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 담론,
    ‘오래된 악마’를 깨우다
    [빵과 장미] 대다수 포유류에 동성애 존재....동성애 혐오는 인간에게서만 나타나
        2013년 07월 01일 1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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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동성애 박해의 역사2 링크)들에 이어서 정리를 합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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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5일 파리의 도심 한복판에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극우파에 의해 안티파시스트 활동가인 18살의 학생이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2012년 사회당의 올랑드가 동성결혼 합법화를 약속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프랑스 사회의 ‘오래된 악마’는 깨어났다. 여론조사의 ‘숫자’를 보면 분명히 과거에 비해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열렸음에도 극단적 혐오가 함께 존재하는 복잡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1999년에 시민연대계약(PACS)을 통해 동성애자의 법적 동거가 인정된 이후 프랑스 사회에 동성애에 대한 상당한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동성결혼에 대해서는 1999년 이전에는 48%가 호의적이었지만 2011년에는 63%로, 자녀입양은 33%에서 58%로 변했다.

    그러나 SOS-Homophobie협회의 지난 5월 보고서를 보면 동성애 혐오자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가 2012년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이제는 지나갔으리라’ 생각했던 동성애 혐오는 오히려 제도적 관용 속에서 더 부상하고 있다. ‘악’은 언제나 우리와 공생하기 때문에 치료되거나 벌할 수 있는 정체가 아니라 영원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요즘 새삼스레 재확인하는 중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퀴어문화축제가 14회를 넘겼고, 김조광수 영화감독에 의해 한국 ‘최초의 동성 결혼’이 곧 치러질 역사적 순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혐오의 감정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겨레(6월 7일)와 경향신문(6월 18일)에 동성애 혐오 광고가 실리기까지 했다.

    광고가 물론 언론사의 입장은 아니지만 특정 존재에 대한 배척과 혐오가 어떻게 돈만 내면 ‘광고’라는 틀 속에 안전하게 배치될 수 있는지 의아하다. 광고 담당 관계자는 사과를 했지만 “동성애자의 생각을 이성애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굳이 덧붙였다.

    차별을 의견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구타하는 사람에게 “나 때리지 마.”라고 하니까 “너의 생각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궤변이다. 

    주간경향(1028호)에는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이 “역사의 필연은 동성애 개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막연한’ 동성애 혐오를 표현하는 이상한 글을 쓰고, 시사인(297호)에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동성애는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는 입장을 내세우면서 동성애 합법화가 해법이 아니라는 황당한 글을 쓰기도 했다. (동성애는 지금도 불법이 아니랍니다.) 이렇게 기본 개념조차 혼동하며 게으르게 타인을 바라보는 이들이 자신들의 혐오감은 참 부지런히 표출한다.

    이 혼동과 혼란 속에서 세상은 어쨌든, 변하고 있다. 동성애의 범죄화에서 점차 동성애 혐오를 벌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또한 110시간 이상의 의회 토론을 거쳐 2013년 5월 17일 프랑스에서는 동성결혼과 자녀입양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미 대법원은 지난 6월 26일 결혼을 이성간 결합으로 정의한 연방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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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수 천명의 동성애자가 수용소에 잡혀갔다. 같은 시대에 소련에서도 동성애를 범죄로 만들었다. 인민을 억압하는 파시즘이나 인민을 해방한다는 사회주의 체제나 동성애자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동성애를 정신병과 무관하다는 발표를 한 때는 겨우 1993년이 되어서다.

    동성애자들이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처해지는 나라는 현재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장기 징역이 선고되고 인도네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100대의 태형에 처해진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그리고 수단은 교수형이다. 우간다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동성애를 벌하기 위해(사형까지 가능하도록) 동맹을 맺기도 한다.

    이란 게이 사진

    2005년 이란에서 동성애 유포 혐의로 2명의 청소년이 사형을 당해 국제적 논란이 컸다.(photo :MASHHAD)

    그런데 이렇게 잔인한 처벌을 옹호하는 무슬림들은 “투석형이나 화형, 높은 곳에서 던지기 등의 가혹하고 비인간적 처벌은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회로 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라고 한다. ‘인간성’을 위해 ‘비인간적’ 처벌을 한다는 이 모순된 사고방식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차별의 가해자들은 언제나 ‘좋은’ 목적을 위해 소수자와 약자를 사회에서 제거하려 하고 이것이 그들 나름의 정의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법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직접 폭력을 가하지 않아도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 젊은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보다 최대 5배나 자주 자살 충동을 느낀다. 최근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세 명 중 한 명의 동성애자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커밍아웃’이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다가오기에 분열된 정체성 속에서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박해의 근거로 제시하는 핵심은 언제나 동성애가 반자연적이며 재생산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300종의 포유류를 포함해 450종 이상의 동물에게서 동성애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동물 내에도 동성애자가 존재함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기는커녕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가깝지 않은가.

