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브라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현재의 대중 저항과 그 이면에 있는 500년 브라질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
        2013년 06월 27일 03: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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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의 거대 도시 상파울루에서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시위가 벌써 3주일째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6월 6일경부터 시작된 이번 시위는 21일을 기점으로 전국 80여개 주요 도시에서 25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서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을 뿐만 아니라 이슈도 애초 버스 및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에서 정부의 부정부패와 높은 세금, 질 낮은 공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 등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지난 18일 딜마 호세프(Dilma Rousseff) 대통령은 긴급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시위대의 메시지가 충분히 전해졌고,” 브라질 “정부는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또 19일에는 브라질 노동자당에 소속된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이 애초의 버스 요금 인상 계획안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질 노동자당 소속 정부 당국자들의 이같은 유화적인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위는 브라질 사회가 지닌 오래된 사회계급 간 균열 구조와 딜마 호세프 현 정부의 미온적인 개혁 조치의 한계 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레디앙>은 브라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구조적 연원과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글을 번역해서 게재한다. 원문은 토마스 로타(Tomas Rotta)가 6월 25일자 미국의 한 시사 잡지 Counterpunch에 기고한 “빵과 서커스 그리고 불만 – 2013년 브라질에서의 대중 시위와 월드컵, 그리고 500여 년 동안의 압제”(Bread, Circuses and Discontent – Brazil 2013: Mass Demonstrations, the World Cup, and 500 Years of Oppression)다.

    이 글을 쓴 토마스 로타는 브라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암허스트의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옮긴이 신희영은 뉴스쿨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재정정책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옮긴이는 레디앙 편집자와 상의를 거쳐 원문에는 없으나 글쓴이의 논지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임의로 소제목과 몇몇 부가적인 표현들을 넣었다. 한국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주요 사건일지’도 글 말미에 덧붙였다. 다소 길지만 한번에 게재한다.  (원문 링크) (관련된 레디앙 기사 링크)<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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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은 심각한 불평등 문제를 한 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위로부터의 부분적인 개혁’ 시도로 점철된 나라다.

    대중교통 요금 인상과 월드컵을 주관하는 데 들어가고 있는 천문학적인 비용 문제 때문에 촉발된 현재의 대규모 시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분적인 변화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사회 문제들에 제대로 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에는 어쩌면 사태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다.

    사건의 발단

    브라질은 삼바 축제와 축구에 얽힌 평화로운 이미지로 전 세계에 알려진 나라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견고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적인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2014년 월드컵을 주관하기 위해서 정부가 쏟아 부어온 수백억 달러의 비용은 제대로 된 사회보장 서비스도 존재하지 않고 기본적인 공공 재화도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브라질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선호도가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브라질 전역의 주요 도시의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6월 초순 시위 발생 초기 상파울루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한 행위는 전국적인 분노와 시위를 촉발시키면서 수많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로 번져나가게 만들었다.

    시위대에 대한 브라질 정부의 반응은 지난 500여 년 동안 브라질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던 불평등 구조에 대한 분노와 이 분노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 지구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브라질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불평등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아주 오랫동안 노예제에 기반을 둔 경제 체제와 정치적 압제가 존재했던 나라다.

    500여년 전 포르투갈의 제국주의자들은 미네랄과 사탕수수를 얻기 위해 브라질 선주민들을 죽이고 총칼로 위협하며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포르투갈 제국주의자들은 또한 아프리카에서 사냥해 온 식민지 노예들을 브라질에 강제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 노예들 가운데 40%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거주하는, 아프리카 대륙 밖에 위치한 최대의 아프리카 나라가 되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과 선주민들 그리고 빈민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경제 체제는 그로부터 40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 같은 노예제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브라질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예를 들어, 플랜테이션을 소유한 영주의 저택에 딸린 노예 전용 숙소(senzalasl)를 연상케 하는 작은 방들이 여전히 중산층이나 상층 계급이 살고 있는 저택에 항상 딸려 있을 정도다.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와 좌절의 역사

    그러던 중 첫번째 개혁 시도가 발생했다. 그것은 1822년 브라질의 독립과 함께 시도되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당시의 개혁은 실제로는 전혀 개혁이 아니었다. 급격한 사회정치적 변화도 없었다.

