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진짜 이념, 냉소주의
    좌파는 '수용소 군도' 읽고 동요...우파와 자본주의자는 악마적 현실에도 냉소할 뿐
        2013년 07월 05일 04: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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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태어난) 1973년에 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상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름이 아닌 서방에서의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라는 대작의 출간이었습니다.

    책 한 권이 출간됐다고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수용소 군도>는 문예 차원에서 봐도, 그리고 사학적 차원에서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어투는 거의 비분강개에 가득찬 “고발” 위주의 어투인지라, 지나치게 단순하기도 하고 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흑백논리가 지나쳐 문학다운 “인간 한 명 한 명의 깊이읽기”가 결여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학적으로는 – 물론 약 220명 옛 죄수들의 구술에 의거한 “구술사”으로서의 한계겠지만 – 신빙성이라고 거의 없었습니다. 예컨대 솔제니친이 1953년 스탈린 사망 당시 정치범들의 총수를 “약 천만명 이상”이라고 대충대충(?) 잡아놓았지만, 이건 20배(!) 정도의 과장이었습니다.

    정치범의 일괄 석방이 결정됐을 때에 공산당 총서기장 흐루쵸브가 관련 기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정확하게는 수용소에서 467,946 명의 정치범 (“반동 반혁명 범죄자”)만이 있었습니다.

    수용소군도

    1974년 출간된 ‘수용소 군도’

    물론 이것도 오늘날 제가 살고 있는 오슬로의 인구만한 숫자지만, 그 중에서도 예컨대 수만 명에 이르는 숫자는 한 때에 파시즘과 손잡은 우크라이나나 리투아니아 등지의 분리독립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무조건 부정 일색으로만 본다는 것도 부적절하겠지만, 좌우간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양심수”와 다소 다른 모습의 역사적 행위자들이었단 말이죠.

    또, 솔제니친이 소련 수용소들을 마치 “아우슈비츠와 다를 게 없는 곳”으로 묘사했지만, 정확하게는 소련 수용소에서의 1931-1953년간 평균 연례 사망률은 약 2% 이었습니다. 강제노동의 활용은 물론 국가적 범죄지만, “아우슈비츠”하고는 유형적 차이 같은 게 보이지 않나요?

    여러 모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책이지만, 솔제니친의 – 이념적 편향성이 태심한 – 고발서는 왜 이렇게도 엄청난 역사적 역할을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명료합니다. 이 책의 주된 역할은 “좌파에게 타격을 주어서 현실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문학적 결점이나 역사적 부정확성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지하 유통판을 읽어 체제에 대한 믿음을 버린 소련 지식인이나, 이 책의 영향으로 프랑스나 이태리 공산당에서 탈당한 사람들은, 이 책의 서술이 거칠다는 점도 느끼고 숫자가 아주 부정확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눈치 챘을 수도 있었습니다. 공식 자료가 아닌 “구술”에만 의존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밝힌 솔제니친은, 정확한 숫자를 안다고 스스로 주장하지도 않았죠.

    문제는 “사십만 명이냐 천만 명이냐”가 아니었고, 사십만 명이든 몇 명이든 간에 “자유의 낙토”를 지향해야 하는 체제가 억압과 커다란 국가폭력을 낳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이었습니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 무고하게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비록 한 명뿐이었다 해도, 좌파의 입장에서는 이건 벌써 이와 같은 체제에 대한 무거운 회의를 의미합니다.

    좌파의 이상은 모든 억압의 극복이고, 좌파는 비록 한 사람의 목숨이라 해도 그 누구도 역사의 목적이 아닌 역사의 수단으로 이용 당하면 안된다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대의 국가 폭력 남용에 뻔한 객관적인 이유들 (내전과 열강간섭 시기에 만들어진 “포위 당한 요새”와 같은 혁명자 집단의 집단심리, 1920년대말의 혁명의 보수화와 하나의 반동으로서 스탈린의 일인 독재 체제 공고화, 전쟁 위협하의 초고속 공업화와 전쟁 시기, 그리고 냉전 초기의 외부로부터의 압박의 실감, 부단한 외부 압력 속의 “규율”의 종교화 등등)이 있다 하더라도, 솔제니친의 책은 좌파의 양심으로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부단히 마음 속으로 답해야 하는 어떤 “물음”을 던져준 것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과정에서 좌파는 스탈린주의의 독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다 잘 씻어낼 수 있을 터인데, 좌우간 1973년 <수용소 군도>의 출간 이후는 좌파 진영은 더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더이상 과거와 같은 도식들을 맹신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솔제니친의 고발이 소련을 포함한 좌파의 의식을 흔들어놓았고, 수많은 좌파들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소련에서는 1989년까지 금서이었지만, 뭐 지하유통판으로는 읽을 사람은 다 읽었다고 봐야죠. 그 책의 정신적 영향력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듯합니다.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이 세상을 바꾼다? 아, 이쪽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악마 류시퍼보다 더 악한 놈이 우리를 통치한다는 사실을 고발, 입증해도 아무것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유교적 명분론 차원에서는 소련/러시아보다 어쩌면 통치자들에게 더 엄격한 “윤리”를 요구해온 데 익숙해진 우리 대한민국을 한 번 봅시다.

