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아가씨가
    대학 청소노동자 되기까지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3-1]남편 얼굴도 모르고 열아홉에 결혼해
        2013년 06월 13일 01:4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세번째 노동자의 첫회 이야기

    ***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어 시작한 인터뷰

    구술생애사 첫 모임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간사가 사람들 모두에게 구술생애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물어봤다. 그땐 뭐라고 대충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서 새삼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까?

    어떻게 보면 내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이 일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전공이 언론정보학이다 보니 이래저래 인터뷰를 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소위 ‘전문가 코멘트’를 따는 건 그래도 할 만 했는데, 누군가에게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물어보는 인터뷰를 하는 것은 항상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단 나 본인부터가 잘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데, 남이라고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주워듣고 내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내가 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일 자체였다.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것 말이다.

    인터뷰가 다 끝난 지금에도, 내가 이 일에 참여하고 싶었던 명확한 이유를 딱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비록 몹시 막연한 말이기는 하지만) 삶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정확한 말이 될 것 같다.

    대학에 온 후 나는 끝없는 혼란스러움과 회의감에 내내 시달렸다. 1,2학년 때는 이런 고민들을 멀리 밀어둘 수 있었지만,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더 이상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생각들을 미룰 수 없게 됐다.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지만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학생들과 교수님들, 교내 청소노동자들의 모습도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여러 가지 풍경들 중 하나였다.

    너무 달라 보이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당연한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교수님들과 학생들은 처음부터 공부를 하도록 되어 있었고, 청소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청소를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청소 노동자들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의 청소 노동자들은 대부분 50-60살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전에는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어떻게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동정심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도 구술생애사 프로젝트에 끌렸던 또다른 이유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얼마 안 되는 돈을 제외하면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본 적도 없는 주제에, 한평생 자기 삶을 열심히 꾸려온 이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규정짓고 싸구려 동정심을 품고 싶지 않았다.

    간사가 말한 ‘노학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구술생애사 프로젝트는 내게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난관에 부딪힌 인터뷰, 그리고 김옥순 조합원과 만나다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한 후 가장 먼저 봉착한 난관은, 인터뷰 대상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난감해하던 중 내 눈에 들어온 분이 김옥순 조합원(가명)이었다.

    김옥순 조합원은 차분하면서도 밝고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조합원은 항상 나를 보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컴퓨터를 배워서 얼마나 좋은지 말하며 시작교실에 대한 애정을 수시로 표현하는 분이었다.

    나는 항상 수업시간이 끝나면 내 설명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내가 이 분들한테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 라며 좌절감에 빠지고는 했는데, 김옥순 조합원의 격려로 인해 매번 기운을 얻곤 했었다. 그래, 바로 이분이다! 김옥순 조합원이라면 응해줄 것 같았다.

    김옥순 조합원은 처음에는 몇 번 손사래를 치며 무슨 인터뷰냐고 했지만, 결국에는 내 예상대로 ‘딱 한번’이라는 조건으로 응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세 차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징용을 피해 들어간 산골에서 태어난 김옥순 조합원

    첫 인터뷰는 김옥순 조합원이 일하고 있는 건물의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나대로 갑자기 인터뷰를 하려니 조금 어색했고, 김옥순 조합원도 ‘어떤 말을 해줘야 공부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조합원에게, 손녀딸에게 어렸을 때 얘기를 해준다고 생각하시고 말씀을 좀 해달라고 졸랐다. 조합원은 할 이야기가 없는데, 없는데 하더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옥순 조합원은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으로는 1947년생으로 나와 있지만, 실은 1946년생이다. 1979년 무렵 상경해서 그 후로 서울에 쭉 살고 있는데, 현재는 은평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대에서는 2006년부터 일해 왔다.

    (필자) 조합원님은 원래 고향이 어디세요?

    (김옥순) 원래는 시골, 남원이에요. 친정은.

    (필자) 그럼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셨어요?