    당시 브라질의 지배계급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왕가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포르투갈 본국 왕의 아들이 새로 ‘독립한’ 브라질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했고, 그 뒤에는 그의 아들이 다시 황제가 되는 식이었다.

    두번째 개혁 시도는 1888년 대토지 소유 계급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끝내겠다고 선언하면서 찾아왔다. 물론 이 때에도 본질적인 사회 변혁은 없었다. 부분적인 변화 조치만 있었을 뿐이다.

    이 무렵 브라질은 지구상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였고, 당시 영국이 무역 제국을 건설하면서 브라질을 압박하고 있었던 데에 대한 순응의 수단으로 노예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에 불과했다. 당시 브라질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이런 압력을 수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마치 중세의 농노들처럼 억압적인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있던 값싼 이주 노동자들을 마음껏 착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개혁 시도는 1889년 당시의 지배계급이 브라질 제국을 근대 자본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찾아왔다. 그런데 이것도 지배계급 내부의 거래의 산물이었다. 그 어떤 민중적 저항 운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중들의 참여도 존재하지 않았다.

    네번째 개혁 시도는 1929년 게툴리오 바르가스(Getulio Vargas)가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스(Minas Gerais) 주의 정치 엘리트들과의 내부 거래를 끝내면서 시작되었다. 바르가스는 브라질 남부 출신으로 1889년부터 연방 정부를 통제하고 있던 대토지 소유주들에 대항한 쿠데타를 지휘하고 조종하면서 나름의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통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르가스 그 자신도 대토지 소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브라질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었다.

    바르가스 통치 하에 있던 1930년에서 1945년 사이 브라질은 빠르게 산업화되었고, 어느 정도는 통일된 국민국가의 면모를 띠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르가스는 오늘날의 브라질 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노동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아래로부터의 저항 투쟁을 철저하게 억압했다. 바르가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르가스가 유지하려고 했던 사회 질서를 답습했다. ‘질서와 번영’(Order and Progress)이 그들의 모토였다. 브라질 경제를 산업화시키되, 지배계급의 질서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굴라르

    조아오 굴라트 대통령의 모습

    1960년대 브라질의 아옌데, 굴라트의 좌파 개혁 시도와 좌절

    그런데 이 같은 구래의 브라질 정치가 1960년대에 접어들자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당시 브라질 노동당(Brazilian Labour Party) 소속 조아오 굴라트(Joãão Goulart)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온건하나마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굴라트가 보였던 좌파적 성향과 쿠바의 카스트로, 중국의 모택동 등과 유지했던 친밀한 유대관계는 당시의 지배 계급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어떤 것이었다.

    [당시 굴라트 대통령은 자신이 마련한 기본 개혁안(Basic Reforms Plan; Reformas de Base)에 따라 주요 거대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기업 이윤을 대다수의 브라질 국민들에게 재분배하는 정책을 취하려고 했다. 브라질의 우익 정치세력들과 대토지 소유주 그리고 군사 쿠데타 세력들은 굴라트 대통령의 이 조치를 ‘사회주의적 책략’이라고 비난하면서 세력관계의 변화를 도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4년 3월 브라질에서는 미국 정보부의 후원을 받은 일군의 군 장성들이 군사 쿠데타(Golpe de estado no Brasil em 1964)를 일으켰고, 굴라트 대통령은 권좌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21년 동안 브라질에서는 쿠데타에 관여했던 군인들이 순차적으로 집권하는 장기 군사 독재 체제가 형성되었다. 브라질 군부는 민중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고 그들을 감옥에 처넣으며 부자들의 이윤을 보장해 주었다.

    이렇게 지속된 군사 쿠데타는 토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제대로 된 보통 교육에 대한 희망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브라질은 도시건 농촌 지역이건 그 이전보다 더욱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대토지 소유주 가족은 서유럽 나라의 국토 면적에 맞먹는 규모의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벨기에 국토에 맞먹는 토지를 한 사람이 소유하고, 게다가 그 사람이 언론과 대중매체, 다수의 텔레비전 채널을 장악하고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시라. 브라질에서는 이 자본주의적 대토지 소유자들을 일컬어 ‘제후’(coronééis)라고 부른다.

