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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캐나다 차이나는 이유
    [세계 LGBT운동의 역사] 197-80년대의 성장과 차이(캐나다-2)
    By 토리
        2013년 06월 25일 03: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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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LGBT운동의 역사, 캐나다-1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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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인권제도의 성장

    여성운동의 등장은 LGBT 권리운동 신장에 있어서도 뜻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0년대 퀘백 국가주의의 근대적 국가 지향으로의 전환, 퀘백 사회의 급속한 세속화는 젊은 청년들로 가득찬 운동들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퀘백의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게이 해방 단체들은 새로운 국가주의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연결되었다. 이 기간의 게이 해방 단체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백인 영어 사용 민족과 프랑스어 사용 민족이 주도하고 있었다.

    국제인권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각 주별로 인권위원회를 설립하려는 운동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설립된 인권위원회는 LGBT 운동에 있어 고용 차별이나 주거권 등의 차별 반대 요구의 버팀목이 되었다.

    주로 직장·고용에서의 차별 문제를 제기한 온타리오의 존 다미엔(John Damien) 사례나 더그 윌슨(Doug Wilson) 사례는 비록 승소하지는 못했지만 미디어와 청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브리티쉬 콜롬비아에서는 GATE(평등을 향한 게이 동맹)가 인권 법제화를 주도하는 핵심 그룹 중 하나였으며, 주 인권위원회를 처음 설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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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TE가 1971년 8월 28일 벤쿠버 법원 앞에서 벌인 “우리는 요구한다” 시위(출처는www.straight.com/article-441761/vancouver/we-demand-history-sex-and-activism-canada-gets-examined )

    인권법에는 처음에는 성적 지향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Vancouver Sun>이라는 신문이 GATE의 게이해방 신문을 홍보하는 광고를 게재하기를 거부하자 GATE가 이를 차별로 제소하였다.

    사건이 승소하면서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이 인권위원회에서 인정되는 첫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Vancouver Sun> 신문 측에서 캐나다 대법원에 본 결정을 상고하였고, 1979년 대법원은 GATE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몬트리올 장 드라퓨 정부는 로마 가톨릭의 도덕성 회복 강령에 기반하여 1950년대부터 몬트리올에서 집권하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장 드라퓨 정부는 대대적인 “청소” 캠페인을 시작하였고 1976년 올림픽 개최를 몇 달 앞두고 경찰들이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7개의 바와 목욕탕을 네 번에 걸쳐 급습하였다. 1977년 10월에는 더 많은 급습이 있어 총 138명의 게이 남성이 구류되었다.

    퀘백의 게이 인권운동단체 ADGQ(les droits des gaies du Quebec)이 새롭게 결성되어 경찰의 만연한 ‘게이 체포와 맞서 싸우는데 인권담론을 활용하였다. ADGQ는 퀘백의 인권 헌장에 성적 지향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퀘백 주 인권위원회 역시 성적 지향을 포함할 것을 권고하였고, 새로운 퀘백당 지방정부-좌파 국가주의자 정치체로서, 드라퓨와 정치적 연결이 없는 정부가 들어서자 이것이 실현되게 되었다. 여기에는 퀘백 국가주의 운동에의 게이 레즈비언 참여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기간의 게이 해방운동은 문화적 신좌파 운동에 뿌리를 두고 분석을 발전시키는 한편, 법적 권리 캠페인을 정치적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인권 캠페인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 자체의 목표는 될 수 없었다.

    그보다 인권 캠페인은 주 차원, 연방 차원의 법에서 인권을 각인시키는 것인 동시에 게이 레즈비언 공동체를 구축하고,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커밍아웃을 독려하고 이성애 중심적 사회와 정치적 규범에 도전하고 인식을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게이 인권조직은 인권 정책과 법적 변화의 기초를 닦았다. 게이 인권조직은 자신들의 주장을 주 정부 차원이나 도시 차원의 인권 제도에 잘 활용하였다.