    (김옥순) 서울에…. 30대 초반에 왔으니까 지금 한 35년 정도 됐나. 우리 막내가 1학년 때 왔으니까, 걔가 지금 마흔 둘이 되거든요. 그럼 한 서른 네 살 때 왔나. 그 정도에 왔을 거예요. 오래된 줄 알았더니, 오래 안 됐네. 나는 한 백 년 산 것 같은데.

    (필자) 그럼 결혼하면서 올라오신 건 아니네요.

    (김옥순) 아 그렇죠, 살다가 올라왔어. 어렸을 때 우리 엄청 가난했었어. 어렸을 때 왜 가난했냐면, 아버지가 징용 안 가시려고-젊은 남자들이 그 땐 탄광에 석탄 파느라고, 그런 데 다 잡혀갔었잖아-저 지리산으로 엄마하고 언니하고 아버지하고 세 분이서 그리로 들어가신 거야.

    아주 깊은 산속으로. 쥐도 새도 모르는 거기 들어가셔서, 산을 파서 감자 같은 거 심어서 잡숫고 그랬는데 거기서 나를 임신을 했나봐.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갖고 나오시고 나니까, 이젠 먹고 살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책만 보던 양반인데, 앉아 계시면 계속해서, 습관으로 계속해서 한문을 쓰시는 거야. 계속. 그러니까, 그야말로 학자다운 학자도 아니면서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되니까 이제 일도 제대로 뭐 농사도 제대로 못하고 좀 어중 띠어 갖고 산에 들어가 계시다 나와 놓으니깐, 뭐… 가난하지 뭐야.

    땅도 없지, 아버지 형제분이 4형제분이지…. 그래가지고 엄청 가난했어, 나는 진짜. 그래가지고 고생 많이 했어 어렸을 때도.

    (필자) 조합원님은 형제분이 몇 분이나 되셨어요?

    (김옥순) 7남매. 내가 둘째. 딸이 다섯이야 우리. 딸이 다섯이고 내 밑으로 남동생 낳으면 또 죽고, 또 딸 낳고 또 아들 낳으면 또 죽고 해서 아들 둘 죽고 (마지막으로) 막내 하나 낳아서 7남매인데, 남동생이 둘이고 여자형제가 다섯이야. 클 때는 그래도 참 의좋게 잘 컸어. 지금도 그러지만. 지금도 여러 형제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좋아. 외롭게 큰 사람들은 좀 다르더구만, 성격들이.

    “공부를 하게 하면 시집가서 친정에 편지나 쓴다”

    (필자) 그러면 남편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전 원래 이런 게 제일 궁금해서…

    (김옥순) 응, 그런 게 궁금해요? 그렇구나… 우리 집 양반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도 하늘천 따지만 아시고 양반만 따진 양반이라, 여자는 어디서 감히 하하 크게 웃지도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자랐어요. 여자 말소리가 담을 넘어가면 집안이 망한대나 어쩐대나.

    그리고 몸뻬도 못 입게 하고. 언니보고도 ‘언니’라고 하지 말고 ‘성’이라고 하라 하고, 성. 언니는 다방 애들이나, 무슨 왜놈들이나 그렇게 하지 우리나라 말엔 언니가 없다, 그랬는데.

    열아홉 살 먹을 때, 열여덟 살 때부터 자꾸 시집을 가라 하더라고. 그래서 아니라고, 스무 살만 먹으면 가겠다, 사정을 해도 안 돼. 오래 집에 키우면 안 된대.

    그래서 학교도, 여자는 많이 배우면 안 되고…. 시집가면 “동이를 깼어요 뭐 어째서 물어줘야 돼요” 그런 쓸데없는 편지나 쓰고 그런다고, 공부도 안 가르치려 그래요, 절대로.

    그래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인가, 동생들이 많고 그러니까 애기보라고 해서, 애기도 봐야 됐고. 그리고 사친회비가 2백원인가 그런데 그걸 못 내 가지고 중단했어요, 2학년 때.

    그러니까 그게 너무 속상해가지고 막 울고불고, 애기를 업고 그러다가는…애기를 업고는 쑥을 캐서 엄마 시장가시면 그거 좀 팔아다 달라 그러고,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두 달 지나 사친회비를 내가 마련을 했어요, 어린 게. 그래가지고 다시 2학년으로 들어가서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을 했어.