    1980년대 브라질 민주화의 봄과 민주 공화국 헌법 제정

    이 제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호세 사르네이(Joséé Sarney)는 1985년 오랜 동안의 군사 독재 체제를 끝내고 민간인 출신으로 처음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 어떤 민중적인 저항이나 보통선거와 같은 직접적인 투표권 행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자들이 정치적인 협상을 벌여 군인들을 중앙 정치 무대에서 철수시키고 부자와 권력자들이 정부 요직을 독차지하는 식이었다.

    브라질의 현대 역사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브라질 사람들은 위에서 결정되는 어떤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르네이는 여전히 브라질 상원을 관장하며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군사 독재 체제가 유지되고 있던 동안 브라질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아래로부터 시작된 사회 운동의 물결이 형성되었다. 상파울루 주에서 발생한 첫 번째 총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룰라(Luiz Inácio Lula da Silva)가 이끌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이 국가권력의 억압과 불평등에 대항하는 대중적 시위를 전개했다.

    1978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시기에 브라질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사회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회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이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레이건과 대처 그리고 미테랑 등이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공공하게 구축하던 시점에 벌어졌다. 결국 브라질 노동자당은 총파업을 지도하면서 그들이 의도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의제의 압도적인 힘에 눌리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승리는 1988년 새 헌법(Constitution of the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Constituição da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이 통과되면서 찾아왔다. 브라질 현대 역사에서 이처럼 헌법 개정이 달성된 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달성한 최초의 성과였을 것이다.

    이 헌법은 사적 소유와 시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공인했고, 비록 세계의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던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묻혀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미 있는 노동권과 다른 진보적 개혁안들을 보장했다.

    [이 헌법은 1986년 성립된 제헌의회가 2년에 걸쳐 만들고 1988년에 통과되었다. 이 헌법을 통해 브라질은 개인의 시민권과 종교 및 사상의 자유를 성문화했고, 인종 차별과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탄압과 전횡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브라질 연방 공화국(the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의 헌법이 탄생한 것이다.]

    1990년대 신자유주의와 반동의 물결

    그러나 브라질 노동자당의 압력과 진보적 개혁 조치들에 놀란 지배계급은 이 조치들을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언론 매체들의 공공연한 조작 때문에 상파울루 주의 총파업을 이끌었던 노조 지도자 룰라는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브라질에서 사회 민주주의를 달성한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브라질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990년에서 2002년까지, 브라질 사람들이 1978년에서 1989년까지 아래로부터의 민중 투쟁을 통해 달성했던 모든 사회 개혁의 성과들을 파괴하려는 목적에서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단행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는 사영화와 고실업, 대량 해고, 높은 실업률, 은행들에 대한 편파적인 구제 금융 지원, 무역 및 금융 자유화와 탈산업화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불평등의 체제는 지난 5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엿먹어라! 월드컵’ – 500년간 지속된 압제의 역사와 브라질 민중의 각성

    브라질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지난 5세기 동안 자신들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해왔다. 때로는 부분적인 개혁 조치를 취하고 때로는 강력한 억압 조치를 단행하면서 말이다.

    브라질 인구의 절반은 여전히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청결한 배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브라질 인구의 대부분이 사실상 문맹 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브라질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하고 마치 스위스의 한 별장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축에 속한다. 그리고 이 극빈자들은 노골적인 노예제도가 유지되던 때의 노예들의 삶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지난 5세기 동안 지속된 브라질의 역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빈자들을 억압했던 압제의 역사였다. 정부 당국자들은 교육과 의료 보장에 투자할 돈이 없다고 계속해서 떠들어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리는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도대체 어디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바로 축구를 위해서.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축구를 더 사랑한다는 전형적인 브라질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 거리 곳곳에서 외쳐지는 ‘엿먹어라! 월드컵’(Foda se a copa!)이라는 구호와 충돌하고 있다.

