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잔혹극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책소개] 『하늘을 덮다』(민주노총 김** 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메이데이)
        2013년 06월 15일 1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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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발생 5년째, 왜 다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인가?

    윤창중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온갖 군대 내 성폭력, 조직 내 성폭력 문제도 뒤이어 불거지고 있다. 한국사회에 이런 사건이 없는 때가 언제인가 싶을 정도다.

    사건은 끊이지 않는데 이에 대한 구조적 성찰과 반성은 없고 일상의 성폭력 ‘문화’는 공기처럼 인식도 못하게 퍼져 있다.

    역시나 가해자 ‘한 사람’만이 비정상적이고 ‘변태’라는 식의 선정적 보도 행태 또한 그대로이며, 피해생존자들의 입장을 온전히 반영한 성폭력 관련 서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는 ‘공동체’ 전체가 조직적으로 나서서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집중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의 가치를 표방하는 운동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각 조직은 정반대로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 결국 이 사건은 지금껏 ‘미해결 상태로 문제를 쌓은’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및 2차 가해 사건과 전교조 2차 가해 사건으로 번지며 심각성을 더해갔다.

    민주노총은 사건 평가 보고서 등 형식적 처리 절차를 했지만 성평등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후속 조치를 제출하지 않고 있으며, 전교조는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조직적 은폐 조장 행위로 첫 단추―사건 초기 대응―부터 잘못 끼웠던 악수를 반복했다.

    내부의 뼈 아픈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는 소수 의견으로 묻혔다. 피해생존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겪은 기억을 없앨 수는 없고 이 끝없는 악몽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견디며 살아낼 힘을 얻어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치유일 텐데, 치유와 활동 복귀는커녕 조직적 2차, 3차 피해를 입으며 방어하기만도 역부족이었다.

    하늘을 덮다

    그 속에서 피해생존자와 피해자 지지모임(지지모임)은 사안마다 알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기는커녕 일일이 묻고 구걸하듯 요청하고 확인하고 수습해야 했다.

    크레인에 올라간 것도, 농성장 천막을 마련한 것도 아니지만, 피해생존자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 ‘생존’하는 자체가 지상과제이자 목숨을 건 투쟁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처벌을 받은 듯 ‘유령’처럼 존재가 삭제되고 있었다.

    이에 지지모임은 그동안 조직 내 공론화와 올바른 해결 촉구를 위해 싸워오면서, 묻혀온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피해생존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놓으며 그간의 싸움의 과정을 기록하는 백서를 기획하였다.

    원고를 준비하던 중 전교조에서 사건 처리를 무마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정진후 당시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공천이 확정되었고, 지지모임은 이에 항의해 비례대표 철회 투쟁을 하는 데 또 집중해야 했다.

    결국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요 ‘진보’ 세력인 전교조-민주노총-(당시) 통합진보당은 꿋꿋이 정진후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이 사건을 한층 더 무거운 과제로 만들었다.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 활동 이후 운동사회 반성폭력 운동은 계속해서 (적어도 절차적으로)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이 사건의 지난한 ‘처리’ 과정은 우리의 반성폭력 감수성과 공동체의 변화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성폭력 사건 처리 내부 규정 매뉴얼은 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피해자중심주의와 피해생존자의 권리를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했음을 절감하게 되는, 반성폭력 운동 역사에서 충격적인 단면이다.

    규정으로만 존재하며 막상 현실의 실천, 공유, 인지로 연결되지 못하는 반성폭력 운동 성과를 이제는 제대로 직면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는 이 사건의 피해생존자에게뿐 아니라 ‘여는 글’에서 말하듯 “조직 문화가 여전히 그런 한 앞으로도 나올 수밖에 없을 또 다른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절박하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하다Speak Out’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수많은 말이 어느 시점 묶인 책이라는 물건이 낱낱이 밝히는 진실의 무게는 오죽하랴.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노래나 책을 금지하고 불태우며 진실을 말하는 입을 막았던 것일 터다.

    5년의 시간을 거쳐 말을 걸어온 그 사건도 그랬다. 서러움을 다 담아내기엔 무거운 한 자 한 자, 눈물과 아마 한 바가지의 욕이라도 거들지 않고는 책장이 넘어가기 어렵다.

    그 욕은 ‘그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읽는 내가, 이 사회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최소한의 양심의 크기를 마주친다. 아프고 흔들리는 만큼일 것이다. 마음에 돌덩어리와 그을음 같은 것을 안겨주는 말들의 무게,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견뎌내야 했을 시커먼 연기, 숯, 아니 재가 된 마음, 그 상처 자국의 시간이란.

