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결혼...한국에서의 첫경험
[파독광부 50년사] 우연찮게 다가온 결혼...집에 와도 외롭지 않아<검정밥-11>
    2013년 06월 11일 12: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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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와서 세 번째로 맞는 화창한 오월 어느 주일이었다. 매 주일과 마찬가지로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델하이드를 마중 갔다. 교회로 오는 아델하이드와 만나서 함께 교회로 갔다. 오늘의 아델하이드의 표정은 심각하게 보였다.

웬 일이냐고 물었다. 임신했다고 했다.

나는 머리가 띵 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 할 예정이냐고 대책을 물었다. 결혼하자고 했다. 나는 열여덟 살 난 처녀가 이렇게 침착하게 나보다 더 어른처럼 말하는데 놀랐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교회로 갔다.

나는 예배시간에 앞에 걸린 십자가를 보면서 ‘운명이다. 내가 저지른 운명이다. 책임을 져야 한다!’ 라고 마음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지난 이년 반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아델하이드와 사귀면서 그의 사람됨과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아델하이드는 농담으로도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크게 떠들거나 뽐내거나 유치한 행동과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에서 지금까지 독일인의 상용어인 ‘솨이쎄’ 소리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남에게 대하여 이해심과 동정심이 많고 행동과 처신에 나이를 더 먹은 나보다 침착했고 어른 같았다. 나는 이러한 사람에게 내 평생을 맡겨도 좋다고, 그리고 이러한 사람과 평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에 닥친 문제는 결혼이다. 결혼하자!’라고 마음으로 결정하고는 하느님께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이 결정이 마음속에 서자 나는 옆에 앉은 아델하이드의 손을 꼭 쥐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우리는 아델하이드의 부모님께 갔다. 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걱정과 실망을 하고 계셨다.

나는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될 수 있으면 낙태시키려고 생각했으나 나와 아델하이드가 강경하게 반대했음으로 끝내는 결혼을 승낙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태를 반대했고 아델하이드도 나와 같은 생각이어서 안심했다.

집에 와서 어머님께 간단하게 편지를 썼다. 아델하이드가 임신했다는 말은 드리지 않고 다만 내가 여기에서 아델하이드와 결혼할 결심이니 어머님께서 허락해주시라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머님의 허락여부에 나의 결정이 변동될 일이 아니었다. 아델하이드의 사진을 그 동안에 많이 보내드렸기 때문에 얼굴은 어머님께 생소한 편이 아니었다.

며칠 후에 어머님의 편지가 결혼에 동의한다는 내용과 함께 도착했다.

‘네가 네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에 벌써 네 결혼에 대해서 네 결정을 따르기로 의논했다. 어린 아내를 울리지 말고 아끼고 사랑해라.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여라.’라고 하셨지만 그 속에 어머님의 울음이 담겨 있는 것을 가히 느낄 수 있었다.

1967년 8월 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예” 하고 약속했다. 결혼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외에 처가의 친지들도 많이 참석했다.

아델하이드의 친척들로 구성된 찬양대가 결혼식에 와서 축가도 해주면서 우리의 앞날을 축하하는 반면에, 장모님의 막내오빠는 히틀러정권시대에 나치 당원이었던 사람으로 자기의 모든 육 남매를 충동시켜 외국인, 더군다나 보잘것없는 광부에게 딸을 준 내 처가와 방문을 단절하라고 했다. 그래서 처가는 외척(外戚)으로부터 격리되었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내가 살던 이웃에 30평짜리 집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거실과 침실, 아이 방과 부엌과 욕실이 있는 아담하게 새로 지은 광산에서 경영하는 주택이었다. 실상 살림을 차렸지만 거의 모두가 처가에서 장만해 준 것이었다.

아델하이드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되었고, 나는 모든 집안 살림을 아델하이드에게 맡겼다. 처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일이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께 빌었다.

“하느님 우리는 갓 심긴 어린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무성할 때까지 지키고 가꾸소서.”