    상파울로 시위

    상파울루 시위 모습. 출처: http://roarmag.org

    지금 브라질 전역의 거리 곳곳에는 불이 붙었다. 시위 참석자들이 애초에 요구했던 것은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된 브라질 사회의 불평등과 착취 때문에 교통 요금 인상과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폭력은 훨씬 더 심각한 어떤 것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우리 브라질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한국의 독자들이 아마 컴퓨터와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고 있을 것들은 바로 한줌도 안 되는 브라질 부자들이 만들어낸 사회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들이 지난 500여 년 동안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중교통 시설의 사영화와 상파울루 시의 만성적인 교통 문제

    상파울루는 이제 비효율성과 값비싼 교통의 문제 때문에 촉발된 매일매일 벌어지는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의 대중교통 체계는 1946년부터 최근까지 주 정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대중 교통은 괜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운전사와 직원들에 의해서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상파울루 시의 최초의 좌파 시장이자 노동자당 당원이었던 루이자 에룬디나(Luiza Erundina)는 무료 교통 서비스 체계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에룬디나 시장은 무료로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그 체계 도입에 필요한 비용을 기업가들과 부유층들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조달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 계획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이 시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대대적인 로비와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에룬디나 시장은 패배했고, 더욱 심각하게는 파울로 말루프(Paulo Maluf)라는 우익정당 소속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말루프는 시장에 당선되자마자 버스와 지하철을 전격적으로 사영화(민영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995년의 일이다.

    말루프는 이제는 널리 알려진 신자유주의 정책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브라질의 최대 도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당시 요금을 통제하고 있던 민간 마피아 카르텔에게 팔아넘겼다.

    상파울루 시의 교통 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세 개의 민간 기업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버스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상파울루의 대중 교통 체계는 브라질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체계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가 되었다.

    겉으로는 시 정부의 관리 하에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이 회사들의 회계 장부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업들 회계장부의 불투명성 문제를 마지막으로 거론했던 마르타 스풀리시(Marta Suplicy)는 마피아들의 살해 위협 때문에 공중 앞에 나설 때에 항상 방탄복을 챙겨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상파울루 시민들은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대체로 하루의 몇 시간을 길거리에서 허비한다. 상파울루 외곽에 위치한 곳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일하러 나가기 위해서 하루 평균 세 시간 이상을 허비해야만 한다. 값비싼 요금을 내면서도 승객들로 미어터지고 시끄럽고 번잡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말이다.

    임금 소득에 비추어 볼 때 상파울루 시의 대중 교통비는 세계 최고로 높다. 상파울루 시민들은 교통비를 대기 위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에 비해서 10배 이상이 되는 시간 동안 더 일을 해야 하고, 파리 시민들이 일하는 노동 시간보다도 두 배 이상을 더 일해야 한다. 사영화된 이후 버스와 지하철 운전사들은 그들이 그 이전에 누리고 있던 각종 임금 혜택과 수당을 빼앗겼고, 그들의 노조 역량도 심각하게 잠식되었다.

    무상 교통 운동, 최근 시위의 불을 댕기다

    무상 교통 운동 (The Free Fare Movement; Movimento Passe Livre, MPL)이 출현했던 것은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약 8년 전부터 MPL은 브라질 곳곳에서 대중들을 조직하고 집단적인 토론회를 개최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가장 전투적인 그룹은 주로 대학생들과 젊은이들로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MPL 운동가들은 브라질의 기성 정당 체계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선거 활동에 대한 압박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주요 도시에서 무료로 대중 교통을 이용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 나름의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오늘 MPL은 지금 브라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시위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교통 문제로 아주 오랫동안 골치를 앓고 있던 한 도시에서 무료로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내걸고 시작된 캠페인이 브라질 사회를 격동시키면서 보다 광범위한 사회 정의에 요구와 급속하게 맞물리고 있다.

