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는 '현대의 군주'인가?
    최장집 선생의 정치적 선택에 대하여 - 2
        2013년 06월 24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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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안철수 의원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야권에서 중요한 정치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와 같은 원로급 지식인이 그의 후원자이자 이데올로그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자유주의 담론과 안철수 신당의 흐름은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 ‘진보적 자유주의’의 원조와 지적 소유권자가 손학규 전 의원이니, 유시민 전 장관이니, 하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담론을 제기했었다. 박세일 교수와 박근혜 대통령도 과거 ‘공동체 자유주의’를 자신들의 지향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진보적 자유주의’가 이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아직은 모호할 뿐이다.

    또 진보진영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자유주의 담론과 구분 정립하려는 사회민주주의 담론이 부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와 최장집 교수의 담론과 그 실천적 ‘실체’에 대해 남종석씨가 비판 글을 보내왔다. 2회에 나누어 싣는다. 반론이 있으면 적극 반영하겠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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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회분 글 안철수 신당,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관련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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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신당은 정당정치를 복원하나? 복원할 수 있나?

    최장집 선생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성숙의 지표로서 ‘정당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다. 그동안 진보좌파, 사회운동 진영은 운동정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최장집 선생은 이와 같은 운동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신념윤리일 뿐이지 책임윤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는 서구처럼 ‘제도화된 계급투쟁’으로서의 ‘정당 간 합리적 경쟁’이야말로 노동 있는 민주주의 실질적인 실현 수단이라는 것이다. 최장집 선생의 표현을 직접 들어보자.

    “정당간 경쟁이 확대된다는 사실은, 정당이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사회적 기반을 갖는 것을 의미하고 지금까지 정치에 대표되지 못했던 사회집단들, 특히 노동자계급과 같은 소외계층이 정치의 중요한 행위자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민주주의], 195쪽)

    나는 정당의 역할에 대한 최장집 선생의 입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모델로 삼고 있는 정당간의 이념적, 합리적 경쟁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인민주의적 정서보다 훨씬 이성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정인경에 따르면, 인민주의란 자유주의의 무능력, 대안적 이념의 부재 혹은 무능력이라는 조건에서 출현한다. 민주당의 무능력, 좌파의 무능력과 대안적 이념 부재가 한국에서의 인민주의 정서의 강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인경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보자.

    “인민주의 정치는 현대적 정치이념과 구별되는 독특한 것으로서 우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악마화하고 찬성 또는 반대의 이원적 대립구도를 극대화 하는 ‘반정치의 정치’로 규정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시민 개념을 결여한 전체로서의 인민이라는 관념은 역설적으로 지도자 개인의 자의적 지배 또는 제도로서의 정치를 대체하는 인격화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 (정인경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 26쪽)

    최장집 선생의 민주당 비판은 근본적으로 정인경 등의 인민주의 비판과 유사하다. 민주당은 정당을 통해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을 해체하면서 대중들의 인민주의적 요구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여론조사 정치와 모바일 경선을 도입”하고 “지난 대선을 선과 악의 대립에 기초한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설정한 것” 자체가 바로 인민주의적 정서에 순응하는 것이자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정치를 여론조사로 대체하고, 이미지의 조작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은 현대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를 ‘정치의 심미화’라고 했다.(데이비드 하비,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249쪽).

    문제는 안철수 신당이다. 안철수야 말로 이런 여론조사, 이미지화된 정치를 통해 단번에 한국 정치의 중심에 올라 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기성정치권, 대기업 등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안철수에 대한 과잉 기대를 통해 상징적으로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 신당은 정당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격화된 정치’의 전형이다.

    최장집 선생은 안철수가 인민주의적인 여론 정치를 통해 등장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는 성남 인력시장 탐방 기사에서 안철수, 박원순 현상이야말로 ‘여론이 지배하는 정치’의 전형임을 주장했었다.([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더군다나 최장집은 안철수의 ‘반정치주의’를 강하게 질타했다.