    지난 15년동안 고발돼온 것은 이승만 시절의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총수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 확인된 시체는 약 5천 구 정도), 박정희 시절의 파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강간 등 악질 범죄 (공식적 통계로는 한국군이 죽인 베트남인은 4만1450명이었으며, 실제로 적어도 수 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승만-박정희 양 정권 시절의 북파공작원에 의한 북조선 군-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해, 테러 행위 (밝혀진 자료로만 해도 적어도 수천 명의 사살자를 낸 것으로 보입니다) 등인데, 굳이 인구 비율로 따진다면 적어도 스탈린 시절의 국가범죄와 맞먹을 정도일 것입니다.

    스탈린의 범죄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끝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이, 우리가 알게 된 것으로만 봐도 대한민국을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 내지 인권 등과 아주 무관한, 미국이 고용하듯 하거나 적극 지원한 살인마들이 통치했으며, 그들이 자국 민중뿐만 아니라 다른 아세아 민중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모종의 타격을 줄만하지 않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솔제니친이 구 동구권의 지성계를 뒤흔들었지만, 한홍구선생이나 김동춘 선생, <한겨레21>의 월남 통신원 구수정 선생 등의 한국 “학살사” 관련 폭로들을,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소위 “명분”이나 “정통성”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만 읽혀졌던 듯한 느낌입니다.

    대한민국 지성계의 주류는? 여전히 1960년대 초반 미국 지배자들의 “근대화론”, 즉 “산업화”세력들이 과가 (약간) 있어도 공로도 매우 컸다는, 나중에 그들의 과가 민주화에 의해서 교정됐으면 됐지 일단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성공했다는,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합리적”이라고 일단 긍정하는 장하준씨는, 대한민국에서 얼마든지 “진보”로까지 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신자유주의를 규탄하니까요. 박정희가 4만 명이 아닌 40만 명의 베트남인을 죽이는 “하도급”(?)을 맡아 돈 벌었다는 것이 돌연히 알려진다 해도 과연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까요? 천만의 말씀이라고! 똑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꼭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요. 가장 보수적인 의료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해도 2003-2006년간만 해도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601,027 명의 이라크인들이 “폭력적인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 말기의 정치범 수보다 더 큰 숫자인데, 구미권의 정치 체제를 “좋은 민주주의”로, 그리고 구소련을 “나쁜 전체주의”로 각각 보려는 영미권 “주류” 지식인들의 의식은 그 숫자를 안다고 해서 과연 한치라도 달라질까요? 그들이 과연 그런 숫자들을 몰라서 그들의 체제를 긍정할까요?

    바그다드의 아이

    2008년 공중 폭격에 의한 파편으로 사망한 이라크 바그다드의 어린 아이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지나 맙시다. 이 “민주와 자유세계” 지식판매업자들은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 십분 다 정확히 안다고 해도, 그들의 지배자들이 히틀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백 번 인식한다 해도, 그들의 다수는 절대 반체제적 사고나 실천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동구권 지식인이나 솔제니친에 울고 분노하고 사상을 바꾸곤 했던 70년대의 서구 좌파와 달리 그들이 그 어떤 “억압의 극복”이나 “인간의 완전한 자유 실천”을 꿈꾼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토인들을 적당히 패서 돈이나 벌고 우리 나라를 조국근대화시켰으면 됐지 문제는 도대체 뭐냐, 이라크에서 사담인가 뭔가가 유전을 국유화시켜서 우리의 유전 투자, 유전 소유를 막았는데, 뻔뻔스럽게도 이라크 석유가 이라크의 것이라고 우리에게 대들었던 그 놈을 제거시키고 석유부문을 국제 (즉, 우리) 투자에 노출시켰으면 뭐가 문제냐, 그 과정에서 토인들이 좀 고생했다면 이게 토인들의 문제지 우리 문제냐, 대체로 “국제사회”의 표준적 사고는 이 정도입니다.

    대한민국의 이념은 “민족주의”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도 더더욱더 아닙니다.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끝이 없는 냉소주의는 우리의 진정한 “이념”일 거에요.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와 같은 정도의 냉소적인 지식매매꾼들을, 솔제니친도 이라크 침략의 진실도 예수 크리스토도 뒤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을 냉동시키는 저들의 냉소주의가 인민들에게 주는 정신적 피해는 엄청납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 피부로 전쟁, 침략, 학살이 왜 나쁜지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해야, 베트남 사람의 목숨을 인간목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 지식업자들의 악질성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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