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오는 소식
[파독광부 50년사] 고향편지와 아버지의 회초리<검정밥-13>
    2013년 06월 24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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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아내가 점심을 장만하는 동안 나는 아기를 태운 유아차를 밀고 산책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독일 남자들은 유아차를 밀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기를 태운 유아차를 밀며 산책을 가면 마을 사람들이 구경거리가 지나가는 듯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들의 호기심과는 상관없이 아기를 태운 유아차를 미는 나는 언제나 고향 생각에 젖어 있었고 고향 생각을 할 때마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는 눈물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서 타향에서 산다는 일은 정신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아내와 딸이 한없는 위로와 즐거움의 원천이 되고 향수를 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구석구석마다 거리거리마다 보이는 고향 모습은 내 마음을 방망이 치듯 갑작스러운 슬픔과 향수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걷다가도 하늘에 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고향하늘이 생각나고, 고향 하늘이 생각나면 그 하늘 아래서 놀던 일들이 떠올랐다. 길을 가다가 길모퉁이에서 꼬마들이 놀고 있으면 내 마음은 단숨에 고향 땅으로 날아가 뒷집 마당에서 깡통 차기와 숨바꼭질하던 어린 시절을 눈앞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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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억들은 또 언제나 눈물을 수반하고 있었다. 들에 보리밭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익어 가는 보리를 물결처럼 출렁거리게 하면 나는 고향의 보리밭 가에 서게 되고,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만들면 그 추운 겨울에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가방을 들고 학교로 뛰어가던 선두메 언덕을 생각했다. 그렇게 향수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 하루는 고향 친구 영곤 군에게서 편지가 왔다.

“…우리가 어릴 때 내기를 했지. 정의와 곤이 후에 어른이 되면 누가 더 잘사느냐고…”

나는 친구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또 물속으로 머리를 눌러 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친구의 편지를 읽은 후에 얼마동안은 외로움에 시달렸다.

향수에 시달린다는 말은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사람의 그 당시의 행복한 살림과 관계가 없다. 어떤 때는 아주 행복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로 지금 내가 당하는 즐거움이 지난날의 어느 때와 연관이 될 때, 내 마음은 즉시로 그날 그때로 돌아가서 고향 속에서 뒹굴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그 고향이 즐거움의 고향이든 슬픔의 고향이든 상관없이 그곳을 떠나 현실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눈언저리를 축축하게 적셨고 코언저리를 시큼하게 했다.

그렇게도 그리던 친구의 편지, 반가워서 겉봉을 뜯는 내 손길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쁨이 가득 찬 친구의 편지라도, 그 기쁨이 나를 고향으로 데려갈 때는 나를 눈물과 함께 향수에 시달리게 했다.

이번에도 친구가 이러한 글을 쓴 것은 친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도 그의 글 속에서 우리가 뒹굴며 놀던 그 날을 나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때 그 즐거웠던 날에 희망과 포부가 가득한 가슴을 안고, 나는 무엇이 되고 너는 무엇이 되면, 누가 더 잘살게 될지 두고 보자고 겨루는 모양은 푸른 잔디가 깔린 둑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는 두 마리의 송아지와 같았다. 친구는 친구대로 그 날을 구상하면서 나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답을 울면서 썼다.

“친구야! 내가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사는 그 자체가 패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못살아도 내 고향에서 내 친구들과 함께 내 말로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네는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네…”

나는 그 후로는 아내에게 어머님의 이름과 주소를 한글과 한문으로 배워주고는 그 이름 외에 오는 편지는 모조리 불에 태워버리고 나에게 보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내가 휴가 때처럼 우연히 집에 있을 때 편지를 직접 받는 경우 외에는 누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나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편지를 불에 태워 버렸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어머님 외에 나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름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연관성을 주지 못했다.

다만 그 편지의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편지를 태우는 자기의 손길이 너무 무정하게 생각된다고 말했다. 나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낸 후에 나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음으로 나를 괘씸하게 여길 것을 각오했다.

어머님의 이름과 주소를 읽을 수 있도록 아내에게 한글을 가르치니 아내는 한글을 배우기가 아주 쉽다고 했다. 여류작가 펄 벅(Pearl S. Buck)이 세계에서 제일 배우기 쉬운 글은 아라비아어고 그 다음에는 한글이라고 한 말이 기억났다.

비록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고 하더라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지만, 한글을 배우려고 애쓰는 아내가 감사했다.

우리 속언에 ‘자식 자랑하는 놈은 반병신이고, 마누라 자랑하는 놈은 온병신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집안 살림과 사회생활에 아내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아이를 대하는 것에나 살림을 꾸미는 것이나 착실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렇게 사는 것에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다.

아내의 이러한 삶의 태도가 나에게도 불씨가 되어 즐거움과 행복감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근면한 생활과 절약하는 살림살이로 거실의 가구도 새로 장만할 수가 있었다. 아내는 아주 근면했고 거짓과 위법(違法)을 몰랐다. 모든 것이 규례에 의한 정상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나는 독일인들의 인간성에 대해서 소련 혁명가 레닌의 말을 상기했다.

“만약 독일 혁명가들이 정거장을 점령하려고 계획한다면 그 계획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먼저 차표를 사고 정거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와 같은 철저한 준법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규정된 생활방식과 정돈된 살림이 아내의 살림살이의 신조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아내의 생활철학은 “독일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살고, 프랑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한다.” 혹은 “지붕 위에 있는 비둘기보다 내 손에 든 참새가 더 귀하다.” 같은 속언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독일인과는 달랐다.