이제는 집에 와도 외롭지가 않았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내 집은 내 영육의 안식처였다. 이제는 내 삶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었다. 나의 삶에는 아내와 아내의 뱃속에 든 아기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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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한인 광부와 간호사 다큐멘터리 방송 캡처 장면

나는 내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델하이드와 함께 우리의 삶을 영위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마음속으로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서른 살의 사내와 동정

하루는 P군을 찾아갔다. P군은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고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제 방에 들어가서 덜렁 침대에 몸을 던지고 다리를 뻗으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입 가장자리에 쓴웃음을 띄우면서 대답했다. 지난 주말에 K군이 와서 남독에 있는 칼스루헤라는 도시로 가자고 했다. 그곳에 사는 독일 사람이 일년 전에 자기에게서 태권도를 배웠는데 이제 칼스루헤라는 도시에서 체육관을 장만하고 그를 사범으로 모시려고 하니 함께 가서 거기에서 일할 조건이 어떤지 보고 오자고 했다.

휴가 중이라 P군은 그를 따라 칼스루헤로 갔다. 독일 사람은 K군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정성어린 대접을 했고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술집 여급들이 두 사람에게 달라붙어 온갖 아양을 다 떨더라고 하면서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올랐을 때 예쁘장해서 마음에 들었던 아가씨에게 끌려 어느 방으로 들어간 후 자기의 지금까지 지켜오던 동정을 잃었다고 했다.

“제길헐 것. 고이고이 간직해서 내 마누라하고 첫날밤에 쓰려고 했더니 술김에 독일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바쁘게 또 한번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내자식이 나이가 삼십인데 무슨 순결이니 동정이니 찾고 있단 말인가? 남자 삼십이면 어느 정도 이성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는가? 언제라도 한번은 첫 경험이니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남자가 성에 대한 경험이 너무 없으면 첫날밤에 실패할 경우가 많고 서로 불만 속에 밤을 지내기 때문에 부부간의 성생활에 지장도 있게 된다고 했다. 아마 이러한 말은 내 자신이 무수한 경험이 있어서 동정이나 순결에 대한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 삼 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입시준비로 인하여 밤늦게 집에 올 때가 많았다. 그때만 해도 밤에는 동삼동에 들어가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청학동 종점에서 집까지 약 한 시간 걸어가야 했다. 워낙 무서움이 많았던 나는 희끗희끗한 것이 보일 때마다 도깨비로 여겼고 머리털을 곤두세웠다.

<선듬 = 선 두메>에서 <웃서발> 가는 길은 해안을 따라 난 신작로 큰길과 초등학교 뒷산을 넘어 가는 산길이 있었다. 밑길인 큰길에는 선듬에서 웃서발로 넘어가는 곳에 산이 바다로 불쑥 내민 장승개라는 절벽이 있는데 거기에 곤 서방이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서 이 절벽을 곤 서방 돌이라고 불렀다.

곤 서방이 우중충한 밤에는 물을 뚝뚝 흘리면서 가끔 나타난다는 이 곳은 그렇지 않아도 도깨비 이야기가 자자한 곳인데 또 뭇매장지가 있었다.

육이오 사변 때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몰죽임해서 곤 서방 돌 옆에 묻었는데 큰비가 오면 가파른 언덕에 덮인 흙이 무너져 묻힌 시체의 팔다리의 뼈가 보이곤 했다. 그런 것을 본 내가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사선을 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그 길을 피했다.