    MPL의 캠페인과 이에 대한 경찰들의 폭력적인 진압이 브라질 사회에 만연했던 불평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게끔 대중들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중 시위는 컨페더레이션컵 축구 경기(Confederations Cup)가 열리는 경기장과 주요 고속도로 그리고 브라질 주요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 심지어 연방 국회 의사당과 외교부 건물 앞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 이 시위는 주요 기업들이 위치한 건물 앞과 중산층이 몰려 사는 동네 그리고 슬럼 지역에서도 일제히 벌어지고 있다.

    브라질 극우 세력들의 준동과 불투명한 미래

    현재 시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운동의 양상을 한 단어로 특징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공산주의자들의 책략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 운동은 매우 과격한 급진주의 운동이 아니며, 내가 보기에 충분히 정치화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이 운동은 어쩌면 다수의 브라질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막대한 불평등과 억압에 대항한 비명이라는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주의 집단들이 현재의 정치적 국면을 자기네 뜻대로 동원할 위험이 커지고 있다. MPL 운동가들의 캠페인을 경찰들이 강경하게 진압했던 초기의 사태를 뒤로 하고, 보수주의 집단들은 MPL 캠페인을 빨리 진압해야 한다던 초기의 입장을 버리고 재빠르게 이 운동을 순치시키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극우 집단들과 연계되어 있던 거의 모든 대중 매체들이 시위대를 옹호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반부패’ 슬로건을 내걸면서 브라질 노동자당과 현 연방 정부 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를 잠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시위 물결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상파울루 폴하(Folha de Sãão Paulo)와 상파울루의 현재(Estado de Sãão Paulo) 같은 극우 일간 신문들과 글로벌 네트워크(Rede Globo)와 같은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논조를 살펴보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재빠르게 사태를 이용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들의 시위와 저항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다. 좌파 성향의 시위 참가자들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반면, 극우 집단들은 중도 좌파 성향의 현 노동자당 정부를 약화시키려고 반동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시위가 좌파적 전위 세력과 명확한 정치적 추동력을 얻지 못한다면, 현재의 시위대들은 의도하지 않게 보다 광범위한 수구적인 정치 세력들을 위한 독무대를 만들어 주게 될지 모른다.

    룰라와 딜마 호세프 그리고 브라질 노동자당의 사회정책

    그러나 현재까지 극우 집단들의 이러한 여론 조작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시위대들은 낡은 제도들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브라질 사회와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지난 500여 년 동안 지속된 불평등 구조가 만연한 브라질 사회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없이 부분적인 변화만으로 봉합되었던 종래의 시도에 마침내 싫증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룰라가 2003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노동자당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변화는 부분적이고 타협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룰라 대통령은 극빈층들을 돕기 위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보다 많은 사회 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최저 임금을 올리며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개혁 조치들은 브라질의 부자들과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서도 극빈층을 도울 수 있게 해준 국제적으로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브라질이 그동안 중국을 포함하여 신흥 공업 국가들에게 원유와 가스, 식량(콩과 밀, 사탕수수 등)과 광물(아연과 망간 등) 자원을 팔고 그 대가로 확보할 수 있었던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 덕분에 룰라 정부는 브라질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서도 각종 사회 정책들을 실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호세프와 룰라

    노동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룰라와 함께 한 딜마 호세프

    그러나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차원의 금융 위기는 이 같은 우호적인 시나리오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룰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딜마 호세프는 이제 전혀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녀는 이제 부자들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브라질 경제가 최근에 직면하고 있는 정부 지출의 삭감과 낮은 경제 성장률이라는 조건 속에서 부자와 빈자들 간의 갈등은 이제 사생결단의 싸움이 되어 가고 있다.

    브라질의 극빈층들은 보다 많은 사회 정책 프로그램을 원하고 정부가 보다 많은 직접 투자를 담당하고 더욱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딜마 호세프 정부는 브라질 기층 민중들의 이러한 요구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브라질 노동자당이 그 당이 연원했던 대중 운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 단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익 정치 세력들이 민중들의 불만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태다.

    브라질은 어디로?

