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 미안하다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40] "그들보다 힘 없다 해서 약한 것은 아니라는 것"
        2013년 06월 14일 01: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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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연재 글을 모은 책 <그대,강정>(북멘토 펴냄)이 출간되었습니다. 4.3 항쟁을 염두에 두고 4월 3일 출간한 <그대, 강정>은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가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강정을 향해 쓴 연애편지 모음집인 <그대, 강정>의 인세 전액은 ‘제주 팸플릿 운동’과 강정 평화 활동에 쓰이게 됩니다.
    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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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먼저 말을 걸었다면 모른 척 했을 일이다. 그대의 눈빛을 내가 먼저 봤다면 아닐 거라며 고개를 숙였을 거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면서 사람의 바깥에서 휘감기는 바람이니 그대도 나도 심장으로 스며드는 파장만을 간직하면 그만이었다. 거기 있으려니 눈 감아야 보이는 존재로도 좋았다. 기억의 물발 속에 구르는 돌과 같아서 다만 둥글둥글 내 가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앉는 저녁이면 바다가 제 거죽을 하얗게 밀어다 그대를 덮어 주려니 안도했다. 남쪽에서 오는 소식이란 그대를 거치지 않은 것 없으니 남풍이 불어도 그대를, 계절이 바뀔 때에도 그대를 생각했다. 그대를 향해 천 개의 눈을 뜨고 그대 있는 쪽으로 만 개의 귀를 걸어 두었다.

    눈 온다. 그대의 등을 덮어 차가운데 외려 따듯한 밤이다. 돌담을 때리는 냉기가 산산 부서지며 소리만 남아 장지문에 한 겹 더 배접된다. 구들의 온기가 힘을 잃을까 한사코 버텨준다. 혼자 앉아 차를 끓이는 시간에 나는 먼 곳의 안부인 양 빈 나뭇가지를 흔든다. 눈은 인정(人情)이 머문 자리에만 내린다. 눈은 아름다운 곳만 골라 앉는다. 그러니 눈은 천지간 구분 없이 그대를 덮는다. 난독(難讀)의 걱정 없는 백색 문장이다. 사람들은 모여 앉는 밤이라 부르고 그대는 순환의 바닥을 짚어 보는 시간이라 말했다. 겨울이다.

    노순택 작가의 사진

    노순택 작가의 사진

    정 많은 신이 고르고 고른 터에 노오란 물감을 엎질렀다. 봄이다. 뭍에서 건너온 행락객들이 구둣발을 남기고 쓰레기를 흘리고 소란함을 펼쳐 놓고 간다. 그러나 봄은 그대로부터 시작되는 허밍(humming)이어서 매화도 유채도 산비탈의 민들레도 제 나름의 음계로 따라 부른다. 바다가 안색을 풀고 돌미역이 굳은 허리를 풀고 전복도 무지갯빛 패각을 비다듬는다. 자리돔이 어우러질 상대를 찾고 벤자리가 새롭게 탑승할 해류를 찾고 방어는 튼실한 근육을 자랑한다. 뭍은 색채의 어우러짐으로 혼곤하고 물속은 자리바꿈으로 분주한데 섶섬에서 문섬 거쳐 범섬으로 징검다리 삼아 넘어오는 아침이니 봄이다.

    태풍은 한해도 거르지 않는다. 무장 번성해서, 진해서 징그러운 초록에 지칠 무렵 찾아오는 손님이다. 비켜가라 주문해도 어김없이 관통하고 거르면 어떠냐 하더라도 들린다. 그대의 생채기가 아프다. 엎어진 나무들의 무릎이 쓰라리다. 뜯겨 나간 지붕이 막막하다. 그러나 쓰다듬으면 투박한 아버지의 손이기도 하다. 부비면 깔끄러운 아버지의 턱이다. 현무암 기공마다 가득 물을 채워 주는 힘이다. 바닷가 기슭에 터를 잡은 사람들의 젖줄이다. 그리움인 양 연중 솟아나는 그대의 상징이다. 넘어짐과 일어섬이 한 몸이고 기운도 성한 시절의 한낮이니 여름이다.

    한라산을 내리닫던 바람이 오름에 걸려 다듬어지고 억새밭을 지나며 순해진다. 사람도 나무도 꽃도 스스로를 갈무리하는 시절이라 햇살마저 휘우듬 등황색으로 빛난다. 그대의 지친 발목을 지그시 눌러주고 통증이 번지는 척추를 어루만지며 괜찮다, 수고했다 다독이는 어머니다. 고샅을 돌던 조무래기들도 한껏 자라고 밀감도 속을 채우며 달달하게 웃는다. 그대의 내력만큼이나 곱게 빗은 머리로 억새는 흔들리고 그대만큼이나 부지런해서 텃밭엔 무며 배추가 짐벙지다. 객지 나간 아들도 눈빛이 깊어져 돌아온다. 성숙한 딸의 입술엔 노을이 붉다. 모여앉아 오분자기 뚝배기에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담을 넘는다. 들어와 한술 뜨고 가라고 소매 잡는 저녁이니 가을이다.

    세상의 어떤 형용사로도 그려 낼 수 없는 그대의 사계절을 생각했다. 그대가 품어 준 사람들의 미소가 헐거워지고 그대와 함께한 사람들의 어깨가 무너져도 마지막은 아니라고 앞줄에 나설 누군가가 있으려니 나 역시 거기 함께 하련다. 안부는 좀처럼 닿지 않고 걱정만 제자리를 맴돌 뿐 남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어야 사랑이려니 그대가 다급하게 부르기 전에 가련다. 가난해서 아름다운 가슴을 지키련다. 그들보다 힘없다 해서 약한 것은 아니라는 증명에 동참하련다. 더할 것 없어 아름다운 그대의 안위를 보호하겠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바깥에서 번지는 눈물이지만 어깨 겯고 체온을 나누듯 함께여야만 한다. 그대의 허리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지고 늑골 사이마다 거친 발자국이 찍혀도 끝장은 아니다. 눈물로 염장된 내력이라서 누대를 두고도 지속될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강정, 제주.

    전영관 : 시인. 2007년 토지문학상 수상, 2008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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