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7월 2일 할렐루야 축구단 창단
    [산하의 오역] '승리'는얻었지만 '신뢰'는 잃어버린 한 시절
        2013년 07월 02일 10:4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아마도 중국전이었던 것 같던데 박주영이 마라도나급으로 드리블 한 뒤 골을 넣고 기도 세레모니를 할 때였다. 환호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누군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소리를 날린 기억이 난다. “자슥 또 지랄하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골 넣은 선수가 기도 좀 하겠다는데 뭘 그러느냐고 기독교인 입장에서 한 마디 대꾸해 주려다가 그냥 말았다. 문득 저 기도 세레모니와 관련된 기억의 자갈들이 박주영의 세레모니가 일으킨 파도에 밀려 왜각대각하면서 속시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아주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오른다. 기도 세레모니의 원조격인 이영무 선수(지금은 목사님이자 감독님이지만)까지다.

    백넘버 9번. 키는 지금의 나보다도 작고 체중도 얼마 나가지 않아 덩치 큰 서양 선수에 부딪치면 저만치 나가떨어지기 십상이었던 한국대표팀의 ‘링커’ (그때는 미드필더를 이렇게 불렀다.) 이영무 선수는 기도 세레모니로 유명했다.

    경기 시작 전과 후, 그리고 골을 넣은 뒤 그는 항상 기도를 올렸지만 그의 종교적 노출 본능(?)을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되레 그가 기도를 할 때는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경기가 안 풀리면 불자건 기독교인이건 빨갱이건 “영무야 골 넣고 기도 좀 해라.”고 발을 굴렀다.

    이영무는 정말로 성실한 선수였다. 다른 선수들이 걸어다닐 때 그는 항상 뛰었고, 터치라인 밖으로 공이 나가려 할 때 악착같이 뛰어서 그걸 살려내는 선수는 십중팔구 9번 이영무였다. 상대편 선수가 시간 끌기로 패스를 주고 받으면 양쪽을 “똥개 훈련하듯” 따라다니면서 질리게 만들었고, 3대0, 4대0으로 지고 있어도 활발하게 뛰는 건 때로는 그 뿐이었다.

    이영무의 탁월한 성실함을 강조하긴 했지만 단지 그였기 때문에 기도가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예 온 선수가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프로팀이 있었고 경기 시작하기 전에 십자가 모양으로 앉아 기도를 올리고 시작해도 기독교인이고 비기독교인이고 환호를 올리며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플레이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축구단이자 원년 슈퍼리그 우승팀 “할렐루야”가 바로 그 팀이었다.

    할렐루야팀의 면면을 따져 보면 가히 눈이 부시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기독교인이로되 독일로 갔기에 참여하지 못한 차범근이 아쉽긴 하지만 황재만 조병득 오석재 박상인 박성화 신현호 등등 이름만 들어도 그 시대의 축구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리라.

    그들은 골만 넣으면 기도를 올리는 게 당연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슈퍼리그 우승컵을 거머쥐도록 그들의 기도에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대한 관중의 반응이 환호에서 야유로 급전직하했던 사건이 있었다.

    1980년 6월 할렐루야 친선경기(출처 월간축구 80년 6월호)

    1984년 대통령배 축구 대회에서 할렐루야는 준결승에서 한국 대표팀과 맞붙었다. 최순호와 정해원 이태호 등이 버틴 이 대표팀도 역대 대표팀으로 따지면 셋째 이상 가라면 서러워했을 전력이었지만 할렐루야도 만만치 않은 상대로서 멋진 게임이 기대되었고 관중도 구름처럼 몰렸다.

    역시 센터서클에서 할렐루야 팀이 모여 기도할 제 박수와 환호도 별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에 돌입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프로팀으로서의 근성 탓이었을까, 상금 3만 불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까. 할렐루야 축구팀은 엄청나게 거친 플레이로 대표팀에 맞섰다. 노장들이 많아선지 체력적으로 뒤떨어졌던 할렐루야는 무지막지한 태클과 반칙으로 경기를 수놓기 시작했고 최순호로 기억되는 한 선수는 대놓고 발목을 밟혀서 나뒹굴기도 했다.

    애초에 “프로축구팀”과 “그라운드 선교”라는 두 단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와 “큰 교회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만큼이나 큰 간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건 할렐루야는 프로축구팀이었고 동시에 그라운드의 선교사들이었지만 그날은 로만 칼라 따위는 롱드로잉으로 내던지고설랑 한 치도 양보 없는 승부사로 거듭나 있었다.

    결승에 오른 다른 팀과 상대할 전력 누수를 막기 위해 국내팀끼리라면 웬만하면 적용시키지 않을 레드카드도 등장했다. 할렐루야의 고참 박상인과 새까만 대표팀 후배 최순호가 나란히 퇴장당한 것이다.

    경기는 까고 맞고 뒹구는 더티 플레이로 치달았다. 연장전까지 치루는 혈투 끝에 승리는 할렐루야가 차지했다. 2대 1. 그러나 승리를 감사하는 기도 위로는 험악한 야유가 쏟아졌다. 적어도 그렇게 경기를 하고는 기도를 생략하는 편이 좋았으련만 선수들의 믿음은 공고했고 태도는 늠연했다.

    그리고 나는 똑똑히 들었다. 귓전까지 화끈거리게 하는 찬송가 소리를.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어쨌건 승리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자는 것이었을까, 팥죽 한 그릇으로 배고파 죽겠는 형으로부터 장자 자격을 사들인 야곱처럼 어떻게든 이기면 된다는 것이었을까.

    그 경기를 현장에서 보고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를 부르짖는 할렐루야 응원단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가 오늘날 제 몸을 못가누는 레비아탄이 되어 온갖 욕을 다 들어먹고 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전혀 반성할 줄 모르고 뭐가 어쨌다는 거냐면서 그 비대한 몸뚱이를 뒤척이게 된 것은 바로 그 경기에서 내가 목도했던 “승리”의 역사에 그 요인을 두고 있지 않을까.

    결국 이영무의 성실함과 귀감됨으로 대변되고 그리고 센터 서클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했던 선수들에 대한 박수로 표현되던 “그라운드의 선교사”들은 그렇게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승리’를 얻었지만 ‘신뢰’를 버린 것이다.

    적어도 할렐루야 시절 한국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위상에 있지 않았다. 부활절 계란 먹고 크리스마스때 빵 먹고 여름성경학교때 놀러 가고 중고등부 연애하러 가는 거 말고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수는 지금의 반도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승리’의 역사를 일구었다. 수만 신도를 가진 교회가 즐비하고, 장로 대통령도 두 번씩이나 만들었고, 이젠 은행과 정당까지 설립하겠다고 기승이시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영무에게 보내던 축구팬들의 박수나 초기 할렐루야 선수들에게 보내던 환호만큼의 신뢰를 비례하여 얻지 못하고 되레 “개독교”라는 자연친화적인 이름까지 획득했다.

    할렐루야 축구팀은 그 환호와 야유, 격려와 욕설 사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던 ‘기독교’ 팀이었다. 그 할렐루야 축구팀 (이 팀이 한국 최초의 ‘프로’라는 것 매우 시사적이다) 창단이 1980년 7월 2일 세상에 공표됐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