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신당,
'노동 있는 민주주의' 실현 주체?
최장집 선생의 정치적 선택에 대하여 - 1
    2013년 06월 21일 04: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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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안철수 의원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야권에서 중요한 정치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와 같은 원로급 지식인이 그의 후원자이자 이데올로그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자유주의 담론과 안철수 신당의 흐름은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 ‘진보적 자유주의’의 원조와 지적 소유권자가 손학규 전 의원이니, 유시민 전 장관이니, 하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담론을 제기했었다. 박세일 교수와 박근혜 대통령도 과거 ‘공동체 자유주의’를 자신들의 지향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진보적 자유주의’가 이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아직은 모호할 뿐이다.

또 진보진영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자유주의 담론과 구분 정립하려는 사회민주주의 담론이 부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와 최장집 교수의 담론과 그 실천적 ‘실체’에 대해 남종석씨가 비판 글을 보내왔다. 2회에 나누어 싣는다. 반론이 있으면 적극 반영하겠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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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의 거장, 최장집 교수

최장집 선생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5: 이하 [민주주의])는 정치학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다. 출판사의 표현대로 이 책은 제목 자체가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로 ‘보통명사’화 되었을 정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주목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장집 선생은 이 책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과제로 ‘정당정치의 발전’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최근 그가 펴낸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후마니타스, 2013 : 이하 [상처들])은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나눈 대화를 토대로 쓴 짧은 책이다.

장위동 봉제공장, 성남 인력시장, 울산 현대차와 노동단체, 전주의 복지관련 단체 등에서 얻은 생생한 현실을 통해 이 노학자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정책이 뒷받침 되지 않는 민주주의가 기층 민중들을 어떻게 극한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자세히 관찰한다. 이 책은 현장 보고를 통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논한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최장집 선생은 베버에 대한 연구와 마키아벨리에 대한 에세이에서 ‘정치적 현실주의’와 ‘책임정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 진보세력이 이념 과잉과 신념에만 치우쳐 있는 반면 그들이 대표하는 민중들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지 못했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책임정치의 부재야 말로 민주진보진영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최장집 선생은 이와 같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보세력은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쓰고 있다. 권력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권력을 통해 자신의 역능을 실현함으로써 민주진보 진영이 인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진보진영은 인민을 위한다는 허구적인 구호가 아니라 권력을 통해 자기 능력을 실현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장집

최장집 교수

그러던 그가 차기 대선주자로 가장 주목 받는 안철수씨의 정책네트워크(연구소) ‘내일’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 민주주의의 성숙, 책임 정치의 구현,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제3당 실험의 성공을 꼽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은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대부분 소진했으며, 진보운동진영은 신념윤리와 분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자멸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안철수 신당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최장집 선생이 평소 주장했던 내용과 안철수 씽크탱크의 이사장이 된 그의 선택 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밝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가 함께 쓴 ‘진보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레디앙>에 투고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외재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최장집 선생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최장집 선생이 평소 주장했던 그의 정치관과 안철수를 ‘현대의 군주’로 선택한 그의 판단이 과연 일관된 노선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민주개혁 세력의 계급적 토대는 무엇이었나?

최장집 선생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이제는 한국 진보주의자들 내부에서 상식이 된 몇 가지 정식들을 제안한다. 그 가운데 가장 강조점을 두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표성’과 ‘책임성’의 강조이다.([민주주의], 129쪽)

정당은 특정한 사회적 계급을 대변하고,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의 요구를 정치과정에서 실천함으로써 책임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의체제에서 대표성은 위임을 통한 엘리트의 자율성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의 요구를 실현할 때 구현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화의 한계는 단적으로 대표성과 책임성을 실현할 수 있는 현대화된 정당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세력인 민주당은 계급적 대표성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취약한 지역 기반에 의존하는 정당이다 보니 개혁의 이념과 비전, 실천적 전망이 부재했다는 것이다.([민주주의], 131)

사회적 기반이 없는 야당은, 집권을 위해 대중들의 보수적 정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집권 후 이들이 보여준 무능력은 관료의 지배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최장집 선생에 따르면, 관료적 행정체제는 시민사회의 계급적 토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술 관료들의 정책방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성도 대표성도 없는 체제이다.

민주당 정권 10년간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약진은 바로 이와 같은 재벌이 요구하고 기술관료들이 주도한 시장주의적 개혁의 결과인 것이다. 이로부터 [민주주의]가 보편화시킨 한국 정치에 대한 또 다른 정식이 나온다. 무능한 개혁 진보세력과 유능한 기술 관료라는 대당.

권력을 잡은 진보세력의 무능함 속에서 재벌과 보수적 시민사회가 뒷받침하고 관료적 행정체계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한국 사회를 노동 없는 민주주의 사회로 만들었고, 이로부터 대중들의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한 금융마피아(모피아)들 또한 이런 관료적 지배체제로부터 유입된 것이지 야당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민주당 정권과 진보세력의 무능에 대한 최장집 선생의 비판은 사실상 민주당 정권과 진보주의에 대한 세련된 변호에 다름 아니다.