    당시 웬만큼 유복한 집이 아니고서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부를 하게 하면 시집가서 친정에 편지나 쓴다’는 이유로 조합원이 공부하지 못하게 했다는 조합원 아버지의 말씀이 내게는 굉장히 신기하면서 이상하게 들렸는데, 이 말은 알고 보니 꽤 흔한 말이었다.

    삼각지의 유명한 국수집을 운영하는 배혜자(76)씨도 “글을 배우면 시집가 어려울 때마다 편지질을 해 집안 망신시킨다”는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글을 익히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계속 남았다고 말했다.(경향신문, 「길, 만인보’」)

    충북 음성군의 노인복지관 시 창작교실을 수강했던 한충자(83)씨 또한 아버지가 “여자가 글 배우면 시집가서 시집살이 한다고 편지질이나 한다”며 공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교육을 시켰다.(오마이뉴스, 「“군대 간 남편 편지, 가슴에 품고 울기만 했어요”」)

    출처는 국가기록원

    출처는 국가기록원

    어린 시절에 한글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회고담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시집가서 친정에 편지나 쓴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방직후 제정된 교육법은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를 만6세부터 12세까지 취학시킬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지만, 전쟁 등의 영향으로 전면적인 의무교육은 1954년에 가서야 시행될 수 있었다. 1959년이 되면 아동취학률이 93.6%까지 오른다.

    1950년대 교육에서 나타난 성차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이임하는 아동 의무교육의 양적팽창이 여성에게도 교육기회 확장으로 다가왔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와 같은 제도적 보장은 실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1955년에 남자아동의 71.9%가 취학하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여자아동의 경우는 57.3%에 불과했다. 1950년대 내내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40~50만 명이나 많았다. 이와 같은 차이는 문자해독률의 차이로 이어졌다.

    1959년 12월 중앙교육연구소가 진행한 ‘전국문맹자조사’에서 나타난 문자해독을 하지 못하는 인구비율은 남성이 11.1%인데 비해 여성은 33.4%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상대적으로 남성중심주의가 더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농촌의 경우 더욱 두드러졌다. 남성중심주의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도 더욱 강화되었다.

    1950년대의 학교 재정은 대부분이 수업료와 사친회비 등 학생 부담으로 이루어졌다. 흉년이 되면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학생의 진학률이 현저히 낮아지는 현상이 빚어진 것도 이러한 구조 때문이었다.(이임하, 「1950년대 여성교육에서의 性차별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김옥순) 그렇게 해서 동생들 키우고 살림하면서 이제 열아홉 열여덟 살쯤 되니까, 시집을 가라고 여기저기서, 동네에서도 자꾸 며느리 삼겠다 맨날 이래쌓고 그랬는데… 그땐 남원에서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생선장수 아줌마가 있었어. 동네를 이고 다니면서 팔아요, 아줌마가.

    우리 동네 말고 다른 동네에 남자가 있다고 그 아줌마가 중신(=중매)을 하는 거야 나를. 그래서 아버지가 양반만 따지니까 맞선 같은 거 절대로 못 보게 하고, 아버지가 선을 보러 가시는 거야. 아버지하고 큰아버지하고.

    후에 다른 조합원을 인터뷰한 혜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흥미롭게도 김옥순 조합원과 혜연이 인터뷰한 이경순 조합원은 비슷한 연배이지만, 이경순 조합원의 경우는 김옥순 조합원과 달리 직접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지방과 수도권의 혼인 문화 차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혹은 남원에서도 김옥순 조합원의 아버지가 특히 봉건적인 사상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눈물 흘리며 한 결혼, 그리고 첫사랑의 추억

    (필자) 그러면 직접 만나신 게 아니라 부모님들이?

    (김옥순) 어이구, 감히, 절대. 기집애가 어디 가서 남자 선을 봐. 절대 못 가죠. 아버지하고 큰아버지하고 선 자리를 보러 가셔가지고는… 그, 우리집 양반이 권가예요. 권. 그러니까 양반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무것도 안 보고 양반만 보고 그냥 그 자리에서, 사성(=사주)이라고 그래 그 때는. 딸을 주겠다는 그런 사성을 받아갖고 오셨는데…. 아침에 가시더니 저녁 늦게 캄캄할 때 오셨더라고.