    현재 상황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다. 전통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최근의 시위를 접하며 큰 충격을 받고 있고 아직까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지금까지 지난 시절 브라질 자본가 계급과 암묵적으로 맺었던 정치적 타협이라는 짐에 허덕이며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상파울루의 시장이 된 노동자당 소속 페르난도 하다드(Fernando Haddad)와 주지사가 된 게랄도 알크민(Geraldo Alkmin)은 10만 여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MPL가 요구하던 요금 인상 반대를 줄곧 거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시위대의 위력에 눌려 대중 교통 요금을 인상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한 뒤에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공적 자금이 민간 교통 카르텔 회사로 넘어갈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상파울루 시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대중 교통 요금을 납부하게 될 것이다.

    현재 브라질의 갑부들도 전혀 침묵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2014년의 월드컵과 2016년의 올림픽 경기를 주관해서 수백억 달러의 이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FIFA와 같은 초국적 자본가 기업들도 현재와 같은 시위가 계속되면 그들이 잠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축구에 대해서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라고 알려진 브라질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 경기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이익도 얻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처럼 거대하게 조성된 복합 스포츠 경기장이 브라질의 고질적인 문제들 – 부족한 병원 시설과 형편없는 대중 교통 그리고 낙후된 학교 시설들과 너무나도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이 부실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쩌면 너무나 비싼 표 값 때문에 월드컵 축구 경기를 이 경기장 안에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빵과 서커스로 대중들의 욕구를 잠재우던 정책들이 어느 순간 그와 정반대되는 결과, 즉 대중들의 불만을 만들어냈다. 브라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과연 누가 예상하기라도 했던가?

    필자

    이 글의 필자 토마스 로타

     <주요 사건일지>

    * 6월 1일에서 14일 사이 : 2013년 1월 현 상파울루 시장이 발표한 대중교통 요금 인상안 (6월 1일부터 현행 R$3.00에서 R$3.20으로 인상한다는 방안)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산발적으로 전개됨.

    * 6월 6일 : 첫 번째 대규모 시위가 상파울루 시의 폴리스타 애버뉴(Paulista Avenue)에서 발생함. 브라질 전투 경찰이 최루탄과 시위 진압용 고무탄을 발사하며 강경하게 진압 시도함. 브라질 시민사회 단체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등이 경찰의 과잉 진압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함.

    * 6월 17일에서 18일 사이 :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브라질 전역의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임.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우 10만 명의 시위대가 집결함. 시위대의 일부가 리우데자네이루 주 정부 청사에 진입을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진압이 이루어짐. 3명의 시위 참가자가 경찰의 발포로 다치고 10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에 후송됨. 같은 시각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과 미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브라질 국민들이 해외에서 동조 시위를 벌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음.

    * 6월 18일 : 딜마 호세프 대통령이 시위대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긴급 성명서를 발표함.

    * 6월 19일 : 시위대의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계속됨.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시장이 대중교통 요금 인상안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함.

    * 6월 20일 : 브라질 전역의 100여개 도시에서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리 시위에 동참. 평화적인 시위.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주요 주 및 시 정부 청사에 긴급 전투 경찰이 배치됨.

    * 6월 21일에서 23일 사이 : 전날보다 더 많은 규모의 시위 참가자들이 브라질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임. 브라질 역사상 초유의 사태. 리베라우 프레토 시에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 차량 때문에 청년 한 명이 죽고 11명이 크게 다치는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함. 딜마 호세프 대통령이 긴급 확대 각료 회의를 소집하고, 시위대의 요구를 즉각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다시 성명서를 발표함.

    * 6월 24일 : 이전보다 규모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거리 시위가 계속됨. 딜마 호세프 대통령은 연방 정부 기금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대중 교통 수단과 건강보험 및 교육 시설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함. 이에 덧붙여 부패방지를 위한 포괄적인 정치개혁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함.

    * 6월 25일 : 딜마 호세프 대통령은 포괄적인 정치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줄 것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헌법 조항의 일부를 수정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함.

    * 6월 26일 : 브라질 연방 의회가 국영 정유회사 로열티 전액을 교육(75%)과 의료 시설(25%) 투자에 사용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

    필자소개
    옮긴이 신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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