    “정당공천 개방, 국민경선제 법제화, 국회의원 정수 축소 등 안의 주장은 전부 정당의 기능을 약화시키거나 범위를 좁히는 개혁이다. 내 기준에서 그것은 반개혁적이다.”([2013년을 말한다])

    최장집 선생 스스로도 안철수가 반정치의 문화를 확산시키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대중들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은 이성적인 대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안철수가 인기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대중들이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로지 그에 대한 이미지만이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서 대중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반정치의 과잉’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최장집 선생이 그렇게 강조했듯이, 한국 사회는 노동자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장집 선생은 그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그는 안철수 신당이야말로 한국 정당민주주의를 제대로 복원할 주체라고 삼았다. 이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론몰이 정치, 인기투표, 반정치주의를 그렇게 비판했던 원로학자가 바로 그 여론 주도 정치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안철수와 손을 잡은 것이다. 헤겔식으로 이야기해서, 안철수는 정당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선택된 ‘역사의 간지’라도 되는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고 광경이다.

    최장집 선생의 선택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펼처 온 정치학적 수사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의 선택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장집 선생이 안철수씨를 선택을 한 유일한 이유는 ‘군주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 자신을 불러 준 것에 대한 동조’일 뿐이다.

    최장집 선생은 권력을 통해 자신의 비젼을 실현하고 싶었고, 안철수씨는 그런 최장집 선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몇 달 전만 해도 반정치의 문화를 그렇게 비판하던 학자가 바로 그 반정치 문화의 선두에 선 인물과 함께 할 수 있는가?

    안철수는 ‘현대의 군주’인가?

    최장집 선생은 베버에 관한 에세이를 쓴 이후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베버에 대한 연구에서도 그렇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렇고, 최장집 선생이 주요한 목적은 민주진보파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가 민주진보진영의 책임의식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소명으로 하는 정치는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사회세력, 계급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그의 관심도 이와 연결된다. 최장집 선생이 해석하는 마키아벨리즘은 철저한 기능주의이다.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정치에서 도덕적, 윤리적 관심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을 사고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적 기능주의의 핵심이다. 그것은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되어야 할 정치”인 것이다.

    최장집 선생이 마키아벨리즘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좋은 기회를 포착하여 자신이 목적을 능동적으로 실현하는 정치인, 정당, 군주의 역량이다.

    정치란 가치, 윤리의 실현과 같은 고전주의적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실현될 수 있도록 가장 현실적인 수단을 가차 없이 동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협잡, 폭력, 권모술수가 포함될 수 있다.

    최장집 선생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권력 장악을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가 아니라 인민들의 실질적인 이해를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단이다.

    이런 수단을 매기로 좋은 결과는 낳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민주진보세력들은 권력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보는 나머지 권력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인민들의 이익을 실현할 수도, 실현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기능주의], 경향신문, 2013.02.16)

    마키아벨리즘을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최장집 선생의 주장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알튀세르는 언젠가 마키아벨리를 ‘정세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라고 했다.((루이 알튀세르, [마키아벨리의 가면], 이후, 43쪽)

    마키아벨리는 정치가는 도덕적,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정치적 문제를 정식화 하고(역사적 과제를 정치적 형태로 제기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치적 형태”를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 식으로 사고해 보자면, 최장집 선생의 정치의 목표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고, 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정당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안철수 신당’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던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고, 이제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것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손짓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역사의 ‘좋은 기회(호기)’이다.

    이를 실현하는 힘은 안철수 신당이다. 비르투는 역능이라고 번역된다. 여기서는 군주의 능력이라고 하자.

    최장집 선생은 안철수 신당을 통해 무능한 민주당을 대체할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이 당을 통해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역사의 호기에 조응하는 정치적 역능을 실현하는 것이다. 권력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권력을 적극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진정한 인민의 이해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최장집 선생의 선택은 ‘환상 속의 그대’를 찾고 있을 뿐이다. 안철수씨가 ‘현대의 군주’가 될 것이라는 최장집 선생의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군주이든, 그람시가 은유적으로 썼던 ‘현대의 군주’이든 그 첫째 덕목은 정세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능력이다. 부르주아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부르주아의 입장에서도 한국 경제가 처한 냉정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국을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이를 능동적으로 실천할 군주는 필요한 것이다.

    그람시

    헤게모니와 현대의 ‘군주론’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

    그러나 지난 정치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안철수의 비전은 현실성과 구체성을 지니기는커녕 기초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경제관은 반대기업 정서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의 정치관은 반정치주의 문화에 물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는 인민에 앞서 정세를 분석하고, 인민들의 실질적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를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여론이 선도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좋아할 것 같은 정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떠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정세에 대한 냉정한 인식도 없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가차없는 추진력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쌍용차해고자들이 있는 대한문 방문했을 때 보여준 모습은 말 그대로 ‘불쌍한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이었지, 그 사태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냉정한 ‘의식’이 아니었다.