    어떤 사건, 겪은 당시에는 어떤 일인지 미처 파악도 안 될 정도의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어떤 일을, 단지 ‘모두 사실임’을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관심을 환기라도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같은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수많은 경우에 가르쳐가며 ‘구걸’하느라, 셀 수 없는 밤을 고민과 망설임, 싸움, 울음으로 새워야 한다.

    어떤 경우는 그 일이 성폭력(2차 가해)이 맞는가 아닌가로, 성폭력(2차 가해)이라고 명백하게 규정된 이후에도 그것이 어떤 정도의 폭력인가, 어느 만큼의 사람들이 책임을 함께 져야 할 일인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일의 사실관계에서 피해생존자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가, 믿을 만한가를 가지고 수없이 싸워야 한다.

    치유와 보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실인가 아닌가’ 시비에 걸려, 피해생존자는 자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끊임없이 이 무심하고 무례한 거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와 몸을, 수많은 날의 삶을 소진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재 이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척박한 현실에서 더 귀중한 피해생존자의 진실된 날 것 그대로의 말하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거울 보듯 되물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고 아픔을 아프다고 말하는 자에게 물리는 재갈, ‘왕따’라는 처벌, 웃을 수도 울 수만도 없는 이 잔혹한 한 편의 극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는 이 사건의 피해생존자가 아닌가? 또한 가해자가 아닌가? 과연 이로부터 진정 자유롭고 해방된 자는 누구인가? 우리 안의 어떤 것이 그 ‘유령’과 말하지 못하는 족쇄를 만드나? 한국 운동사회는 속속들이 스며든 스스로의 가부장성을 보지 못하고 정작 살아 있는 목소리, 살려야 할 가치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빈 껍데기로 ‘운동’이니 ‘사회 진보’를 운운하지는 않는가?

    아파서 몸부림치기, 함께 울고 감싸 안기… 싸움의 장, 운동이 시작되는 점은 바로 여기여야 하지 않을까?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 환부에서부터 운동은 움트고 시작되어야 한다.

    온갖 구호와 변명이 넘치는 세상, 겪은 일을 담담히 적은 피해생존자의 글은 고통을 말하는 글이지만, 피울음으로 얼룩진 그 글이 오히려, 가치를 버리고 ‘세’를 택하는 데 익숙해진 운동사회를 포함한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하고 맑은 물 같은 존재다.

    사건 ‘처리’ 과정의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기록

    각 조직에서 사건은 어떻게 일사천리로 ‘해결’(이라고 읽고 ‘처리’라고 읽는다)되었나?

    성정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피해생존자를 포함한 지지모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 조직 내에서 저항하느라 고군분투했는가?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각기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접근하고 ‘처리’했으며, 그 둘은 어떻게 닮았나?

    이 부조리는 어떤 식으로 반복되며 확대 재생되는가?

    소수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묻히고, 힘을 가진 자는 어떻게 조직에서 밀어주는가? 어떤 쪽이 결국 ‘정의’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수 있는가?

    이에 답하는 지지모임 사람들이 함께 쓴 평가들이, 피해생존자의 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간의 활동을 기록한 집회나 공식 회의(대의원대회 등), 토론회, 문서 등 사진 자료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과 이야기로 다양하게 적어 보낸 ‘지지하는 목소리’, 현장에서의 생생한 인터뷰, 피해생존자가 직접 나서서 조합원들에게 호소한 글, <한겨레> 허재현 기자가 취재한 팟캐스트 방송 내용 등 사건의 진실을 모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을 골고루 담았다.

    그 밖에도 이 책에 지면상 다 싣지 못한 기사 스크랩, 성명서 등 추가 자료는 지지모임 카페http://cafe.daum.net/anti-sv의 ‘자료 신청 게시판’에 신청하면 받아 볼 수 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공식 백서가 아니다

    이 책은 지지모임에서 지지와 후원을 모아 함께 쓰고 만들었다. 조직 내 공론화와 사건 해결의 일환으로 백서 작업을 결정하고 발간 지원을 요청했으나 조직이 지원을 거부한 탓이다(2013년 바뀐 전교조 집행부는 일부 지원을 약속했다).

    ‘여는 글’은 “집회에서 백서 발간 후원금을 모금할 때 앞자리를 차지한 정치인이나 핵심 간부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데 선뜻 일어나 호주머니를 털어 꾸깃꾸깃, 한 푼 두 푼 쥐여주신 나이 드신 청소노동자 분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살뜰한 후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피해생존자 동지가 그동안 받은 상처로 뼈를 깎는, 죽을 듯한 고통에서 일어나 이 자리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힌다.

    피해생존자를 포함한 지지모임 사람들의 피해자 중심주의적 철학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은 책이 될 수 있었으나, 앞으로 남은 공론화와 사건 해결, 조직 내 성평등과 반성폭력 문화 확산이 중요하게 남은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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