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정치'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정치적인 것의 '소진'과 감각적인 것의 '과잉'
        2013년 07월 01일 0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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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근 들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詩)’의 본질적, 수행적 기능에 대한 논의는, 시의 존재 방식과 역할에 대한 메타적 담론의 진경들을 연출해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적인 것)’에 대한 각양의 해석적 견해들이 그야말로 백가쟁명으로 전개되었다. 그 세목을 여기서 다 요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논의의 결과, ‘시’의 근대적 규정들 이를테면 그것이 독백적이고, 자기 표현적이고,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양식이라는 생각을 훌쩍 뛰어넘어, 시가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결속하며 전개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르트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집중적으로 호출하면서 이루어진 이 같은 시와 ‘정치(성)’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율성을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고 예술에서 정치성을 소거하려 했던 힘과 가파르게 맞선 역사를 ‘시’가 가지고 있다는 점에 상도(想到)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으로 원용된 이가 랑시에르(J. Rancière)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와 어원을 같이 하는 ‘치안(police)’은, 감각적인 것을 구획하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배하는 위로부터의 힘이다.

    반면 ‘예술’은 감각을 분배하는 ‘치안’과 감각을 해체하고 재분배하는 ‘정치’가 마주치는 현장이다. 그 점에서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런데 ‘문학’이 정치적인 것은 그것이 세계에 참여(engage)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그 안에 해방 가능성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 담론 안에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정치’가 아니라, 그 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감성적 분배를 이루어내는 ‘정치’를 뜻한다.

    랑시에르가 던진 이러한 ‘정치성’ 화두들은 공통 세계를 재편성하는 여러 지표들을 포괄적으로 함의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의 후경(後景)에는, 최근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 변화와 함께 작가 선언 같은 외적 표지(標識)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정점에 올라서 있는 시와 정치성 논의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 하나는, 이 논의가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이나 현실 참여를 미학적 본령으로 삼아왔던 이들의 자기 갱신 의지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세대론적 경험이나 미학적 견지에서 볼 때, 아직 정치적 요소들을 적극 실현하거나 본령으로 삼아온 적이 없는 시인과 비평가들에 의해 논의가 진행된 것이다. 그 점에서 최근 논의는 경험적 자기 반성의 요소보다는 세대론적 자기 개진의 요소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일련의 논의들이, 구체적 시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제 비평이 아니라, 다분히 담론 비평의 형식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게다가 논자들마다 혹은 개별 아티클마다 전혀 다른 ‘정치성’ 개념을 상정하고 논의를 이끌어간 사례도 적지 않았던 터라, 외연적 활황에 비해 작품적 논쟁은 매우 빈곤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90년대 초반 ‘시와 리얼리즘’ 논의가 구체적 실물들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었다는 점과는 현저하게 구별된다. 따라서 앞으로 시와 정치성 논의는,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분화된 실물적 논의로 이어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문학과 정치의 함수 관계를 다룬 글을 묶은 책으로 우리는 <文學과 政治>(민음사, 1980)를 기억할 수 있다.

    이 책의 편자인 유종호 교수는 머리말에서 “터놓고 정치적인 문학이 있는가 하면 전면적인 정치적 무관심을 통해서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놓고 있는 문학도 있다. 그 정치적 의도가 민망할 정도로 드러나 있는가 하면 그것을 쉬 눈에 뜨이지 않게 교묘히 덮어두고 있는 문학도 있다.”면서 문학에서의 정치적 속성이 매우 편재적(遍在的)인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시사(詩史)를 통해 시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구체적 장면을 여러 차례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아왔다. 그만큼 근대 시인들은 개별 시편들을 통해 권력의 호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기존의 지배 담론을 풍자하기도 하고, 삶의 구체적 장면들을 비극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치적 상상력의 극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 점에서 최근 씌어지고 있는 우리 시단의 시편들은, 벤야민(W. Benjamin)이 말한 ‘제의적(祭儀的) 가치’로부터의 엄연한 퇴행이요, 무책임한 장르 이완에 가까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시가 오래도록 ‘예언자’의 목소리를 발해왔던 점에 비추어볼 때도, ‘정치적인 것’의 소진과 ‘감각적인 것’의 과잉 혹은 편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사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 시의 정치적 상상력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최근 시편들을 만나는 것은, 그것이 희귀한 만큼,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 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어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 심보선, 「호시절」(<시인세계> 2009년 여름호)

    심보선 시인

    심보선 시인

    “그때는 좋았다”라는 여러 차례의 표현이 시편의 내용을 분절하고 있고, 마지막의 “그러니까 그때는”이라는 표현에서는 ‘좋았다’는 말을 생략함으로써 그 표현조차 반어적이고 나아가 ‘호시절’이라는 제목도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화자는 그 좋았던 ‘그때’를 상상적으로 조감(鳥瞰)할 수 있도록, 일정한 내러티브를 내장한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한다.