    1980년대-억압과 반동

    1970년대 말부터 닥쳐온 신보수주의의 흐름에서 캐나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레이건/부시 대통령에 의한 신우익 동맹은 매스미디어의 반동 담론들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의 매스미디어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캐나다 역시 우익 담론을 타고 보수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

    1977년 4명의 사내에 의해 14살 구두닦이 소년이 살인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광범위한 대중적 패닉을 불러일으켰고, 게이 아동 성추행 이미지를 부활시켰으며, 게이 잡지 <Body Politics>의 압수로 이어졌다.(당시 <Body Politics>에서는 한 기사에서 아동성애를 ‘남자가 소년을 사랑하고 소년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라 불렀다.) 1979년 <Body Politics>는 외설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보수적 지방 행정부에 의해 4년 더 상고된다.

    1981년 토론토에서 경찰이 지방선거 캠페인 동안 게이 사우나를 대규모로 급습하였으며, 당시 시설 내에 있던 286명과 20명의 관리자를 구속하였다. 몬트리올에서처럼 토론토에서도 경찰의 공격은 사생활 권리 보호 그룹이라는 새로운 게이 운동조직을 결성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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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의 사우나 급습에 항의하는 시위 보도(1981년) 출처: http://www.yorku.ca/jspot/5/stand_together

    1990년대 들어 대도시에서는 각종 단체들과 수백종의 특정 분야 중심의 그룹들이 생겨난다. 일반적인 게이 혹은 게이 레즈비언 단체들은 레크레이션, 종교, 영화, 라디오 프로그램, 정치, 직장, 학교, 트랜스, 청소년 등 세부 주제에 초점을 둔 그룹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큰 규모의 단체는 AIDS 단체였는데, 정부 기금을 통해 제도화되었기 때문이었다. AIDS 단체는 “혼종의 단체”의 성격을 띠었고 기존의 게이 커뮤니티 기반을 넘어선 것이었다. 커뮤니티의 팽창과 분산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생활 어느 영역에서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게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캐나다와 미국, 영국간의 차이

    1971년 퀘백의 인권 강령 삽입 프로그램과 유사한 일련의 법적 변화가 뒤따랐고, LGBT 운동에게 크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였다. 1986년 온타리오 정부는 인권 강령에 “성적 지향”을 추가하였고, 1987년 마니토바와 유콘이 뒤따랐다.

    1990년대 무렵 캐나다는 EU, 호주, 뉴질랜드의 대부분과 견줄 조건이 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또한 인권 요구안에 맞추도록 견인되었다. 1996년 대법원이 캐나다 헌법의 15항에 “성적 지향”이 포함된다고 판결한 후 연방 정부는 캐나다 인권법을 수정하였다. 또한 1998년 대법원은 주 정부로는 9번째로 알버타 주에 ‘성적 지향’을 인권 강령에 삽입하도록 판결하였다.

    왜 캐나다나 미국, 영국의 LGBT 시민권 수준이 다른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대부분 1970년대 중반부터 세 국가간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캐나다는 평등권을 향해 점증적 변화가 나타났지만 미국과 영국은 일련의 방해물이 존재하였다. 미국 의회는 인권법을 통과시키는데 실패하였고, 동거파트너 혜택법과 같은 법률을 폐지하거나 수정·무력화하는 일도 벌어졌다.

    50개 주 중 10개 주는 인권법을 갖고 있었지만 거의 반은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미 존재하던 도시 및 주의 인권법 역시 반복되는 항소와 주민 투표의 대상이 되었다.

    1986년 미국 대법원은 게이를 범죄화하는 주법이 유효하다고 판결하였다. 1992년 공화당은 중앙당 강령을 “가족 가치”로 짜고, 미혼모와 게이 레즈비언 인구에 반대하는 프로그램을 입안하였다.