    그러면서 이제,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어머니가 그 사성을 받아다가 뭐 쌀독에다 넣는대나 어쩐대나 그러더라고 어렸을 때 들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받아갖고 오셨는데 나는 그걸 알고 내 방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시집 안 가려고. 그래갖고 아무것도 모르고 열아홉 살 때 그렇게 시집갔어요.

    (필자) 언니가 한 분 계셨던 거죠?

    (김옥순) 네, 언니는 진작 열여덟 살에 가버리고.

    (필자) 그럼 언니분도 똑같이 그렇게 시집가신 거예요?

    (김옥순) 네, 그랬죠. 언니도 그랬죠. 언니도 큰아버지랑 (아버지랑) 가서 남자를 보고 그리 시집보내겠다, 어른들끼리 약속을 하고 오면, 날짜 잡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얼굴도 모르고. 언니도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유난히 그런 거를, 양반을 따져가지고. 그래서 나도 집에서 전통혼례를, 족두리 쓰고. 그렇게….

    (필자) 동네에서 원래 마음에 드시던 분은 없었어요?

    (김옥순) 있었지. 아이고, 있었어도, 감히…. 이제 이런 얘기 저기 없응께 하지, 나 좋다고 편지 던진 사람도 있었고…. 한번은 어렸을 때 외갓집을 갔었어요. 외할머니 제사를 모시러 외가에 갔는데, 외삼촌 친구가 날 좋아했어요.

    외갓집에서 하루저녁 자고 오는데, 외삼촌이 오라 해서 외삼촌 방으로 가보니까 친구가 와 있더라고. 나는 아무생각 없이, 그냥 외삼촌 친구니까 좀 앉았다 나오고, 그땐 웃고 얘기하지도 않고, 그랬는데도 그 다음날 오니까 동구 밖에 있더라고 그 남자가. 외삼촌이 보냈나봐. 그래갖고 말을 걸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그리고 나서 봄에 편지가 왔더라고. 너무 놀랬죠. 부모한테 들키면 죽지. 나 죽어, 그때는. 머리 깎이고. 아주 그냥 큰일 나는 거야. 그때 엄마도 어디가시고, 내가 베를 짜고 있었는데 누가 밖에 온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까 편지가 왔다 그래. 보니까 그 산동면서 왔더라고. 외삼촌 친구 그 사람한테서. 그 사람 이름은 알았거든. 놀래갖고 아궁이에다 넣고 태워버렸지 뭐. 보다 말고….

    (필자) 다 안 읽어 보셨어요?

    (김옥순) 다 못 읽었지, 무서워서.

    (필자) 읽으시고 태우시지…

    (김옥순) 아이고, 그러니까 말이야. 그때만 해도 큰일 나. 동네에서 아주. 나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쫓겨나고 엄마도 쫓겨나고, 우리집이 동네에서 쫓겨나야 되는 거야, 그렇게 연애질을 하면. 옛날엔.

    (필자) 아, 학강님 아버님께서 엄격하셔서 그런 것도 있지만 동네에서도 그렇게….

    (김옥순) 어유, 동네에서도 못 봐요. 동네 물든다고, 이런 계집애가 있으면, 동네 다 그렇게 된다고… 다 쫓겨나 우리 식구가. 동네 사람들이 와서 구들장을 파버려. 옛날엔 그랬어요. 내가 그런 걸 봤거든. 언니들 연애해 갖고, 한 집이, 주인 아가씨하고 머슴하고 좋아해갖고 쫓겨나는 걸 봤거든. 그렇기 땜에 내가 겁나니까, 아궁이 안에다 처넣고 빨리 불살라 버렸지.

