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정밥'의 사연
    [파독광부 50년사] 반은 버려야 했던 탄광의 도시락<검정밥-12>
        2013년 06월 14일 12: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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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왔던 동료들이 귀국했다. 그동안 함께 피땀을 흘리며 운명을 같이하던 친한 인간들이 이제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가는 날이었다.

    동료들을 태운 비행기가 저쪽 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울음을 삼켰다. 속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쓰라린 내 마음을 적시면서 고향이라는 상처를 더 빨갛게 들어내어 소금물에 젓갈 저리듯 저리고 있었다.

    동료들이 귀국한 후에 나는 독일사람과 함께 일했다. 우리가 일하던 자리 아래쪽에 K와 S가 일을 했다. S는 이번에 귀국하지 않고 일 년을 더 연장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 많은 사람으로 마구 말을 놓거나 쌍말을 하지 않고 점잖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K는 나보다 일 년 후에 독일로 왔다. 한국에서 무슨 방송국에 있었다는 사람으로 조금 특이한 남자였다.

    그는 독일에 오던 날부터 지금까지 식성을 고치지 못하여 도시락에 빵 대신 밥을 넣어서 왔다. 그래서 우리가 빵을 먹는 시간에는 그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그는 항상 투덜거렸는데, 그 이유는 쉴사이 없이 석탄먼지가 나르기 때문에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질을 하려면 밥에 먼지가 앉아서 흰 쌀밥이 까맣게 되어 검정밥이 되었다.

    독일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서 석탄 먼지는 먹어도 된다고 해도 K는 검정밥은 걷어내고 먹었음으로 그가 가져온 도시락은 언제나 반은 그가 먹고 반은 버리는 셈이 되었다.

    어떤 때는 양파 무친 것을 반찬으로 가져 왔기 때문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바람이 부는 방향인 그 사람 위쪽에는 파냄새 마늘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러한 냄새에 견디지 못하는 독일인들이 야단을 치면서 스타이거에게 일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탄광 광부들의 도시락 먹는 모습(고한 정선지역의 탄광 )

    한국 탄광의 도시락 모습(사진=고한 정선지역의 탄광 자료 전시관 ‘뿌리관’ )

    그래서 그 후에는 마늘이 들지 않은 마른반찬만 넣어 왔는데 한국 사람이 먹는 반찬이 냄새를 풍기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지 두 해가 넘었건만, 그는 여전히 밥을 도시락에 넣어서 지하에 가져왔다. 이렇게 별난 사람과 며칠 간 같은 막장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K는 한국에 아무도 없었다. 원산이 고향으로 일사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부모를 잃고 홀로 부산에 와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우연히 어느 교회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면서, 내년에 광산 일을 마치고 나면 남독에 있는 어느 도시에 그와 친한 여자가 공부하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후에 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질은 좀 남달랐으나 충실하고 부지런했다. 일도 잘해서 그와 S는 우리보다 하루에 두어서넛 동발을 더 세웠다.

    하루는 일자리에 들어가니 우리와 S가 맡은 구역에 탄층이 있는 앞쪽 천반이 일 미터 가량 무너졌다. 이렇게 천반이 떨어진 자리에는 천반에 대는 받침대를 건 후에 통나무를 얹어 공간을 메우고 나서 그 밑에 동발을 세워야 했다.

    작업장이 위험하고 악조건이어서 스타이거가 선임광부 마이스터와 일을 잘하는 독일사람들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일을 거들어주게 했다.

    마이스터 옷토는 막장의 끝에 있는 위의 갱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3m짜리 통나무를 많이 보내라고 연락했다. 조금 있으니 통나무가 운송철판에 실려서 내려왔다. 우리는 통나무를 철판에서 들어내었다. 통나무를 철판에서 끄집어낼 때는 통나무 뒤쪽을 잡아 끌어내야 했다.

    석탄을 운송하는 철판은 전 길이가 약 250 m 되고 철판의 넓이는 70 cm이며 그 안쪽 양편 홈 안에 쇠사슬이 돌아가는데 약 1m 간격마다 막대기 같은 버팀철을 양쪽 쇠사슬에 걸었다. 이 버팀철이 쇠사슬이 홈 밖으로 나오지 않고 홈 안에서 돌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철판 위에 놓인 석탄 같은 물건들을 밀고 가면서 운반했다.

    그래서 3m나 되는 무거운 통나무를 앞에서 들면 무거운 뒤쪽이 버팀철에 걸려서 밀려 내려옴으로 통나무 앞에 걸리는 것은 모두 밀어서 쓸어버렸다.