    더욱이 안철수씨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힐 준비가 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체사레 보르자도 못되고, 현대의 군주는 더더욱 못된다. 그는 그저 착한 이미지, 창조적인 경제의 아이콘, 반정치주의 문화의 선봉장일 뿐이다.

    그가 제시한 정치 개혁은 ‘역사적 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의 퇴행과 반개혁주의’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정치인 가운데 마키아벨리즘의 어떤 특징과도 관련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바로 안철수인 것이다.

    한 가지만 덧붙여 보자. 최장집 선생은 진보좌파진영은 저항정치에만 물들어 책임 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운동진영에게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를 요청한다. 권력을 잡고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장집 선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와 같은 ‘운동권’은 권력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즘이 주는 교훈은 더더욱 부정하지 않는다. 진보좌파는 의회와 같은 국가장치, 몇몇 권력기관으로의 진입이 민중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과정에 참여한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권력의 일부에 참여하여 ‘자본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다양한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고, 몇몇 국가 장치에 좌파가 참여한다고 해서 이들 국가장치의 성격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인권위에 참여하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압박하는 경제장치들의 활동에 침묵하는 그따위 기회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실제 이루어진 일이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정리해고 손들어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그 거대함과 작동원리에 대한 냉정한 인식 때문에 민주당이나 안철수 신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초한 판단이다. 좌파는 지나치게 이념에 물들어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토대로 민주당이나 안철수 신당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 좌파가 그람시가 말했던 ‘현대의 군주’에 한참 미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람시는 공산당을 염두해 두고 ‘군주’라는 은유를 사용했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현대의 군주’란 진보좌파진영 일반의 정치적 지도력을 의미한다. 지난 몇 년간 진보진영의 자중지란과 헛발질은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정치적 무능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좌파들이 무능할지라도 부르주아 국가장치들의 작동원리를 알지 못하는 만큼 멍청한 집단은 아니다. 진보좌파들은 책임의식의 부재와 신념윤리에 물들어 저항의 정치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저항의 정치를 지속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적인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동요하는 진보주의.

    민주당이 새로운 의제를 만들지 못하는 정당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분간 진보좌파의 정치적 운명도 시계 제로 상태인 것도, 안철수 신당이 민주당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현 국면에서 안철수 신당으로 결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실용적인 선택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안철수 신당이 민주당을 대체함으로써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토대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안철수 신당에 결합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는 소위 야권이나 진보진영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 민주당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역기반을 허물고 한나라당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안철수 신당의 성공이 가장 현실적은 수단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권력 장악과 민주당의 기반을 허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생각하는 집단이라면 안철수 신당에 결합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근 안철수 신당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기대는 이런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진보주의 정치를 주도해 온 많은 명망가들, 이해관계자들은 대부분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해 지금까지 헌신해 왔다.

    그들은 보수야당으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잃지 않았고,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제도정치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점에서 헌신성도 남달랐다. 이들의 진출을 단지 출세주의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보수야당에 대항하는 제3의 정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 안다. 노동자운동은 침체를 거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단결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역시 황망한 수준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진보좌파운동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통진당 주류와 경기동부도 문제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좌파도 공히 책임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정치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려는 것은 당분간 고난의 행군을 의미할 뿐이다. 진보정치에 수년간 몸 담아온 이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고난의 행군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기는 하다. 많은 진보적 활동가들이 몸과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진보정치의 성장에 헌신해 왔지만 그 대가가 매우 초라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헌신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신당으로의 결합이 매력적인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선택한 진보주의자들은 먹고 살기도 해야겠거니와 그들의 꿈을 펼칠 기회도 필요한 것이다. 그들도 할 만큼 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안철수 신당으로의 결합이 노동자계급에게 이익이 된다거나 진보운동의 성장, 민주주의 성장이라는 식으로 포장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자기만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진보좌파에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노동자운동이 단결하고 제도정치권 내에서 독자정당이 일정한 재생산 구조를 갖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것은 당분간 과제일 뿐이지 현실은 아니다. 이 과제를 현실화시킬 기획을 만드는 것이 진보좌파의 과제이다.

    진보좌파가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라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편을 확대하고 내부의 균열을 치유하고, 동요하는 진보주의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념적 차이로 이유로 갈라치기 하는 것보다 다양한 좌파들을 공동의 전선에 세워낼 수 있을 때, 진보좌파는 독자적인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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