아내는 어떠한 형식이라도 개성을 속박하며 존재하는 테두리를 싫어했다. 아내의 성격은 헤르만 헤쎄의 데미안에 있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았다.

아직도 남녀관계에 대해서 보수적이었던 독일의 사회에서 양가의 딸이 외국노동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그 자체가 어떠한 의미든간에 던져지는 많은 주위의 눈초리를 이겨내야 했고, 편견적인 충고와 간섭을 자기 마음의 쓰라림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역량과 자부심이 있어야 했다.

아내는 이러한 주위의 안견과 선입감에 대해서 머리를 쓰지 않았다. 아내는 자기의 삶은 자기가 영위한다는 특권과 책임을 터득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사랑의 매

나는 자라는 딸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키울까 하고 생각을 했다. 성서에는 ‘초달을 아끼는 자는 자식을 미워한다’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에게 절대로 손질이나 매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릴 때 많이 맞고 자란 자식이다. 내가 여섯 살 때 동네 아이들과 함께 뒷집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님이 시내에 가셨다가 돌아 오셨다. 나를 보시고는 “정의야 이리와” 하시면서 집으로 걸음을 계속하셨다. 엄하게 보이셨다. 나는 두려워 가슴을 조이면서 아버님의 뒤를 따랐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밖에서 놀기 때문에 또 야단을 치실 모양이다 생각하니 겁이 났다.

또 매를 맞아야 하는구나!

놀이터에서 집까지 불과 삼십 미터도 되지 않았는데 몇 십리 같았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가던 나의 머리는 점점 더 수그러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틀림없이 회초리 가지고 오라는 명령이 내릴 것이고 나는 목침 위에 올라서서 종아리에 내리는 매를 아픔과 함께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대문 안으로 들어가신 아버님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셨다. 손에 무엇이 든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버님은 그것을 나에게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셨다.

사탕이었다.

나는 기쁨보다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에게 사탕을 주셨다면 하나밖에 못 먹었을 것이었음으로 나에게만 주시려고 일부러 엄한 체하시면서 나 혼자 따라오게 하셨고 집에 와서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 나에게 사탕을 주신 것이었다.

입에 넣은 사탕이 가시가 박힌 밤송이 같았다.

자라면서 나는 이러한 아버님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천금이 생긴다고 해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며 매를 맞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삼키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으로 운명을 감수해야 했던 그 아이가 나는 어른이 된 오늘에도 가여웠다.

회초리2-1

사랑은 보임으로서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은 등불을 무엇으로 덮어씌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을 짚어보지 못한다. 아이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아버님은 엄하다기보다 나에게는 무서운 분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생들끼리 쓰는 은어(隱語)가 있었다. 나는 아버님께 무슨 말을 했는데 아버님이 알아듣지 못하시고 무슨 말을 했느냐고 반문하셨다. 나는 생각 없이 입버릇대로 “귓구멍에 x대가리가 박혔능기요, oo이 들었능기요?” 했다.

그 말은 나에게 대한 사형선고와 같았다. 이제는 집행의 차례였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아버님은 나더러 회초리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우리 집 마당가에는 수양버들과 포플라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나는 회초리가 될 나뭇가지를 찾았다. 너무 가느다란 것은 부러지면 또 가지고 오라고 하실 테니, 크고 굵은 것을 가지고 가면 애처로워서도 한두 번 치시고 그만두시겠지 생각하고, 어린 아이 팔뚝 굵기 정도 되는 것을 골라서 가지를 잘라내고 매끈하게 다듬어서 아버님께 드리면서 아버님이 내미는 목침 위에 올라서서 아랫도리를 걷어 올렸다.

연약한 내 아랫도리 위에 방망이가 벼락치듯 내렸다. 매가 아래로 내리칠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아픔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 대를 맞았는지 한참 후에 매가 그쳤다. 나는 몸을 가다듬고 아버님께 큰절을 하고는 방에서 기어서 나왔다.

내가 입 밖으로 낸 말은 견책을 받아야 마땅했다. 생각 없이 동무들에게 하던, 욕이 섞인 말을 아버님께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때릴 수 있을까?

사랑의 매가 가진 아픔의 도(度)는 누가 측정하는가? 아픔의 도가 때리는 사람의 아량에 따른다면 때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자의요 독선이다. 아무리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자식이나 아내를 때린다는 것은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는 증거다. 사랑은 자비요 인내요 관용이다. 사랑으로 내리는 징계와 교육에는 회초리가 필요 없다.

물론 아버님은 내가 특별히 외동아들이기 때문에 이웃사람들로부터 “외아들 버릇없이 키운다”는 말을 듣지 않으시려고 나를 더 엄하게 다루셨다.

그러나 어떠한 연유에서 간에 손질이 잦아지면 습관화되고 매를 맞는 나도 어지간한 것은 의례 지나가는 차례인양 느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버님의 매”가 나에게 남긴 교육은 “나는 내 자식을 절대로 때리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건강하게 자라는 딸을 보면서 나는 아라비아 시인 지브란 칼릴(Gibran Khalil)의 글을 생각했다.

당신들의 자식들은 당신들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동경(憧憬)의 아들딸들입니다.
그들은 당신들을 통해서 오지만 당신들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당신들과 함께 있지만,
그들은 당신들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그들에게 당신들의 사랑을 줄 수는 있어도,
당신들의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당신들은 그들처럼 되려고 노력할 수 있어도,
그들을 당신들처럼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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