    게다가 현재 동성애자에게 사형까지 언도하며 범죄화하는 아프리카의 수단이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2차 대전 전에 영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E. 에반스-프리차드는 수단에서 아잔데Azandé 민족을 연구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수단의 아잔데 군인들에게는 성인 여성과 결혼할 수 있는 재산을 만들 때까지 소년과 결혼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 소년들을 ‘아내’라고 불렀고 이 소년들을 ‘남편’을 위해 일반적으로 부인이 하는 모든 일을 한다. 물론, 성관계까지 포함하여. 그리고 이 ‘남편’이 이제 여자와 결혼하고 나면 성인이 된 소년, 곧 ‘과거의 아내’는 다시 소년과 결혼한다. 그리고 반복.

    나는 이 제도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 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결혼제도만을 정상으로 여기며 다른 형태의 사랑이나 가족 구성을 비정상으로 여기지만, 실은 상황에 따라 사회가 얼마든지 다른 형태를 용인하고 부추겨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 ‘인간의 보편적 진리’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는 것들 중에 많은 경우는 제도 담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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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두 개의 성으로 나뉘는데 익숙해졌고 그러한 이분법이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 개념과 언어는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굳어졌다. 이 양성이 마치 바늘과 실처럼, 볼트와 너트처럼 한 쌍이라는 관념 때문에 다른 성 혹은 다른 방식의 결합을 낯설어 한다. 기본적으로 이 두 개의 성이라는 문법에서 벗어나야 다른 형태의 인간관계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트>라는 2세기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물론 루브르에서는 너무 많은 작품,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너무 많은 관람객 수로 인해 작품을 제대로 보기란 어렵지만, 어쩌다 이 조각상과 마주친다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로 보이지만 남자 성기를 가지고 있다.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트는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다. 단지 신화 속의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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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생식기를 같이 가지고 있는 헤르마프로디트 (출처:Good Dr의 블로그)

    1838년 11월 8일 프랑스에서, 에르퀼랭 바르뱅이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여자가 아니었다. 정확히 그(녀)는 여자로 ‘신고’가 되었다. 작은 남자 성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여성의 질도 있었다. 그의 부모는 여자에 가깝다고 생각해 여자로 신고했다.

    ‘양성’의 틀로 짜여진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기에 그는 적절한 몸이 아니었다. 가슴도 없고 털이 많아서 계속 면도를 해줘야 했다. 이상하고 추한 아이로 살아가다 그는 성인이 되어 결국 의사에게 몸을 확인 받고 아벨 바르뱅이라는 남자로 법적 신고를 다시 했다. 그는 여자를 사랑했다. 질과 음경을 모두 가졌고, 여자를 사랑한 그는 과연 남자인가 여자인가. 남자나 여자가 ‘되어야’ 하고, 이성을 사랑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결국 그는 자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역시 남자의 성기를 가진 ‘여자’가 등장한다. 세조 시대에 사방지(舍方知)라는 인물은 수많은 여성들(노비, 비구니, 양반가의 과부 등)과 관계를 가진 여자이며 남자였다.

    사방지를 소재로 다룬 80년대의 에로영화 <사방지>(1988년)에는 개성 있는 배우 이혜영이 사방지로 출연한다. 사방지와 마님들 간의 애정표현과 성관계, ‘특이한 몸’으로 인한 사방지의 비극적 최후를 다루고 있는 에로영화 속에서 오히려 성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발견한다.

    사방지

    영화 ‘사방지’의 포스터

    아직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으나 국제 양성(간성) 기구(The Organisation Intersex International)에 의하면 바르뱅이나 사방지처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이 최소 0.05%에서 최대 4%까지 추정된다.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신의 실수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념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눈을 씻고 현실의 성을 보자.

    지난 5월 6일 이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위치한 한 중학교에서는 성전환자를 위한 중성 탈의실도 마련했다. 성전환자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받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스톡홀름의 한 탁아소에서는 그와 그녀라는 대명사 대신 hen이라는 중성 대명사를 쓴다. 그와 그녀라는 언어에 인간의 성이 갇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인식하는 중이다.

    우리는 ‘양성’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모두 여성이 ‘되고’, 남성이 ‘된다.’ 양성은 없다. 사회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세상의 남성과 여성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6월 29일 토요일 파리에서 열렸던 게이 프라이드(Gay Pride)의 사진을 첨부한다. 굳이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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