그러나 윗길도 평탄하지 못했다. 길 꼭대기 산에는 여기 저기 오래되고 허물어진 묘들이 서 있고 어떤 묘에는 여우집 같은 구멍이 있었다. 그 옆으로 캄캄한 밤에 혼자 지나가는 것도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윗길이나 밑길이나 도깨비와 귀신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처럼 혼자 걷는 밤길이었지만 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해서 밤마다 이 무서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또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마중을 나오셔도 내가 어느 길로 올지 몰라 학교 앞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하숙을 하겠다고 했다. 아버님하고 친했던 친구께서 도청 앞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아주머니가 자기 이웃에 중년부부가 자식이 없이 살고 있는데 내 이야기를 하니까 그 부부가 자기 집에서 아들 같이 지내라고 했다면서 나를 그곳에 보내라고 했다. 어머님은 한 달에 쌀 한 말 반씩 드리기로 하고 나를 그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집 아저씨는 나이는 마흔 서넛 살쯤 되었고 도청에서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배가 나오고 얼굴이 항상 벌그스레해서 수염이 없는 산타클로스 같았다. 아주머니는 갓 마흔의 나이로 키가 보통보다 좀 크고 콧대가 선, 보기에 깔깔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형이었다.

집이 대궐만 했다. 이런 대궐 같은 집에서 그 해 가을부터 살기 시작했다. 내가 자는 방은 서재와 온돌방 사이에 있는 방이었다. 모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아주 엄격했고 또 내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려면 내가 항상 나갔지만 정한 시간 내에는 꼭 돌아 왔다. 고향친구 보덕이가 내가 살던 집 가까이에 있는 제 큰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주머니는 매주 금요일에 친목회 친구들과 함께 온천장으로 목욕을 가고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 왔다.

이 날에는 아주머니가 오후 네 시쯤에 나가는데 아주머니가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저씨가 평일보다 일찍 집에 오셨다. 이날은 아주머니도 바깥에서 저녁을 먹고 오기 때문에 식모가 있는데도 나더러 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먹고 영화도 보라고 아저씨가 돈을 주었다.

하루는 바깥에 나갔다가 조금 일찍 집에 들어 왔는데, 방금 아저씨가 내의 바람으로 식모 영자의 방에서 나오다가 나와 마주쳤다. 아저씨가 나를 서재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는 절대로 아주머니께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나는 바깥에 나가야 할 필요가 없었고, 아주머니가 안 계셔도 영자가 내 밥을 깍듯이 해서 올렸다.

그 해 겨울에 아저씨는 매년처럼 영덕으로 열흘 간 사냥을 가신다고 했다. 그 덕분에 식모 영자도 고향인 통영으로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그 큰집에 아주머니와 나만 있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매년 자기 혼자 그 큰집을 지켜야 했는데 이제는 내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아침에 아저씨는 영덕으로, 영자는 통영으로 보내고, 우리는 집에 돌아오는 걸음에 시장에 가서 반찬을 샀다. 우리 둘이서 맛있는 것을 해 먹자는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오후에 아주머니가 나더러 목욕을 하고 오라고 했다. 삼일 전에 목욕을 했다고 대꾸하니까 그래도 오늘 또 가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나는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고 왔다.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 대문을 일찍 잠그라는 소리가 방에서 났다. 내 방에서 적신 수건을 펴서 걸상에 걸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미닫이를 열면서 음식준비가 다 되었으니 온돌방에서 먹자고 했다.

방에는 아주머니가 누워 계셨던지 이불이 펼쳐 있었고 머리맡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상에 앉고 보니 아주머니는 저녁에 집에서 입는 일본식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나는 생각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동삼동 촌구석에서 보지 못하던 음식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것 먹어보라, 저것 먹어보라 하면서 심지어는 갈비를 이로 뜯은 것을 입에서 내어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계면쩍었으나 권하는 바람에 받아먹었는데, 그때에, 나는 고기를 집어서 내 입에 넣어 주는 손 아래로 아주머니의 하얀 유방이 들어 나는 것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두루마기 아래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내 눈길을 의식한 아주머니는 젖가슴을 더 들어 나게 했고 나는 자꾸만 내 눈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의 한쪽 유방이 완전히 드러나다시피 되었을 때 식사가 끝났고, 더운 물수건으로 내 손과 입을 손수 닦아주면서 아저씨가 올 때까지 나더러 온돌방에서 자라고 했다.