최장집 선생의 비판의 핵심은 민주당과 자유주의세력이 비록 무능은 했을지라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재벌, 보수언론 등 기득권자들이 요구하고 기술관료가 이를 담당한 것이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핵심세력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또 다른 관점은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시장지향적인 기술 관료들을 분리 사고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일반적 관점이다. 개혁진영은 비록 무능했을지라도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아니며, 금융 모피아들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시장지향적인 경제적 관료들에 휘둘리면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민중들의 고통이 심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지난 대선시기 민주당과 단일화해야 한다거나 민주당과 연정을 주장한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의 요구, ‘2013년 체제’라는 신조어를 통해 야당으로 힘의 결집을 요구했던 개혁진영의 원로들, 모피아와 기술 관료들을 넘어서기 위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던 많은 진보주의 학자들의 관점은, 사실 최장집 선생의 분석에 음으로 양으로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다양한 급진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런 분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주도한 정권이라고 비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노동시장의 유연화(정리해고제, 파견근로자법, 변형시간근로제, 비정규직 법안 등)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시장 통합, 한미 자유무역 협정, 동북아금융허브 건설 등 금융세계화의 능동적인 주체였다.

이는 민주당의 취약한 이념이나 정책 의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민주당 스스로가 신념을 갖고 주도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실현하고자 했던 코포라티즘은 노동자운동 지도부를 선택적으로 포섭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동참시키는 것이었지 노동에게 실질적인 시민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헌재 등의 금융모피아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시장주의 관료들을 전진 배치시킨 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이념과 비전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개혁이야말로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 수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최장집 선생은 [민주주의]에서 재벌개혁을 제대로 못했다고 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주장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재벌개혁은 하지 않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준하는 공정한 경쟁 질서를 창출했다. 재벌을 개혁한 것은 시장이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경쟁력이 상실된 재벌들은 해체되었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재벌들만 생존하게 된 것이다.

IMF 이전 한국에서는 30대 재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10대 재벌로 불린다. 그중에 삼성 현대 2강만이 독보적이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공정한 경쟁’이야말로 친재벌 논리의 핵심이다. 공정한 경쟁은 승자독식을 낳으며, 능력 있는 기업이 모든 것을 가지게 한다. 그 결과 삼성 현대가 독보적인 재벌이 된 것이다. 이 두 기업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내 기업이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재벌을 ‘자유경쟁’에 맡김으로써 재벌의 성장을 유도한 것이다. 공정한 경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그 재벌개혁론자들이야말로 재벌의 승자독식을 옹호한 영미식 자본주의의 숭배자였던 것이다.(장하준 등,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부키, 187쪽)

더 나아가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실질적인 주인이 외국계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장하성, 김상조 등이 요구했듯이, 소액주주의 권리가 강화되고 국내 자본의 영향이 약화됨으로써 한국의 주가총액 중 약 40%가 외국계가 장악한다.

7대 은행 중 6대 은행은 외국계가 장악하고 있고 한국 경제의 주력인 자동차 산업에서 주력 기업 4사 가운데 3사가 외국계 소유이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능동적으로 실현한’ 국부의 체계적 유출이다.

최장집 선생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의 야당은 계급적 토대가 부재한 것이 아니다. 한국 야당은 계급적 토대에 충실한 집단이다.

언젠가 프랑수아 세네는 오늘날의 세계화를 ‘산업을 지배적 분파로 갖는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라고 했다.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 세력은 이와 같은 금융적 축적국면의 능동적 개혁자로서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한 일련의 제도 개혁은 이를 실증하고 있다. 그 사회적 결과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회적 양극화와 노동의 체계적 배제이다.

그렇다면 보수주의 정권과 야당의 차이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새누리당의 차이는? 그것은 플란차스의 용어를 빌러 말하자면, 파워블럭 내에서 갈등하는 헤게모니 분파의 차이일 뿐이다.(봅 제솝, [플란차스를 읽자], 백의, 197쪽)

둘 모두 기본적 토대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를 돕지만 정치적 주도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부르주아의 정치 분파들 간의 차이 말이다.

한국의 주류 정당들은 동일한 계급적 토대를 갖고 있으되, 정치적 주도권을 두고 싸우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의 유지를 위해 경쟁하는 집단이지 시민사회 내의 상이한 계급적 분파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안철수 신당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

최장집 선생이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킨 것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정당 간의 경쟁이든, 복지체제의 형성을 통해 인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이든, 그는 지속적으로 한국 정당 질서 내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 실패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운동권이 노동대중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노동의 요구를 제도정치권 내에 실현할 수 있을 때 한국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노동이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으로 들어와 집단적 주체로서 역할을 못한다면, 정치 전반에 걸쳐 심대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가 권위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구태를 탈각하지 못하고 시민들로부터 냉소와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최장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경향신문, 2011.09.28.)

그는 과거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이 제도정치권 내에서 안착하길 기대했었다. 노동자운동을 대변하는 정당이 노동의 대표성을 실질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시민사회 내의 계급적 갈등이 정당 간 정책 경쟁으로 ‘질서 있게’ 제도화되길 바란 것이다.

