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의 어머니, 혁명적 인텔리겐챠
        2013년 06월 12일 05: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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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제가 초중학교에 다니면서 늘 품었던 한 의문에 대해서였습니다.

    사회과학 수업에 교사들이 우리에게 늘 강조했던 것은,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무산계급이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부분이었는데, 실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 출신성분상 “무산계급”과의 관계성은 거의 안보였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맨위에는-“이론가”로서는-귀족/관료(플레카노프, 레닌), 평민 지주(트로츠키), 적어도 학교 교사 등 일선 인텔리겐챠(부하린) 출신이었다면, 그것보다 약간 밑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고학, 독학을 해서 상당한 지식 수준에 이른 “노력형” 인텔리겐챠(스탈린,키로프)들이었습니다.

    좌우간, 정치적 비중이 그다지 없었던 칼리닌(관련 링크) 외에는 30년대 이전까지는 볼셰비키 정당의 지도부에서는 공장 노동자 출신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동계급 헤게모니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교사에게 물으면 교사 왈 “레닌에 의하면 전위정당에 의한 급진사상의 유입 없이는 노동운동은 조합주의적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급진사상 유입의 사명을, 바로 그 지적 배경상으로 그 사상을 접할 위치에 있었던 혁명적 인텔리겐챠들이 맡았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답은 맞았을 것입니다. 노동계급의 이윤추구 체제에 대한 반발이야 하루도 쉬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계속 이루어지지만, 절대 다수의 경우에는 이는 당면 경제이익을 놓고 벌어지는 반발이고 체제는 이런저런 양보, 협박, 포섭 등으로 이 반발들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습니다.

    노해동

    레닌과 마르토프 등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챠들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재로서 파업운동이 제일 활발한 지역인 중국을 한 번 보시죠.

    노동자 등 기층민 투쟁의 간접적 성과로 몇년 전에 10년간의 계약노동 이후의 정규직 전환을 보장해준 새 노동법 채택, 농민공(농촌 출신 이주노동자)의 임시 도시 거주증 제도 실시, 상당한 수준의 임금 인상 등을 이룰 수 있었는데,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위정당을 만들 수 있는 혁명적 인텔리겐챠 계층은, 지금의 중국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직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100년 전 같으면 중국의 혁명적 인텔리겐챠 계층은 도일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해서 1900년대 초반에 대체로 만들어져, 신해혁명에 이어서 20년대 국민당, 공산당 운동의 모체가 된 거죠.

    그러니까 모택동이 1921년에 공산주의로 전환해서 공산당 창립운동에 합류했을 때에, 그에게는 롤 모델로서는 손문, 황흥 (黃興), 송교인 (宋教仁) 같은 선배들이 있었던 거죠.

    1895년에 레닌이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 동맹>을 결성했을 때에는 그에게는 전 세대의 <인민의 의지> 조직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혁명적 인텔리겐챠 주도 운동의 사례들이 참고될 수 있었던 거죠.

    중국에서는 혁명적 인텔리겐챠 계층이 형성된 것은 약 1900년대 초반이고, 러시아에서는 1860-70년대인데, 이를 기반으로 해서 전위정당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 어떤 “노동계급 혁명”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조건 하에서 이 혁명적 인텔리겐챠 계층의 형성이 가능한가요? 그리고 왜 오늘날 한국에서는 혁명적 인텔리겐챠는-비록 그룹이나 섹트 수준에는 아주 약간 있어도-하나의 계층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당분간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인가요?

    한 가지 편견부터 씻어내야 하겠어요. 혁명적 인텔리겐챠는 현 사회에서 쓰잘 데 없는 “잉여인간”들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실은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형성, 발전기는-러시아의 1860-1910년대, 중국의 1900-1940년대, 조선의 1920-40년대-는 대개 근대사회의 고속 발전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는 유능한 변호사 레닌, 나이 27살에 고향 호남성에서 아주 잘나갔던 잡지 <상강평론> (湘江评论)을 편집하고 다수의 논문을 기고할 정도로 유능했던 젊은 비평가/교육자 모택동, <동아일보>에서 필봉을 잘 날리고, 얼마든지 고급 글쟁이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박헌영-이들은 사실 근대 발전기 사회의 “모범생”에 가까웠습니다.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단순히 생존을 잘할 뿐만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러면 그들이 이런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위험천만의 직업적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물론 개개인 차원에서는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 “양심”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개별적 “양심”들을 전사회적으로 조합해보면 결국 현 체제/지배계급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데에 대한 집단적 공감 같은 정서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양심”이란 결국 한 개인이 사회적 부조리를 묵과할 수 없다는 걸 뜻하는데, 이 “양심”이 혁명투쟁으로 전환되자면 현 체제/지배계급에 “부조리”밖에 없다는 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실제로는 러시아의 1860-1910년대, 중국의 1900-1940년대, 조선의 1920-40년대에는 그런 합의가 실재했습니다.

    유대인 학살이나 대대적인 농민 아사 사태 등이 계속 벌어지고 그러면서도 필요없는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후진국이자 상습적 침략국인 제정 러시아를, 상식이 있는 인텔리겐챠는 도대체 명분이 있는 정권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을 팔지 않으려면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데 대한 폭넓은 유식층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혁명적 인텔리겐챠는 수많은 일반 지식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돼 유식층 안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만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일부분인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에 의한 공장노동자 포섭, 즉 일종의 “지식인-노동자 혁명연대”가 성공돼 혁명의 기반이 공고화될 수 있었죠.

    마찬가지로 명분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청조의 말기, 이름뿐인 민국, 군벌 정권, 그리고 30년대의 국민당 독재 하에서 살아야 했던 노신(魯迅), 파금(巴金), 정령(丁玲), 애청 (艾靑)등 그 당시 중국 지식인층을 대표했던 문호들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요?

    맞아요, 애청처럼 스스로 공산당 입당하든지 아니면 노신처럼 당적이 없는 사회주의자로 말년을 살다 가든지, 대체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독서인 사이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여진 데에 따라서 공산당과 홍군은 농민층의 포섭, 지도에 성공했고…그 다음을 여러분들이 저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선후배들에게는 일제 통치는 과연 명분이 있을 수 있었는가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결국 유식층 사이의 체제에 대한 공통된 거부반응은 궁극적으로 혁명을 낳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와 아주 약간 비슷한 상황은 전두환 말기에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체제/정권에 대한 지식인의 공통적 거부반응”은 불과 청년 지식인의 일부에 국한돼, 전사회적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로 캠퍼스를 거점으로 한 “운동권” 바깥의 사회는, 군바리들의 퇴출과 일본이나 서구처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원하면 원했지 “체제” 자체나 지배층 전체를 문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외부적 모델의 몰락(소련, 1991년) 내지 그 약점을 노출시킨 극단적 위기상황(북조선의 고난의 행군, 1990년대 후반)에 따라 그 권위에만 기댈 수 있었던 “운동권”은 무력화돼 상당 부분은 오히려 체제에 개별적으로 포섭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투사들이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다수의 믿음을 더더욱더 강화시키는 효과를 거둡니다.

    고학력자든 저학력자든, “을에 대한 갑의 횡포”에 분통을 떠뜨려도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이윤 추구 본위의, 재벌 중심의 경제/사회 체제와 이름뿐인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당연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혁명”을 논할 수 있나 싶습니다.

    그런데 체제의 한계는 어쩌면 우리 생각 이상으로 빨리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그리스처럼 한국 젊은이의 대다수가 정상적 “취직”의 기회를 아예 원칙적으로 박탈 당하고 “평생 알바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된다면, 어쩌면 체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그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매우 슬프게 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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