나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끼면서 하라는 대로 잠옷을 갈아입으니 아주머니가 언제 장만했던지 나에게 맞는 일본식 두루마기를 주면서 잠옷 대신 그것을 입으라고 했다. 아랫도리가 서늘했지만 온돌방이니까 괜찮겠다고 여기면서 아주머니가 누워있는 온돌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있던 아주머니가 이불을 옆으로 젖히면서 자기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좀 쑥스러웠으나 하라는 대로 옆에 누우니 팔을 뻗어서 내가 베도록 했다.

아주머니의 손이 내가 입은 두루마기의 띠를 풀고는 내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짜릿한 무엇을 느끼면서, 마비된 사람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자기 젓 가슴에 대고는 만지게 했다. 아기에게 젖을 빨린 적이 없는, 아주머니의 탄력 있는 젖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처음으로 여인의 냄새 같은 것을 느꼈다. 아랫도리가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주머니의 손을 느꼈다.

아주머니는 나를 꼭 끌어당기더니 내 입을 맞추면서 그 혀를 내 입안에 넣었다. 나는 말만 듣고 영화에서 보던 키스를 맛보았다. 처음으로 나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놀았고 두려움도 잊어 버렸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갔으나 아무 정신도 없었고 아주머니의 둥글고 통통한 젖가슴과 벌거벗은 몸만 생각하면서 잠이 꼬박 들어서 벌을 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밤새도록 하던 그 놀이가 계속되었다. 학교에서 학과시간에 잠을 자는 일이 많았음으로 벌도 받고 매도 맞았다. 그 이야기를 아주머니께 했더니 결석계를 써서 줄 테니 한 주 동안 아저씨가 올 때까지 집에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밤낮 이불속에서 뒹굴었고 아주머니는 모든 방식을 다 실험했다.

하루 전에 영자가 돌아 왔으나 우리가 한 방에 자는 줄은 영자가 알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저씨가 왔다. 나는 이제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줄 알았음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아저씨가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하고 자면 나는 영자를 빼앗겠다고 생각하고 살그머니 일어나서 영자의 방문을 열었다. 영자는 아직 자지 않고 누워 있었다. 영자는 내가 들어오니까 이상했던지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들어 와서 놀다 갔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나를 이불 밑에 오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여자를 아는 남자였다. 옆에 누워서 영자의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었다. 남자를 아는 영자였다.

처음에는 내 손을 뿌리쳤으나 자기와 아저씨와의 사이를 알고 있는 나에게 어쩔 수 없다는 격으로 몸을 맡겼다. 영자는 나의 숙련된 행동에 의아해하면서 자기도 즐겁게 밤을 보냈다.

새벽에 부엌에 나갈 때에 나를 깨우면서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알게 되면 자기는 쫓겨 나가게 되니까 다시는 제 방에 오지 말라고 애걸했다. 나는 약속을 하고는 내방 차가운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 이튿날 아주머니는 친구들과 동래로 가셨고 아저씨는 영자 방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도 미웠고 영자도 미웠다.

그 날 밤에 나는 잠을 못 이루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늦게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아랫도리가 차고 축축해서 잠을 깨고 보니 이불과 잠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오줌을 쌌다.

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은 후 젖은 이불을 둘둘 말아서 동여 메어두고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에 나는 아주머니에게 이제는 과외수업도 끝났고 입시준비를 해야 하니 집으로 가겠다고 하고는 이불과 책가방을 짊어지고 그 집을 나왔다.

아주머니는 자기 나름대로의 짐작이 있었던지, 나를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깐 후에 나와서 나에게 무엇을 쥐어 주기에 받아 보니 많은 돈이었다. 도청 앞에서 택시를 잡아 나는 집으로 갔다.

나는 박 군에게 내가 어렸을 때 어른의 노리개로 동정을 잃어버려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결혼 전의 정조나 순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혼 후에 충실하게 부인과 남편을 배신하지 않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정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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