나는 비록 그의 ‘사민주의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한국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제도화되길 바랐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최근 민주노동당의 분열, 진보신당의 분열,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노동자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한 시대는 종결된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언젠가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자 정치는 실패했으며 이제 노동자 정치에 토대를 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끝났다고 답변했다.(레디앙 신년 인터뷰, 2012.1.12) 사회운동은 더 이상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보았을 때 민주당 역시 새로운 대안은 될 수 없다고 했다.(최장집, [신년대담 : 2013년을 말한다 (2)], 경향신문. 2013.01.01.)

그가 선택한 대안은 안철수 신당이다. 안철수 신당을 통해 그는 자신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한국 정당 민주주의의 성숙,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고자 하는 듯하다. 민주당을 대체할 새로운 정당을 통해 노동자들의 이익을 최대화 실현함으로써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장집 선생에게 있어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그런 민주주의는 아니다.

노동자 운동은 지나친 투쟁 중심주의, 이념 중심주의로 인해 그와 같은 정치적 실천을 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의 주체들 역시 분파주의, 친북주의, 운동 지향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

최장집 선생의 관점에서는,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며, 노동운동조차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안철수

무소속 안철수 의원

최장집 선생의 대안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고, 안철수 신당은 그런 주체인 듯하다. 안철수씨가 귀국하면서 읽은 책이 [상처들]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안철수씨는 노동자운동의 급진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의 대선 출마 선언문에 노동이라는 단어는 단 한자도 들어가지 않았다. 더불어 보궐선거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진보진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보진영은 정치적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란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 주어야 할 수동적 대상일 뿐이다.

최장집 선생과 안철수씨에게 있어 노동자들은 스스로 주체화 될 수는 없는 존재지만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불쌍한 존재이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동정심이나 유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능력 있는 엘리트들이 권력을 잡고 제대로 된 복지 체제를 형성하여 구원해줘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 선생이 말하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란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이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다.

나는 노동운동의 현실과 진보좌파의 현실에 대한 최장집 선생의 비판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노동자운동이 초라해진 것은 노동자운동과 진보좌파의 몫이지 다른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현실에 대한 최장집 선생의 비판이 현실성이 있다고 해서 그의 대안이 옳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가 대안으로 선택한 안철수 신당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운동에 대한 체계적 공격을 더 심화시킬 ‘반동적인 금융세계화 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금융세계화’이다. 금융 주도적인 축적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경제적 특징이다. 금융주도적 축적 국면은 경제 질서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2008년 미국 금융위기, 2010년 유럽 재정위기는 그 결과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급진화된 금융시장 개방으로 인해 한국 경제 역시 그와 같은 위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더불어 경제의 금융화는 투자 감소, 실업증대, 노동 배제적 축적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안철수씨의 정책네트워크(연구소)의 이사장은 최장집 선생이고 소장은 장하성 교수이다.

장하성 교수는 초국적 투기자본에게 국내 기업들의 정보를 제공한 ‘좋은기업지배연구소’를 운영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계 투자은행 고문도 했다. 김상조, 장하성 등은 소액주주운동과 같은 주주자본주의 운동을 확대하고 주주가치 실현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금융자본의 이론적 전위였다.(장하준 외,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41쪽)

이런 노력의 결과 한국 경제는 초국적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었고 국부는 체계적으로 유출된다. 안철수 정권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커녕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위가 되어 노동의 해체를 적극 실현할 주체인 것이다.

이는 안철수씨가 김대중씨의 ‘사후 복사물’이 될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김대중씨의 민주적 시장경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급진화시키고 이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고통은 ‘사회안전망’을 통해 보완하는 것이었다. 금융개혁과 노동시장 개혁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4대 보험의 확대는 후자를 대표한다.

안철수체제 하에서는 이헌재와 장하성 등이 주주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전위로서 역할을 한다면, 최장집 선생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복지를 통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사회적 보장’을 인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방법론적인 점에서 보면, 최장집 선생의 근본적 문제점은 정치를 분석함에 있어서 경제가 지닌 효과를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민주주의]에서도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이것이 민주진보세력과 무관한 것처럼 논한다. 그는 민주 진보세력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낳은 문제점과 제대로 대결하지 못했다고 질타한다. 이런 비판은 정치를 통해 경제가 낳는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2013년을 말한다]에서)

그러나 최장집 선생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고유한 논리를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진보 세력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위라는 것을 사고하지 못한다. 경제학 비판의 결여가 그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급진화시킨 주체들에게 금융세계화가 낳는 문제들인 노동 배제적 축적과 삶의 위기를 치유했어야 한다고 그가 요구했을 때, 그는 그 둘이 함께 가는 존재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하성류의 금융자본의 전위와 한배를 타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넌센스이다. 최장집 선생이 안철수씨를 통해 실현하려는 것은, 그가 민주개혁세력을 비판하면서 보였던 오류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금융 세계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발목을 자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서도록 보행 보조기를 제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계속>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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