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범생 둘째형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14] 말썽 한 번 피우지 않는 둘째 아들
        2013년 06월 12일 01: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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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형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나 대학 어디로 갈까?” “내가 한이 많아서 니가 법대 가면 좋겠지만 그게 맘대로 되니!” 둘째형은 어머니 말을 듣고 법대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신다. “니 둘째형은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았다. 늘 엄마 말을 잘 들었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둘째형에게 학교 선배가 오라고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차비 좀 줘. 학교 가야겠어.” “얘는 지금 저녁 6시가 넘었는데 어딜 간다는 거니. 돈 못 준다.”

    둘째형은 아직은 여름이 오기 전인데 추리닝 바지에 러닝 하나 달랑 입고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20킬로미터가 넘는데 그 길을 달려갔다. 학교에 도착하니 옷과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집에 올 땐 학교 선배가 버스비를 주었다.

    그 선배는 스님이 되었고 형과 지금도 가깝게 지낸다. 그렇게 해서 둘째형은 학교에 가겠다는 약속도 지켰고 어머니에게 억지로 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 둘째형에게 차비를 주지 않아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 아들이 밤늦게 집을 나서니 걱정이 되서 그렇게 했지만 학교까지 뛰어갈 줄은 몰랐다.

    어머니 자식 사랑은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 도시락을 싸 줄 때면 꼭 계란 프라이를 해 주었다. 그런데 반 동무들은 도시락에 덮여 있는 계란을 홀라당 뺏어 먹기 일쑤였다. 그 뒤론 어머니는 동무들이 모르도록 계란 프라이를 도시락밥 사이에 끼어 넣었다.

    둘째형이 고등학교 1학년 다닐 때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둘째형은 우산을 안 쓰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뛰어 나와서 달리는 버스를 우산으로 때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우산을 주지 못했다. “니 형은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도 좋아 했지.”

    “니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때지 친구들을 잔뜩 집에 데리고 오면 내가 라면을 끊여 주었어. 그땐 라면이 비쌌지. 라면 하나에 김치와 국수를 잔뜩 넣고 끊여 주면 니 형은 친구들에게 좀 미안했나 봐. 그래도 니 형은 두 말 안하고 잘 먹었지.”

    둘째형은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도 자기 돈으론 떡볶이 한번 사 먹지 못했다. 둘째형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어머니가 혼자 갔다. “둘째야,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짜장면이요.” 그날 둘째형은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는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밖에 나가서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어머니는 둘째형 대학 등록금을 내려고 모아 두었다. 알고 지내는 이씨 아들이 급한 일이 있다고 며칠만 쓰고 갚겠다고 해서 빌려 주었다. 하지만 돈을 갚지 않았다. 둘째형 등록금 마감 날짜는 다가오지 돈은 갚지 않지 애가 탔다. 할 수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냈다.

    어머니는 이씨 아들을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어머니를 확 떠밀었다. 어머니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 사람은 경찰서에 가서도 큰소리를 치면서 어머니에게 돈을 갚았다고 생떼를 썼다.

    경찰서 형사는 어머니에게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다. “아주머니, 이 사람은 보통이 넘어요. 함께 경찰서 문을 나섰다간 아주머니를 때릴지도 몰라요. 먼저 집에 들어가 계세요.” 경찰은 그 사람에게 어머니한테 돈을 갚았다는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돈을 주었다는 영수증도 만들지 않았기에 자신도 영수증을 안 만들었다고 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 돈을 떼였다. 그래도 친척들에게 말을 하지 않고 돈을 벌어서 빌린 돈을 다 갚았다. 아들이 법대에 들어갔지만 돈을 주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둘째형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군대에 들어갔다. “어머니, 나 군대 어디 갈까?” “전경 가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니!” 둘째형은 어머니 말대로 전투경찰이 되었다. 전투경찰을 지원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소에서 우연히 뽑혔다.

    2008년 촛불 시위 당시 전경들의 모습 한 장면

    2008년 촛불 시위 당시 전경들의 모습 한 장면

    어머니는 육군보다는 전투경찰이 편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경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1980년, 전두환은 총칼로 광주 사람들 수백 명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했다. ‘학살 정권 몰아내라’는 구호가 끝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둘째형이 근무하는 전투경찰은 힘들었다.

    둘째형이 군대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무척 아팠다. 큰형도 군대에 있었다. 아들 둘이 모두 군대에 있으니 부모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머니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 들였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니 아버지가 허리에 무슨 오들오들한 게 막 났지. 병원에 갔더니 빨리 입원하라고 했어. 그래도 돈이 아까워서 니 아버지는 입원 안 한다 하고 약을 짓고 집에서 쉬었지. 그러다 나았어. 니 아버지는 만날 달력에다 표시를 해 놓곤 얼마 있으면 둘째가 휴가를 나온다, 또 며칠 있으면 큰아들이 제대를 한다 하면서 그려 놓았지.”

    둘째형은 경북 경찰국 기동대 2중대 3소대 소속이었다. 영남대학교 옆에 있었다. 그 학교는 데모를 많이 하지 않아 서울에 자주 올라왔다.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에 왔다. 그 해엔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있었다.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안 좋다고 노점상들을 강제로 철거했다. 대학생들은 이런 일에 반대하며 연일 데모를 했다.

    둘째형은 데모를 진압하러 서울로 올라왔다. 그 학교는 내가 대학을 다니던 학교다. 어머니는 둘째형이 데모를 진압하러 서울에 올라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귤 두 상자를 샀다. “그때 귤값이 비쌌지. 귤 두 박스를 사서 전경이 탄 버스에 한 상자씩 넣어 주었지. 니 형은 얼굴만 잠깐 보고 말았어.”

    다행히 그날은 데모를 크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음을 쓸었다.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대학에 둘째아들은 데모를 진압하러 오고 셋째아들은 데모를 할지도 모르니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어머니는 둘째형 군대 면회를 갔다. 서울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 다시 버스 타고 부대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부대 앞에 있는 병사는 말했다. “아주머니,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면회가 안 돼요.” “아니 이를 어쩌나 아들 면회 온다고 밤새도록 주민등록증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방 한복판에 놔두고 왔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

    어머니는 부대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혹시 아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내 아들, 은영수지.” “네, 그럼 그때 서울에서 귤을 사주신 은영수 어머님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는 겨우 아들 얼굴을 봤다. “니 형은 빨간 막대기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어.”

    “니 둘째형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선 군대에서 쓰던 건 일체 다 갖다버렸지. 신발이고 뭐고 군대 물건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버렸어. 아마 전경으로 있는 게 힘들었나 봐.”

    둘째형은 제대를 하면서 부하들이 정성껏 만들어준 앨범도 미련 없이 버렸다. 어머니는 잘 기억을 못하지만 둘째형이 휴가를 나와 서울에 있으면 군대 고참이 새벽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술값을 가지고 나오라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부대에서는 자살한 사람도 있다. 재래식 화장실에 옷을 한쪽에 잘 개켜 놓고 벌거벗은 몸으로 똥통에 빠져 죽었다. 부대에서는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괴로워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는 중대장과 고참들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지만 쓰여 있었다.

    그의 죽음은 묻혔다. 물론 연인이 떠난 것에 괴로워도 했지만 사람대접을 해 주지 않는 군대 문화를 힘들어 했다. 둘째형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이제 내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둘째형은 말썽 한 번 피우지 않고 살아서 별 얘기가 없는데 내 얘기는 무지 많다고 하시며.

    2013년 6월 9일 일요일 아침부터 더위가 몸으로 확 느껴오는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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