    같은 해 콜로라도는 기존에 존재하던 시 조례를 무력화하고 레즈비언 게이에 대한 평등권 법의 통과를 막는 주민투표가 53% 찬성으로 성사되었다. 1996년 미국 대법원은 콜로라도의 인권법 금지를 뒤집었지만, 게이 레즈비언 주민들의 법적 지위는 과거 상태로 남겨졌다.

    영국에서는 대처리즘이 ‘위험한 퀴어’와 흑인 이민자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심을 곧잘 회심의 카드로 활용하였다. 지방정부 노동당 동맹에 대한 게이 레즈비언 공동체 조직과 커뮤니티 활동가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평등권 투쟁은 기존 정치세력들의 견제와 비타협성과 싸워야 했다.

    영국의 법제도는 1988년 28조항 통과에서 정점을 달했는데, 게이 레즈비언 시민이 낸 세금을 그들의 커뮤니티 지원에 사용하는 것을 부정하고, 교육기관에서 동성애를 말하는 것을 처벌하였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최소한 5가지 요소가 눈에 띈다.

    * 상대적으로 미국(22%)보다 적은 수의 캐나다인(6%)가 스스로를 복음주의 개신교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미국의 정치 동맹에서 가장 견고한 레즈비언 게이 반대 그룹이다. 르네상스 인터내셔널이나 리얼 우먼과 같은 반페미니스트 반게이 조직는 캐나다에서 오직 제한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캐나다는 조합 가입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29.7%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미국의 15.5%보다 높다. 노동조합은 고용 계약이나 인권 정책 추진에 있어 중요한 성적 지향 보호의 힘을 제공한다.

    * 캐나다는 신민주당을 태두로 한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길게 존재하며 지방정부 수준에서 종종 집권해 왔다.

    * 캐나다는 동성애혐오성 공포와 국가 정체성을 묶을 수 있는 제국주의 및 군사주의 전통이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없다.

    * 캐나다 국가 구조는 미국의 국가 구조와 다르다.

    캐나다와 영국 간의 차이는 좀더 적은데, 영국에서도 복음주의 개신교의 숫자는 적은 숫자이며 노동조합 가입률도 35%를 상회하기 때문이다. 영국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해 왔다.

    캐나다와 미국 간 국가 구조 차이는 보다 근본적이다. 캐나다는 다른 앵글로-아메리칸 사회들처럼 검열, 금욕법, 영화 등급 위원회 등의 모태가 된 “사회 정화” 개혁 운동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전통적 백인 앵글로섹슨 기독교 문화가 성공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영국 세력과 프랑스 세력이 태생적으로 캐나다 내에서 교착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 지방 개신교 문화를 가톨릭, 흑인, 이민자들에게 삽입시키기 위해 사회 정화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이는 일시적, 지역적 수준에 머물렀다. 절제운동과 유사한 반응을 퀘백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퀘백과 앵글로-캐나다 문화 사이의 불일치는 일시적 협상에 기초한 약한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냈으며, 단일한 국가 정체성으로의 완전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캐나다는 네덜란드와 유사한 점이 많다.

    네덜란드 역시 개신교, 가톨릭, 인본주의 등의 “기둥화(pillarization)” 현상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적 관용의 국가 에토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공식적으로 “다문화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이는 국가 합치보다는 차이를 존중할 것을 주장한다.

    국가간 차이는 국가 “성격”의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내부 사회적 요소들이 역사적으로 경로를 밟은 결과이다. 차이를 정형화하려는 것은 결코 안정화될 수 없고 캐나다 역시 반동력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반-게이 주민투표는 영세상공인, 저학력 저소득층, 농촌 출신 등 몰락하는 사회 계층을 중심으로 촉발되었으며 유사한 투표층이 캐나다에서도 신우익대중주의자 집단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우익 대중주의자들은 전통적 우익집단의 계승자인 개혁당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으며 미국의 공화당 부활 기반과 유사한 기반을 갖고 있다.

    1995년 퀘백 분리 투표처럼 불안정한 캐나다 국가 조건을 생각할 때 퀘백과 비-퀘백 캐나다 사회에 이러한 힘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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