    먼저 화자는 현실적 ‘가난’과 말의 ‘풍요’를 대립시키면서, 비록 모두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웠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가졌던 시절이 좋았노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좋았던 시절이 지난 ‘지금’은 어떠할까? 유추해보면, 화자는 지금이 ‘가난’은 넘어섰을지 몰라도 “말할 권리”는 현저하게 상실한 때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논리로 화자는 좋았던 ‘그때’를, 부재와 단절과 결핍의 ‘지금’과 확연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되는 과거 예찬의 역(逆)유토피아니즘을 두고, 우리는 낭만적이고 퇴행적인 상상력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과연 우리 경험에, 그렇게 말과 생각의 권리가 살아 있었고, 사람의 위엄과 가치가 온전히 보장되었던 때가 있기는 있었던가. 오히려 ‘그때’가 재현되기라도 한다면, ‘그때’ 역시 결핍과 부재로 가득했던 때였음이 곧바로 입증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화자가 안간힘을 다해 “그때는 좋았다”라는 반어 아닌 반어로 과거를 회억(回憶)하면서, 마지막에 “그러니까 그때는”이라는 말을 배치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순간 우리는 화자가 ‘그런데 지금은?’이라는 복선을 감추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화자는 ‘지금’이, 온전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마저 “그때가 좋았다”라고 회상하게끔 할 정도의, 불모와 폐허의 시대임을 선명하게 증언한다.

    또 우리는 화자가 “사소한 감탄”과 “엉터리 비유”를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로 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나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도 그 위대한 세목들을 확장한다.

    말하자면 그가 위대하다고 믿는 것은,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 속에 담겨 있었던 사소하고도 엉터리없는 그리고 희미하고도 어렴풋한 생각과 언어였을 따름이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고이 감겨준다는 뜻”에 담겨 있는, 강하지 않고 여린 것들의, 선명하지 않고 어렴풋한 것들의, 분명하고도 짙은 의미와 향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대한 묵시록적 접근과 함께 사회에 대한 환멸의 에너지를 무겁지 않은 잠언(箴言)들로 전화하는 시인의 여유로움과 만나게 된다.

    그 안에서 시인은 ‘아이러니’야말로 우리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미학적 방책임을 선언하면서, 그 선언으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우수(憂愁) 어린 묵시록이 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 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 진은영, 「오래된 이야기」(<창작과 비평> 2009년 겨울호)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편은 현실을 환기하는 고유한 힘과 시의 핵심에 육박해 들어가는 가독성이 잘 구현된 사례로서,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지금 여기’의 내러티브를 환기하고 ‘지금 여기’의 삶의 조건을 우회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심보선 시편과 상통한다.

    진은영은 첫 시집에서부터 비선형적 언어와 동화적 상상력을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었는데, 이 시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종의 신화적 상상력을 겨냥하고 있는 사례이다. 사실 ‘오래된 이야기’ 자체가 신화(myth)를 환기하고 있지 않은가. 「오래된 이야기」는 그 신화적 요소가 강렬한 현실 환기의 힘과 결합하고 있는 시편이다.

    시 안에는 ‘살인자’가 나오고, ‘아홉’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면서, 특유의 주술성이 점증(漸增)한다. 물론 살인의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달아나면서 원한도 사연도 모두 떨어뜨렸고, 그들이 떨어뜨린 조각들을 모아 흰 달에 비추면 모두 취할 정도의 강렬한 향기가 쏟아졌을 따름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살인자를 잊고 돌아가는데, 바로 그게 “그건 오래된 이야기”이다.

    화자는 “정말 오래된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나라도,/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을 새삼 기억함으로써, ‘오래된 이야기’에 일정한 신성성과 숭고미(崇古美)를 부여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하면서 현실을 유추케 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살인/원한/사연/달아남/쫓음/잊음/돌아감/흩어짐/무너짐’의 역동적 연쇄 속에서 ‘오래된 이야기’와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겹치고 갈라서고 다시 결속하는 절묘한 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심보선과 진은영 시편은 모두 ‘기억’의 차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그때는 좋았다’와 ‘오래된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어느 한때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의 충실한 역상(逆像)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랭거(S. Langer)의 견해처럼, ‘현재’는 ‘기억’과 ‘예기(prophecy)’ 사이의 강렬한 긴장(tension)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1970년대산(産) 시인들의 시편에 나타나는 이러한 묵시록적이고 신화적인 혹은 현실을 징후적으로 환기하는 시편들을 일러 ‘정치시’ 일반의 문법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정치시’의 외관과 내질은 참으로 다양한 것이고, 우리 시대에 씌어지는 시편들 역시 중층적이고 다채로운 음역(音域)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과거 노동시편의 전위였던 백무산 시편을 중요하게 성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물론 지난 시대의 우리 노동시는 계급 모순 극복에 대해서는 첨예한 문제 의식을 가졌지만, 근대 자체의 내파(內破)나 대안적 근대의 구축에는 매우 소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私的) 차원에 존재를 드리우고 있던 시의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정치적 상상력과 미적 감각을 결합한 것은 근대 노동시가 거둔 긍정적인 의의가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 백무산은, 시가 권력이나 자본과 길항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선명하게 증언해온 대표적 시인이다. 그런 그의 시가 여전히, 우리 시에 드리워진 정치적 상상력의 결여 현상에 대한 강력한 반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 백무산, 「나도 그들처럼」(<거대한 일상>, 실천문학사, 2008.)