    그런 적도 있었는데…아버지가 가셔서 날짜 택일 받아와서. 결혼해가지고 그렇게 살았어요. 시집가서 뭐 그렇게 좋은 것도 모르고. 그냥 어른들이 살라니까 가서 사는 거야. 나야말로 진짜 나이는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은데도, 진짜 그야말로 옛날 그대로 살아왔어.

    개인의 연애에 대해 가정에서뿐 아니라 심지어 동네에서도 통제가 가해진다는 것에서, 현대 도시와 50년대 농촌의 공동체 문화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한 동네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10년 넘게 산) 이웃의 연애사는 고사하고 동네 밖에서 만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을 정도니 말이다.

    (필자) 아까 열아홉 살 때 결혼하셨다고 하셨으니까, 되게 어린…

    (김옥순) 지금으로 보면 애기지. 그렇게 (시집엘) 가니까, 시어머니는 오십 다섯, 한 살 덜 먹은 시동생, 세 살 더 먹은 시누, 형님, 시숙, 형님 내외가 낳은 조카딸 하나, 나, 그러니까 식구가 일곱인데. 다 장정이야 아주 젊어.

    시어머니도 오십 다섯이니 한창이고, 애기 하나 맡겨놓고 다 들에 가버리면 그거 업고 다 밥하고 빨래하고 김치 담아내고 얼마나 일을 했는지. 나는 아주…진짜 나 살아온 세상은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 그때는 당연히 남들도 다 그러는 줄 알고 자알 해냈지. 아주 휘파람소리 나지, 그냥…. 동네에서도 아주 잘한다 잘한다 했지. 근데, 옛날에는 뭐 다 그렇게 살아야 되니까…그렇게 살았지.

    (필자) 그럼 그 식구 중에서 학강님이 일도 제일 많이 하셨겠네요.

    (김옥순) 내가 다했다니까. 선생님들(컴퓨터 교실 강학들)은 몰라요. 보리쌀만 이만한 다라이에다 씻어서 가마솥 불을 때서, 반찬 다 가지나물 뭔 나물 뭔 나물해서, 그 젊은 사람들 일곱이 먹는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큰상으로 일 갔다 왔을 때 차려놓으면 싹 쓸고 싹 쓸고 하지. 밥도 한 솥으로 해서 퍼놓으면 다 먹고 다 먹고 그거 해대느라고 아주 그냥 죽지. 또 빨래는 무명옷에 뭐 이렇게 빨아서 다려서, 빨아대야 되니깐. 장갑이 어디 있어.

    그리고 우리 집이 좀 높아 가지고, 우리 두레박줄이 남자 발로 한 여섯 발 돼요. 그럼 두레박을 내려서 물을 퍼서 올리면, 급하게 하면 어그러져버리고 한 공기도 안 올라와. 급할수록 천천히 해서 이렇게, 이렇게 반듯이 올려야지. 급하면 다 흔들어져갖고, 그 물 다 퍼서 막… 아휴……

    추울 땐 막 손이 쫙쫙 벌어져, 피가 착착 나고. 동동 구르며 뭐 발라 봐도 소용없고, 냇가에서 빨래해 갖고 오면 손이 다 벌어지고. 하얀 앞치마에 분홍색 치마에, 초록 저고리 입고….새댁이라고. 앞치마 쫙 감아서 입고. 으아…어떻게 살았는지, 진짜… 불도 때고 시간이 안 되니까 밥 안쳐놓고 불 때면서 발로 한번 불 탁 차 넣고 이거하고 저거하고 그냥. 상도 두 개씩…. 그땐 부엌 입식 그런 거 전혀 없잖아. 부엌문 열고 갖다가 마루에 놔야 하고.

    한번은 눈보라가 치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상을 들고 가다가, 시숙 젓가락 한 짝이 떨어졌던가벼. 눈 속으로. 나는 바쁘니까 쉬딱쉬딱 하거든. 그걸 잃어버려 가지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안 잊혀.

    그 때는-지금도 그렇지만-시집갈 때 신랑 젓가락 숟가락 해가잖아요. 형님이 해온 숟가락이고 젓가락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드릴 수 없어. 눈이 다 녹고 나니까 그 속에서 나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주, 살았지. <계속>

    필자소개
    학생.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