    이러한 까닭으로 언제나 철판에 운반되는 물건을 집어낼 때는 뒤쪽을 잡아야 했다. 부주의로 앞을 먼저 들다 병신이 되거나 죽은 광부들이 많았다. 이 뿐만 아니라 철판에서 통나무를 끄집어낼 때에는 항상 위에 있는 돌을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그 무거운 통나무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씨름을 할 때는 천반에서 떨어지는 돌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 우리가 쓸 통나무를 다 끄집어 낸 다음 허물어진 천반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천반의 철대를 걸고 그것을 받침으로 그 위에 통나무를 얹어 올렸다. 경험 있는 독일사람들이 천반에 통나무를 얹고 우리는 그들에게 통나무를 쥐어 주는 보조역을 맡았다.

    갑자기 우지직 뚝딱하는 소리와 함께 와그르르 돌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천반이 무너졌다. 먼지 속에 파묻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먼지가 걷히자, 앞을 보니 우리가 일하던 아래쪽에 산더미 같은 돌무더기가 앞을 막았다. 아우성 속에 S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의야 이리와. K가 묻혔다!”

    K는 마이스터 옷토(Otto)와 함께 일을 했는데 두 사람 다 돌에 묻혀 버렸다. 돌 부스러기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돌무더기를 마구 치울 수도 없었다.

    나는 K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사람처럼 돌무더기를 파 헤쳤다. 누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돌아보니 스타이거가 손짓으로 나더러 안정하라고 하면서 천반을 가리켰다. 친구를 구하려고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생명도 지켜야 한다고 하며 “두 사람이 묻힌 것만 해도 두 사람 너무 많이 묻혔다” 라고 했다.

    그는 한 조는 천반을 막고 한 조는 돌무더기를 치우게 하며 일하는 우리에게 침착하게 일할 것과 떨어지는 돌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참 돌을 치우고 있으니까 구두가 보였다. 누구의 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돌을 치우고 구두를 신은 발을 흔들었으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 몸 위에 산더미 같은 돌이 쌓였는데 무슨 재주로 살아날 수가 있으랴만, 혹시 하고 기대했지만 헛일이었다.

    발목을 보니 피부가 한국사람 같았다. 나는 또 K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직껏 발목이 따스했다. 죽었다고 생각이 가지 않았다. 죽은 그의 몸이나 그를 잡고 있는 나의 몸이나 차이 없이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서로 다른 경지에 있었다. 건널목도 없는 건너편에 그는 이미 가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하나 둘 그의 위에 얹힌 돌을 치우고 있었다.

    돌더미를 반쯤이나 제거했을 때 사장과 광산청 직원과 의사가 구조인원과 함께 도착했다. 그들이 우리를 쉬게 하고 구조작업을 계속했다. 나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넘기고 잠깐 숨을 돌리려 했는데, 나의 눈길이 우연이 어느 돌 밑에 가 닿았다. K의 도시락이었다.

    나는 그를 본 듯 돌을 치우고 도시락을 끄집어내었다. 내가 도시락을 들어 올리니까 뚜껑은 어디로 갔는지 도시락의 아래쪽만 내 손에 잡혀 있고 밥이 통에서 떨어져 석탄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밥을 흘리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석탄 부스러기와 함께 밥을 주어 올려서 도시락에 담았다.

    석탄고물을 친 검정밥을 나는 담았다. 나는 그 검정밥을 그의 무덤에 뿌려 주려고 마음먹었다. 사고 후 약 네 시간이나 걸려서 K와 옷토의 시체를 들어낼 수 있었다.

    구조원들이 시체를 가져 나간 후 우리는 천반의 수리작업을 계속했다. 자꾸만 K의 생각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일을 했다. 흘리는 눈물이 얼굴에 묻은 석탄먼지를 씻어서 입으로 들어 왔다.

    그의 영구가 한국으로 보내진다고 해서 나는 그 이튿날 그가 남기고 간 도시락을 땅속에 가지고 갔다. 그가 돌에 묻혔던 자리는 이제 막장 뒤쪽이 되었으나 아직 알아낼 수가 있었다. S와 나는 젓가락으로 그가 하던 버릇대로 검정밥을 걷어내고 흰밥을 이리 저리 뿌렸다.나는 목맨 소리로 중얼거렸다.

    김 형!
    왜 왔더랬소? 왜 왔더랬소?
    돈이 아쉬워 돈벌러 왔더랬소?
    세상 그리워 세상 보러 왔더랬소?
    하도 못 살아서, 하도 가난해서
    노예생활도 출세라고 활개치러 왔더랬소?
    너무 좁아서, 숨쉴 곳 없어서
    죽을 자리 찾으려고 땅 속으로 왔더랬소?
    가시는 그곳에 밥이 있을지
    못 먹고 남기신 이 밥을
    눈물로 적시어 형께 드리니
    가시다가 배고플 때
    드시며 가소서.

    나는 젓가락으로 걷어 낸 검정밥을 도시락에 다시 담아넣어 K가 누워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던지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우리는 울고 있었다. 땅도 우리의 마음을 알았던지 와르륵 소리를 내면서 K가 죽은 자리를 영영 묻어 버렸다. 나는 그날 내가 후에 늙어서 내 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쓰고 싶은 책의 이름을 『검정밥』이라고 하리라 결정하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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