    백무산

    백무산 시인

    시인은 자신이 ‘계산/측량/해석/부동산/시계’에 의해 존재를 전환한 후, 자연 사물들이 수런대는 언어를 듣지 못하게 된 과정을 노래한다.

    말하자면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비의 말을 새길 줄 모르고,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없고,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것인데, 이는 사물의 ‘말’이 심오해지고 난해해졌기 때문이다.

    그 사물들과 이웃이자 동무였고 그들과 말 놓고 살았던 기억은, 한때 그들처럼 “소용돌이”였던 시절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온갖 자본의 마술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게 된 언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게끔 한다.

    따라서 시편 안에는 그야말로 미학의 감각적 분배가 자본의 감각적 분배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금 여기’의 시대적 맥락이 깊이 녹아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다시 한 번 ‘현재’는 ‘기억’과 ‘예기(prophecy)’ 사이의 강렬한 긴장임을 증언한다. 그만큼 시인은 그렇게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생의 다른 생」) 있는 장면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기대와 기댈 곳」)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그때’/‘오래된’/‘알아들을 수 있었던’)와 ‘지금 여기’의 선명한 대비와 겹침을 통해 우리 시대의 현실을 환기하는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그간 이루어진 시와 정치 담론의 구체적이고 실물적 사례에 접하게 된다.

    이들 시편은, 감각과 사적 기억 편향으로 가고 있는, 혹은 성적(性的) 그로테스크와 장광설을 결합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최근 우리 시에 강력한 반성적 항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3.

    우리의 현실 속에는 수많은 정치성의 양태들이 존재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개재하는 권력 위계를 조정하는 정치 범주로부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현실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인간의 삶에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정치’ 양상들은, 우리 근대시가 깊이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는 우리의 삶 속에 편만(遍滿)해 있는 현실 권력에 우회적으로 저항하고, 그 환부를 드러내고 치유의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부당한 정치가 초래한 상처들을 폭로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자들을 옹호하고 궁극적으로는 타자성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돕는 상태의 회복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시의 정치성은 이러한 과정으로 발원하고 현상하고 귀결된다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이나 학교 생활에서 행사되는 다양한 미시 정치 또한 만만치 않은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각성된 개인들이 자기 권리를 확보하고 권력의 간섭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면서, 생활 가운데 행해지는 미시 정치 문제는 근대시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인정되던 가부장적 권력, 관습적으로 굳어 있던 남성 중심주의,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유형 무형의 폭력 등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미시 정치의 문제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시의 장(場)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와 정치의 새삼스런 관계론을, 최근 들어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시의 일차적 동기는 주체의 나르시시즘에 있고, 독자들의 시적 발화와의 동일화 욕망에 있다.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동일화’를 넘어 시의 발화와 수용이 타자들의 정치적, 역사적 경험을 포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면이 거울로 이루어진 방에 갇혀 무한 반사를 하는 자기 충족적이고 회귀적인 양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타자의 삶에 대한 관심, 그것을 공통 세계의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시의 심층적 동기이자 존재 이유가 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를 시의 정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탐색은 우리 시의 쇄말성과 감각 편향을 넘어설 가능성을 적극 제공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하나를 더 얹어보자.

    최근 이루어진 시의 정치성 논의는, 어떤 현실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는 ‘정치적인 것’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 하는 쪽으로 수행적 효과를 발휘할 위험이 있다.

    말하자면 시의 외연에 정치적 기표가 등장하거나 현실 정치 속에서 어떤 특정 경험을 담은 시편 대신에,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맥락을 산포한 시편들이 더 세련된 미학적 산물인 것처럼 오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와 정치 논의에서 현실적 기표를 은폐하면서 현실과 맞서는 시편들만 담론화하지 말고, 백무산으로 표상되는 구(舊) 정치시의 전위들이 치러내는 자기 갱신의 장면들 혹은 우리 시대의 맥락과 양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사례들도 적극 점검하고, 송경동, 문동만, 김해자 같은 이들을 논의의 장으로 적극 포괄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첨예하게 벌어지는 담론적 경쟁과 충돌을 외면한 채, ‘정치’ 개념을 감각 차원에 국한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자본 운용 방식에 대해 괄호를 치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상상력으로는, 벡(U. Beck)이 지적하듯 전통을 빠져나와 시장의 종복이 되거나, 벤야민이 시사하듯 실내의 반체제주의자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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