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몽의 필요성에 대하여
    '정보'와 '지식' 구분 안되는 인터넷 세계
        2013년 07월 01일 04: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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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과 SNS의 도래는 수많은 좌파들에게 낙관할 이유를 주었습니다.

    여태까지 극소수에 몰려 있었던 관점은, “전자 민주주의” 파도를 타고 급속히 대중 속으로 파급되리라는 데에 대한 희망은, 인제는 약간 수그러들었지만, 한 때에는 – 특히 “다중지성”을 이야기하곤 하셨던 분들에게는 – 꽤나 컸습니다.

    글쎄, “종이시대”에는 좌파의 발행물은 좌파의 재정적 한계로 어차피 많아야 몇 만 부를 넘지 못했는데, “인터넷 시대”에 <나꼼수> 따위처럼 “돈이 없어도 뜰 수 있다”는 것은 그 낙관의 현실적 근거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이외에는 예컨대 SNS 특유의 수평적 소통은 어떤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페북이나 트위터에서는 “교수님”이나 그 무슨 “회장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접해주는 게 없지 않습니까? 서로 안면 없는 사람들 사이의 토론인지라 고교생도 과감히 교장에게 딴지를 걸고… 대체로 이런 희망이었습니다.

    글쎄, 전혀 근거없는 희망도 절대 아니었습니다. 실은 각종 인터넷 진보 미디어 아니면 예컨대 비정규직들의 투쟁은 지금 이상으로 고립됐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있기에 그나마 주류 미디오들이 다 묵살시키는 현대차 비정규직들의 고공농성 소식을 어쨌든 볼 사람들은 다 보잖아요. 그러니까 인터넷은 “약자들의 무기”라는 성격은 강합니다. 거기에다가 인터넷은 각종 “신화 깨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 같은 나라에서 4년에 한 번씩 대재벌들이 움직이는 거대 주류 정당이 지명한 두 명의 보수적 정객 중에서 투표로 한 명을 뽑는 제도가 “민주주의”라는 신화부터 말입니다.

    위키릭스 사태, 그리고 현금의 스노든 사태 이후에 우리가 다시 보게 된 미국은 어쩌면 북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더 전체주의적 사회입니다.

    “전체주의”는 무엇보다 “중앙 권력의 감시 능력”부터 이야기하는 건데, 도대체 “모든 세계인들의 모든 이메일, 모든 통화”를 다 엿볼 수 있는 미국이라는 초거대형 괴물에 비해서는 북조선이 과연 무엇에 해당될까요?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논하자면 “이메일”이 뭔지도 모를 북조선 벽촌의 주민들은 어쩌면 훨씬 더 자유로울 것입니다.

    오웰의 <1984년>에서 나오는 집집마다의 ‘텔레비전 화면’, 그리고 그 화면이 행하는 수시적 감시를 기억하시죠?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미국 중심의 세계인데, 인터넷에 힘얻은 스노든 등의 “인터넷 시대 고발자” 아니면 우리가 이걸 그리 쉽게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인터넷/SNS시대의 각종 플러스가 있다면, 또 그 만큼이나 그 이상의 마이너스도 있다는 점을 부디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쓰레기 정보들

    인터넷에서는 “정보”와 “지식”은 전혀 구분될 수 없습니다.

    “정보”와 “지식”은 차이는 무엇인가요? “정보”는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틀리지 않아도 그저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데 “누구 누구의 시스루 룩, 너무해”와 같은 캡션은 분명히 “쓰레기 정보”를 뜻하는 것인데, 포털에서 같으면 이와 같은 주제와 “터키에서의 최악의 소요 사태” 같은 이야기는 동격으로 취급됩니다.

    이런 면에서는 인터넷은 상당히 “포스트모던”적입니다. 푸코 류의 “포스트” 철학에서 “담론”들 사이에서의 그 어떤 위계적 질서가 거부되고 본질적인 문제 (자본주의 제도의 전복)와 중요하지만 다소 이차적인 문제 (동성연애자 등에 대한 편견 타파 등)는 그 어떤 “서열적 관계”도 없이 동격으로 이야기되는데, 인터넷은 이와 같은 경향을 상업화시켜 극단으로 몰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어느 연예인의 치마 길이와 터키 민중의 명운이 걸린 이번 신자유주의적 종교 보수세력들과의 사투는 같은 격으로 이야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터키에서의 시위 사태에 대해서 인터넷 덕에 한국 대중이 그나마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 아닌가 라는 반문이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죠. 그거야 “디지털 마을”이 된 세계의 장점이지만, 한 가지만 이해해주세요.

    “안다” (“정보를 입수했다”)와 “이해한다” (“관련 지식을 충분히 획득하고, 상황의 배경, 이유, 현황 등을 십분 파악했다”)가 아주 다르다는 점입니다.

    일부 신문, 포털 등이 “소요”라고 악의적으로 폄훼한 터키 사태에 대해서 단순히-이미 전달 과정에서 충분히 왜곡될 수도 있는-정보를 입수할 뿐만 아니고 “이해”를 하자면 다음과 같은 “지식”은 필요합니다:

    – 터키 근대 국가형성사: 아타튜르크 (관련 링크)의 세속주의적 관료국가, 터키형 관료 주도의 자본주의, 박정희 모델과의 상이한 점과 유사한 점.

    – 군사독재와 종교세력을 중심으로 결집된 중소 부르주아지 관계, “부르주아적 재야”로서의 현직 수상 에르도간의 종교적 보수주의 세력 (관련 링크). 이 세력과 한국 부르주아 야당 (김영삼, 김대중 식의 보수적인 반독재 운동)의 상이한 점과 유사한 점.

    – 종교세력들의 집권, 군사집단에 대한 무력화 조치, 그리고 초고속 신자유주의 도입.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대중적 분노, 그리고 그 폭발.

    이 정도로 이해하면 예컨대 이번 터키 사태와 5년 전의 우리들의 촛불사태를 비교, 분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인터넷에서 범람되는 “정보”를 엄선하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이해에 따라서 이와 같은 방식의 “지식”을 구축하자면, 일단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형성, 발전, 내부 모순,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이해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를, 단순히 인터넷에서 떠도는 각종 “쓰레기 정보”를 줍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고요. 80년대적 어투지만, “학습”부터 필요한 것입니다.

    인터넷도 SNS도 다 필요할 때가 있지만,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계몽”일 것입니다.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내부적 완결성이 있는, 구조적인 유물론적인 접근 말입니다.

    그러한 “계몽”의 장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고 전통적 종이 미디어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대안적 교육기관이 될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계몽”의 과정에서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이죠.

    문제는, “계몽”의 주체가 돼야 할 “진보적 지식인”들은, “영어논문”으로 연구자의 자격이 가늠되어지는 시대에 그 어떤 대중적인 사업에도 힘쓸 여력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적들은 과거에 비해서 우리들을 훨씬 더 정말하게 통제한다는 것이죠. 거기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새로운 지성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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