 그들은 소외받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아픈 사람들에 대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들의 눈이 머무는 곳에서 늘 시(詩)를 읽어낼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가진 시인들, 그리고 소설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수차례 작가선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 주위의 아픈 언어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숨으로 삼킨 그들이 뱉어내는 날숨은, 아프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이러한 절망의 언어들 속에서, 살아남아 아픈 우리들 서로를 ‘쉽게 위로하지도 않는 대신, 섣불리 절망하지도 않기 위하여’_ 나치즘과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거의 평생을 걸쳐 저항적 참여시와 희곡을 썼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들을 건넨다.

    살아남은 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던 독일 문학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의 저항적, 투쟁적 삶은 오늘, 지금 여기의 문학인들에게도(또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것이어서, 이 시대는 여전히 그들을 아프게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숙명적으로, 지금 여기 곳곳에 가득한 절망적인 언어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그 언어가 다른 이들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끈질기게 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_생각한다.

    그리하여 여기 건네는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에 담긴 시들은, 브레히트 스스로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살아남아 슬픈 자’였으므로, 어쩌면 한편으론 아프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대와 투쟁을 역설하는 그의 시들은 또한, 그와 같이 아픈 시대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아픈 말들과 풍경을 견뎌내기를, 그리고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존엄성을 지닌, 내 삶의 주체인, 한 ‘인간’으로서, 왜곡된 현실을 꿰뚫는 브레히트의 언어를 읽고 난 뒤의 우리는, 계속 좌절한 채 사회의 갖가지 모순들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만은 없다.

    당신들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법률을 만들었다.
    (… 중략…)
    지금부터 우리는 결의한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비참한 삶이다.
    (… 생략…)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사의 결의 中

    보통의 사람들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픈 말들이 우리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오늘.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말들은, 아프다. 방송뉴스든, 인터넷 뉴스든, 신문 기사든, 하물며 개인들의 트윗 이든, 온통 아픈 말들뿐이다.

    4대강, 밀양, 강정마을, 용산, 대한문 등지엔, 아픈 말들이, 지친 채 공간 주위를 맴돈다. 또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에 대한 의혹 제기와 엄중한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하며 약 일주일 전부터 다시 촛불을 켜고 광화문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겐, 매순간 번복되고 날조되는 변명과 거짓말을 마주하는 것이, 말 그대로 ‘너무 힘들다.’

    학생, 교수, 언론인, 그리고 작가들이 나서서 시국선언을 읽는,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에, 절망하고, 파렴치한 말들에 상처받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까지 무자비하게 내팽개쳐지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절망을 거듭하는 우리가 살아남아 있는 모습은, 슬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역설한다. 은폐된 것들을 폭로하는 언어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개인적 갈등을 뛰어넘는,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들려져야 하고, 읽혀져야 한다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 슬프게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이, 쉽사리 위로하지도 않는 대신, 서둘러 절망하지도 않기를. 지리한 투쟁과 저항은, 물론 아프고 슬프지만,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대 노수석 생활도서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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